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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19:57:16

주인규

朱仁奎
1901년? ~ 1956년 9월

1. 개요2. 생애3. 활동 내역4. 참고/관련 자료

1. 개요

일제강점기 때부터 활동했던 월북 영화인이자 노동운동가.

2. 생애

1901년경 함경북도 함흥에서 지주 주경팔의 아들로 태어나 1919년경 연상이던 이인동과 결혼했지만, 결혼 생활이 원만하지 못했다. 1922년 5월에 아내 이인동은 남편 집에서 사는 시집살이에 반발하여 만병수로 자살을 기도하자 이에 충격받은 시아버지 주경팔이 6개월만에 사망했고, 수년 뒤에는 친정에서 첫째 아이를 낳았음에도 시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해산 5개월 뒤 아이만 돌려보내는 등의 갈등 때문에 1927년 11월에 이혼소송까지 벌어졌다.(매일신보 기사)

반면 주인규 자신은 1922년 고향에서 발족된 극단 '예림회'에 가입해 문예부장 안종화를 만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예림회는 경영난으로 2년만에 해체됐고, 동료였던 나운규, 김태진과 함께 안종화를 따라 일본인이 운영하는 영화사 '조선키네마'에 연구생 자격으로 입사했다. 1925년에는 일본인 감독 왕필렬(본명: 다카시 켄조)의 영화 <해의 비곡>과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서 단역으로 나왔지만, <운영전>의 흥행 실패로 인해 윤백남이 연구생들을 이끌고 '백남프로덕션'을 세워 독립하자 자신도 같이 따라가서 1,000원을 출자했다.

그는 첫 작품 <심청전(이경손 감독)>에 나온 뒤 춘원 이광수 작가의 소설을 영화화한 <개척자>에서 악역이자 젊은 화학자인 김성재 역을 맡아 처음으로 비중있는 역할을 맡았지만, 무더위로 네거티브 필름이 망가졌다. 그럼에도 빚을 갚고자 망가진 필름을 갖고 경성부 종로의 단성사에서 개봉했지만 개봉 첫날에 대홍수로 더 이상 상영을 할 수가 없었으며 관중들도 십여명에 그쳤다. 이러한 실패 때문에 백남프로덕션은 문을 닫았고, 나운규 등 동료들이 계림영화협회에 합류했으나 주인규 자신은 합류를 거절하고 두문불출하다가 1926년에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 합류하여 <아리랑>에서 오기호 역을 맡으면서 악역 배우로 더욱 급부상했다.

그러나 1927년 <먼동이 틀 때>의 흥행 실패로 계림영화협회가 문을 닫고, 그는 극동영화사로 옮겨 <낙원을 찾는 무리들>에 나왔다가 다시 조선키네마프로덕션으로 돌아가 <뿔빠진 황소>에 나왔지만 또 망했다. 같은 해 11월 아내와의 이혼 등 사생활 문제가 불거지자 영화계를 떠나 고향 함흥으로 돌아갔다. 1929년에 윤봉춘 감독의 영화 <도적놈>[1]에 나와서 흥행적으로는 망했지만 공산주의 운동가들에겐 호평을 받았다. 그 뒤 영화 수업을 명분으로 하여 소련 모스크바로 떠나려 했지만 국경을 넘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1928년 원산 총파업 때 '원산영화공장'을 발족하여 파업 노동자들을 지원하여 노동운동가로서의 면모를 처음 보인 뒤, 1929년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 함흥공장에 위장 취업하여 적색 노조운동을 일으키는 한편, 1932년에 미국 유학파인 황운과 함께 '길안든영화사'를 세워 <딱한 사람들>을 제작했지만 개봉 직전에 동생 주선규와 함께 '제2차 태평양노조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된 채 일본 경찰에게 검거되어 1934년 10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언도받았다. 1938년 출소 후 고려영화협회의 <복지만리>[2]를 통해 배우로 복귀했고, 이듬해 고려영화협회 산하 극단 '고협'의 창설에도 합류하여 국내 및 만주에서 순회공연을 했다. 1942년 일제의 영화사 통폐합 당시 그는 사상범이라 합류가 안 됐지만 <망루의 결사대(1942)> 등지의 친일 영화에 간간히 나오다가 1945년 8.15 광복 후 소련군이 해방시킨 함흥으로 돌아가 조선공산당 함남도당 검찰부장이 됐다.

1946년 소련군정에 의해 이북 지역의 영화산업을 국유화하는 책무를 맡아 북조선영화사 및 극장영화관위원회의 위원장이 됐고,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문예총) 산하 영화동맹위원장도 맡았다. 1947년 '국립영화촬영소(현 조선예술영화촬영소)'가 발족되면서 초대 총장이 된 후 1949년 북한 정부수립 이래 최초의 영화 <내 고향> 등의 제작을 지도했고, 1950년 6.25 전쟁 뒤에 만들어진 <초소를 지키는 사람들>에선 직접 연출을 맡았다. 전쟁 당시에는 서울의 영화인들을 북으로 데려가는 일과 종군영화 촬영 지휘, 북한군 위문 등을 맡았으며 그해 10월 국군과 유엔군의 평양 진입으로 북한 정권으로부터 촬영소를 강계로 옮기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이에 충실히 임무를 다하지 못해 총장직에서 쫓겨났다. 거기에 리강국의 사촌이라는 이유로 전쟁 말기 남로당파 숙청에 연루되기도 했다. 1956년 <바다는 부른다>에서 조연배우로 복귀했지만 그해 8월 종파사건으로 숙청이 진행되어 여러모로 고통을 겪다 그해 9월경에 자살했다. 이는 전 북한 문화선전성 제1부상 정상진의 수기 <아무르 만에서 부르는 백조의 노래>를 통해 언급됐다.

3. 활동 내역

4. 참고/관련 자료



[1] 1930년 개봉.[2] 1941년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