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신안(新安),
지금의 중국 강서성 무원현(江西省 婺源)
송나라때 대학자 주희(주자)의19대손
부친은 호조참판을 지낸 휘 읍(浥)이며 모친은 선산(善山) 이윤도(李潤道)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용력이 뛰어났으며, 일찍이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을 거쳐 금산군수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흩어지는 백성을 모아 병력을 강화하고 방어태세를 갖추니 적병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첫번째 해전인
옥포 해전에 부장으로 참여 왜선을 격파 하였으며
그는 다시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와 강덕룡(姜德龍)·정기룡(鄭起龍) 등 경상도 지역에서 용맹을 떨치던 의병장들과 힘을 합하여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곽재우 장군이 영산전투에서 왜적에 사로잡히자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곽재우 장군을 구출해 내고, 연이어 적진의 중심부를 급습하여 무찌르니 왜적은 감히 맞서지 못하였다.
그 중에서도 강덕룡·정기룡 의병장과 자주 영남 산간지대를 중심으로 유격전을 전개하여 적을 격파하였기 때문에 주민들로부터 ‘삼룡장군(三龍將軍)’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596년에 충청도 홍산에서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이 일어나 한때 임천·청양·대흥(大興) 등지를 휩쓸고 있었다.
이 때 반군들은 성세(聲勢)를 올리기 위하여 유명한 인물을 들어 동조자로 선전하였는데, 그의 이름이 끼어 있어 한때 연루자로 투옥되기도 하였으나 사실이 아님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죽은 뒤 형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전라도 태인(泰仁)의 충렬사(忠烈祠), 진주 평천서원(平川書院), 의령(宜寧) 충익사(忠翼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