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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50:33

주교/고대 교회

1. 개요2. 직무 명칭의 혼란3. 사도계승
3.1. 동시대 유대교의 직무 계승
4. 직무와 연계된 성찬5. 바울로 계통 교회에서의 지도자적 직무와 카리스마6. 로마 주교와 베드로7. 개별 교회: 집단 지도체제에서 단독 지도체제로8. 기타: 여성과 직무

1. 개요

교회 초창기에는 성령의 은총이 많은 사람들의 특수한 활동을 통하여 드러났는데 교회 안에서 이러한 직무를 수행한 사람들 중에는 사도, 예언자, 전도사, 목자, 교사, 기적을 행하는 사람, 병을 고치는 사람,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사람, 희사하는 사람 등이 있었다. 이 여러 직무 중에는 은사에 의한 직무도 있었고 사도의 권위로 설정된 책임자로 있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의 초석인 사도직에 관련된 직무들로 차츰 제도화하여 episkopos(감독 혹은 주교), presbyteros(원로 혹은 사제), diakonos(봉사자 혹은 부제)의 명칭으로 후대로 이어진다.

바울로 서간을 제외한 신약성서의 책들을 보면 당시 직분들이 나온다. 사도(사도 1,6 외 다수), 봉사자(사도 6,1-7), 감독(사도 20,28), 원로(사도 20,17; 야고 5,14; 2요한 1,1; 3요한 1,1.9; 1베드 5,1), 예언자(마태 23,34), 현자(소포스: 마태 23,34), 율사(그라마튜스: 마태 13,51;23,34) 등이다. 바울로 서간들과 비교해보면 사도, 예언자, 봉사자, 감독, 원로는 겹치는 명칭들인데, 이를 통해 그 직분들이 1세기 교회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 오늘날 '주교(episkopos)'는 어원적으로 '감독'(episkopos)과 연결된다.[1]

사도들의 포교 활동으로 예루살렘의 교세가 신장하고 교무가 복잡해지자 사도들은 그에 따른 새로운 직무들을 '기도와 안수'라는 절차를 통해 맡기기 시작했다. 기도와 안수는 단순한 축복의 의미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성령의 은총을 주는 것으로 교계제도의 절차 안에 그리스도가 직접 작용하고 살아있음을 확신하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성령의 현존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었다. 따라서 교직자들에게 부여되는 직무의 은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사를 보여주는 성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성서상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 주어진 여러 직무들은 언제나 공동체의 성장과 복음 선포에 관련된 것으로 교회 공동체를 위한 봉사 직분이었다. 사도들의 생전에는 사도들의 포교 활동으로 중요 도시마다 교회가 설립되면서 이들 교회에서 사도들을 보필하고 직접 지도할 신앙 깊고 덕망 있는 유지들을 뽑아 감독단을 결성했다. 그리고 박해가 심해지고 사도들의 죽음이 가까워 오면서 사도들은 복음 선포의 계속을 위해 원로들 중 학식과 덕망이 뛰어난 사람들에게 그곳 교회를 통치하는 (오늘날로 치면 주교라고 말해야 할) 직무를 맡겼다.

신약성서에 에피스코포스는 모두 다섯 번 나오는데(필립 1,1; 사도 20,28; 1디모 3,2; 디도 1,7; 1베드 2,25), 그 중에서 주교직과 직접 연관된 세 본문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의 종들인 바울로와 디모테오가 필립피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과 감독들과 봉사자들에게 씁니다.”(필립 1,1)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과 모든 양떼를 돌보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양떼의 감독으로 세우셔서 당신의 피로 세우신 하느님의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사도 20,28)
“이 말은 확실합니다. 어떤 이가 감독직을 맡고 싶다면 그는 훌륭한 일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독자는 비난받을 것이 없고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건전하고 분별력 있고 단정하고 손님 대접을 잘 하고 가르칠 능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주정뱅이나 싸움질 잘 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양보할 줄 알고 다투지 않고 돈에 대한 욕심이 없어야 합니다.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리고 언제나 위엄 있게 자녀들을 순종시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기 가정도 잘 돌보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새로 입교한 사람도 안 됩니다. 교만해져서 악마의 단죄 선고에 떨어질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난을 받지 않고 악마의 올가미에 걸리지 않도록 바깥사람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1디모 3,2)

세 본문을 통해 '에피스코포스'는 그리스도교가 탄생했던 1세기부터 교회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호칭임을 알 수 있다. 비록 사도 바울로는 감독이라는 직분을 거론만 했을 뿐, 그 직무나 권위에 대해 이렇다 할 언급이 없다. 하지만 그의 후학이 쓴 디모테오 전서는 감독의 확실한 입지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디모테오 전서에는 바울로의 이상이 수용된 구체적인 교회상이 담겨있다는 뜻이겠다. 그런 까닭에 디모테오 전서는 후서와 디도서와 더불어 흔히 ‘사목서간’으로 불린다. 특히, 1세기 교회의 직제와 직무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보여주기에 '초기 가톨릭주의'를 반영하는 책으로 평가를 내린다.

이미 사도행전의 스테파노가 오늘날의 주교에 해당하는 직무를 보여주며,[2] 1세기 말경 사도 요한이 소아시아 지방의 일곱 교회[3]에 보낸 서간에서 교회 전체를 수신인으로 하지 않고 책임자를 수신인으로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곧 사도들을 포함한 1세대 그리스도인들이 죽으면서 그들의 사목적 권한이 각 개별 교회의 직무자들에게 계승될 필요성이 떠오른 것이다. 이러한 경향으로 인해 각 지역에 주교가 상주하는 1교회 1주교 제도가 성립되기에 이른다. 주교가 교회 본연의 우두머리로서 교회의 중심점으로 나타나자 원로들은 주교의 사제단을 구성했고, 교도직과 사제직에 있어서 주교의 협력자가 됐고 주교 공석시 주교를 대리하기도 했다.

초기 그리스도교 단체는 선교의 특성상 도시에 세워졌고 이 단체의 지도자는 주교들이었다. 그러나 교회 규모가 커지면서 여러 교회로 나누어지게 되는데 기부와 유산 증여 등으로 교회의 소유가 된 개인 집들이 신부들의 거처이자 직무활동의 중심지가 돼 오늘날의 본당과 같은 형태를 띄게 된다.300년경 로마에는 이러한 교회에 원래 집 주인의 이름을 붙이다 후에 유명한 순교자 혹은 성인들의 이름을 붙였다. 이러한 일군의 본당들이 교회의 관할구역을 구성했는데 그 경계는 일반적으로 로마제국의 지방 경계선과 동일했고 그 지역의 수도가 교구로 불리웠다. 이는 지방 교회가 그 지역의 수도에서부터 먼저 세워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방 교구의 주교들이 중요한 임무를 위해 시노드(종교회의)에 몰려들었고 시노드는 교회 일치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주요한 방편이 됐다.

2. 직무 명칭의 혼란

가톨릭-정교의 주교(ἐπίσκοπος[4]), 사제(πρεσβύτερος[5]), 부제(διάκονος[6])는 어원적으로 신약성경 속 직무들인 감독(ἐπίσκοπος), 원로(πρεσβύτερος), 봉사자(διάκονος)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만 신약 성경에서는 비교적 후대의 문헌에 속하는 사목 서간들[7]에서도 이러한 용어들은 전문적 용어로는 자리잡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오늘날의 주교, 사제, 부제를 신약 속의 세 가지 직무와 동일한 용법으로 성경에서 쓰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8] 심지어 성경 안에서도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개별 교회의 계통에 따라[9] 잡다하다는 인상까지 줄 정도로 혼란이 보인다.
사목 서간의 수준에서 볼 때 봉사자, 장로, 감독의 의미는 완전히 분명하게 전문적인 용어로 정착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그들을 오늘의 부제, 사제, 주교로 동일시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 칭호들의 의미는 둘 내지 세 단계의 위계질서의 틀 안에서 발전되어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각 칭호는 사로[10] 다른 그리스도인 영역에서 비롯하였고 모든 이가 고유한 하나의 직무를 동일한 방식으로 지칭하지도 않았다. 바오로 계열에 속하지 않은 교회에서는 봉사자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았고 유다계 그리스도인 영역에서는 장로가 감독에 해당하는 직책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이 칭호들은 점차 혼합되어 여러 단계의 위계질서 안에서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적어도 사목 서간의 시대에 그 과정은 시작에 불과하였다. 다음 장에서 이 문제를 재론할 것이다.
지금은 장로가 언급되고(1디모 4,14; 5,17; 디도1,5) 감독은 단수로 나타난다는 것만을 지적하자(1디모 3,1.2; 디도 1,7). 이 점은 필립 1,1에서 감독과 보아자 두 칭호가 모두 복수로 사용된 사례와 다르다. 흔히 주석가들은 장로와 감독이 서로 교환하여 사용될 수 있는 것처럼 장로-감독을 함께 묶어 말한다. 실제로 사도 20,17.28에서 루가는 둘을 혼동하는 것으로 보이나. 이와 거의 유사하게 디도 1,7이 말하는 감독은 5절에서 언급한 장로들의 그룹에 속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한 그룹을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단수의 한 개인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의 맥락에서 장로는 젊은이들에 대하여 장로라고 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개념이지 직접적으로 특정 직무를 가리키는 내용이 아니었다. 반대로 감독은 보살피고 감독하는 세속적인 기능을 첫 번째로 상기시켜주었다. 물론 디모테오 전서와 디도서가 팔레스티나와 그리스의 서로 다른 환경에서 출발하여 의미상의 혼동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으나 이 두 칭호를 너무 쉽게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장로들은 "지도자 역할을 하고 특히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1디모 5,17)을 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장로들이 같은 책무를 맡은 것은 아니다. 여기서 새로운 것은 일부 장로들이 말씀의 직무를 위임받은 것인데 다른 곳에서는 그들의 집단적인 역할이 공동체를 운영하는 책임을 수행하는 것이었다(사도 11,30; 15,2.22 이하). 아마도 디모테오 전서보다 먼저 쓰인 디모테오 후서에서는 장로들에 대해서도 감독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다.
-샤를르 페로(Charles Perrot), 《예수 이후 ―초대교회의 직무》(Après Jésus: Le Ministère chez les premiers chrétiens), 백운철 옮김 (서울: 가톨릭출판사, 2002)[11] 223-225쪽
신약성서 안에 있는 직무에 관한 요소들은 상이한 교회론을 반영이나 하듯 흔히 잡다하기까지 하다. 직무 칭호들은 정경 안에서 처음부터 서로 충돌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성서는 오늘의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손에 쥐어주지 않는다.
-《예수 이후》, 341쪽
유비 원리, 즉 내적 관계의 원리는 늘 영의 영향 아래 움직이는 "그리스도의 몸" 교회론 안에서 핵심 내용이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신학자는 초대교회의 직무 기능들을 오늘의 현실에 성급하게 동일시하는 행위를 삼가야 한다. 주교단을 포함하여 오늘의 사도는 열두 사도들이나 바오로 사도와 온전히 같을 수 없다. 오늘의 사제와 목자는 사목 서간의 "장로(presbyteros)"의 단순한 계승자가 아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필립 1,1에서 말하는 "감독(episcopos)"의 기능을 오늘의 주교 기능으로 환원할 수 없다. 요컨대 오늘의 표상들을 과거의 세계에 투사하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에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예수 이후》, 28쪽
네 번째로 직무에 관한 토론을 분열시키는 요인의 하나는 부정확한 언어를 거의 무비판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발설된 단어마다 정확히 저울질 해보아야 하는데 직무에 관한 표현들이 다양해서 그것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직무 표현들은 너무나 일상화되어 있어서 그 의미를 정확히 구별해 내기가 어렵다. 화자에 따라 다른 의미를 내포하는 카리스마(은사)와 같은 단어를 사용할 때 어떻게 매번 그 용법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겠는가? 막스 베버가 당대의 사회학에서 빌려 온 개념으로 설명한 은사는 바오로가 1고린 12-14장에서 설명한 은사와 다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차후에 언급할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은사와 제도를 공개적으로 반립시키거나 잠재적으로 반립시키고 있지만 이런 작업은 주석학적 연구에서는 불필요하다. 어제의 언어는 더 이상 우리의 언어가 아니다. 오늘의 의미론적 충돌이 과거에는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직무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용어는 엄밀한 검토를 거쳐야 한다.
-《예수 이후》, 32-33쪽

심지어 '사도'라는 말에서도 혼란이 엿보인다. 바울로의 발언에서, 사도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다.
실상 나도 전해 받았고 또 여러분에게 제일 먼저 전해 준 것은 이것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말씀대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또 성경말씀대로 사흘 만에 일으켜지시고, 게파에게, 다음에는 열두 제자에게(τοῖς δώδεκα) 나타나셨습니다. 이어서 그분은 한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 중의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남아 있지만 몇몇은 잠들었습니다. 이어서 그분은 야고보에게, 그 다음에는 사도들에게(τοῖς ἀποστόλοις) 나타나셨으며 맨 마지막으로는 배냇병신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12]
-고린토 1서 15장 3-8절. 한국 천주교 200주년 신약[13]

반면 루가는 최협의의 사도 개념을 선호한다. 비록 사도행전 14장에서 바울로를 사도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그를 '진짜배기 사도'가 아니라고 본다.
이제 여기서 루가가 제시하는 바울로의 모습을 살펴보아야겠다. 루가는 역사를 당시 규준들에 따라, 그러나 신학자로서 서술한다. 루가의 바울로상은 그가 펼쳐보인 신학적 구상에 맞추어져 있어서, 역사상 바울로와는 거리가 있다.
아마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울로가 루가에게는 여느 사도들처럼 진짜배기 사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도는 열둘이니, 곧 세례자 요한의 세례부터 예수 부활까지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들이다(1,21-22 참조). 루가는 사도 칭호를 이 열두 사람에게 국한하기 때문에, 바울로에게는 사도 칭호 부여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루가가 바울로와 바르나바를 사도로 칭하는 경우가 한 번 있는데(14,4.14), 사도 칭호를 좀 헐값에 내주었다고 하겠다. 바울로와 바르나바는 사도들, 즉 교회가 선교 과업을 위해 가려내어 파견한 "사자들"(13,2-3), 안티오키아 그리스도인들의 사자들이다.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바울로》, 분도출판사, 2008, 467-468p
사도 개념을 폭넓게 이해·사용하는 경우 ―예컨대 루카 복음서 11,49나 바르나바와 바오로(순서 주목!)를 사도로 지칭하는 사도행전 14,14[14] ― 는 아주 드물다. 열두 사람 사도직이라는 강령적 의미에서는 바오로도 당연히 사도일 수 없다. 열두 사도는 바오로의 활동에 앞서 존재하는 일종의 제도다.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신약성경신학》, 분도출판사, 2014, 293쪽

따라서 초세기 교회에는 가장 좁은 의미의 사도인 12 제자와, 다소 애매한 중간 지대에 있는 광의의 사도들이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상의 혼란은 2세기 초에는 거의 고정된다. 이렇게 된 원인은, 첫번째로는 지상 예수와의 시대적 격차가 벌어지면서 (이단을 막고 전통을 보존하기 위해) 제도의 엄밀화에 대한 동기가 커졌다는 것이고,[15] 두번째로는 다소 긴장 관계를 이루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점차 긴밀하게 연결되고 교류가 증가했다는 것이다.[16] 따라서 특정 개별 교회의 직무 명칭이 다른 개별 교회에 받아들여지고, 이것이 통합되고, 개별 그리스도인을 파문하는 권한이 직무자의 특별한 권한에 속하게 되면서[17] 마침내 오늘날의 3단계 교계 제도로 완성된다. 지나치게 설명을 단순화하여, 직무와 카리스마가 마치 서로 멱살을 잡은 것처럼 여겨서는 안되지만, 후대로 갈 수록 직무가 더 엄밀화되었다고 보면 무난할 것이다.
초기의 은사 예언자들은 제도화된 직무에 자리를 내주었다. 이 직무는 곧 주교, 사제, 부제로 위계화되었다. 이러한 도식적 설명은 바오로가 말하는 자유로운 예언에로 복귀하려는 경향과 이미 사목 서간이 제시하는 바와 같이 고정된 제도권의 반발이라는 긴장을 고조시킨다. ...... 물론 이러한 도식이 어느 정도 타당성을 지닌다 하더라도 이를 공동체의 제도에 작용시켜 제도화가 마치 지속적인 의미의 와해 과정인 것처럼 제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첫 그리스도인들의 은사적 열정은 점차 완고한 형태의 제도에 밀려나기 시작했다고 흔히들 말한다. 그러나 최근 십 년전부터 이러한 도식적 해석은 오히려 힘을 잃게 되었다. 먼저 은사와 제도를 대립시켜 이해하는 태도는 바오로의 경우[18]를 포함하여 초대교회의 상황에는 걸맞지 않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여기서 사용되는 어휘에 관한 문제 그리고 부활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확신의 근거에 관한 문제 등 적어도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되었다. 예컨대 바오로 서간에 나타난 예언자와 은사 개념은 흔히 상상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첫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은 영도자도 아니고 구루도 아니었으며 또는 은사를 가졌다고 선언된 어떤 개인적인 인물도 아니었다.
-《예수 이후》 279-280
직무 어휘는 처음부터 크게 발전하여 2세기 초에는 거의 고정되었다. 사도, 예언자, 교사, 감독, 봉사자, 장로 등의 칭호는(인도자 및 협력자는 곧 잊혀진 칭호였다) 각각 장소와 시간에 따라 발전하였다. 바오로 시대의 봉사자는 사목 서간의 봉사자(부제)와는 달랐다. 지속적인 의미 이동과 직능 이동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바오로 계통의 공동체들 내지 비바오로 계통의 공동체들, 예루살렘과 안티오키아 그리고 헬레니즘 세계의 서로 다른 공동체들의 전망에서 출발한 이 칭호들과 직능들은 빠르게 서로 교착되고 흡수되어 마침내 사목 서간들과 첫 교부 시대부터 직무 구조가 먼저 2단계로, 이어서 3단계로 통합되었다.
-《예수 이후》 342쪽

아무튼 오늘날의 교계 어휘를 초세기 교회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려운 면이 존재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3. 사도계승

사도행전의 일곱 봉사자는 부제가 아니라 주교이며 오늘날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매우 강력하게 사도계승 및 창립사 이야기이다. 사도행전의 일곱 봉사자는 유다인 도시 공동체를 섭정하던 일곱 판관을 본뜬 고위직이었다.
교회적 실천의 전형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제시된 모범적인 이야기 중에서도 일곱의 제정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사도 6,1-7). 그것은 루가에게 그리스도인 직무의 탄생 이야기이고 매우 강한 의미로 창설 이야기이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부제직이라는 직무로 그 범위를 축소시켜서는 안 된다. 여기서는 부제직을 말하는 것이 전혀 아니고 봉사에 집중된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이야기를 주의 깊게 읽어야할 뿐 아니라 베드로와 평행을 이루며 사도 14,23에서 바오로가 직무를 전수하는 이야기 특히 밀레도스의 이야기를 담은 바오로 전승군의 요소들을 올바로 읽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 이후》 203-204쪽
스테파노와 일곱은 집단적인 체제의 고위 지도자들이었다. 오늘로 말하면 주교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 일곱 지도자들의 숫자는 당시에 유다인 도시 공동체를 섭정하고 특히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던 일곱 판관들을 본뜬 것이엇다. 그들은 새로운 지도자들이었지 하위급 인사들이 아니었다. ...
일곱 지도자들이 일단 선택된 후에는 열둘에 의해 임무를 부여받았고 또 안수를 받게 된다. ...... 마티아를 선출하던 것과는 달리 이 지도자들은 이처럼 교회적 중개를 통하여 지정되었다. 공동체가 자신의 사람들을 선택하여 열둘에게 추천한 것이다. 이어서 모든 이가 기도하고 안수하였다. 그리스어 본문에서 안수의 주체는 분명하지 않다. 열둘이 안수하였거나 차라리 열둘과 공동체가 함께 안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열둘을 제외하고 공동체만이 안수하였을 가능성은 없다. 나중에 재론하겠지만 이 안수 동작은 영과의 유대, 선교 임명, 권한의 전달 또는 사람들과 그룹들 간의 교회적인 통교 개념을 불러일으킨다. 예컨대 안수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사도들에게 연결시켜주었고(사도 8,17) 바르나바와 바오로에게 한 안수는 성령에 의한 선교 위임(사도 13,2-3)이었다. 그리고 바오로가 에페소의 제자들에게 한 안수도 있다(19,6). 안수 동작은 영의 이름으로 의미와 사명을 전달하는 손에 의한 지명인 것이다.
-《예수 이후》 212-213쪽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갈등이 야기되어 구체적으로 "식탁에서의 봉사"문제가 제기되었다. ... 따라서 이스라엘의 촌락들을 관행적으로 섭정하던 7명의 판관들 내지 유력자들을 본받아, 희랍식 이름을 가진 7명의 지도자들과 함께 새로운 직무 체계를 정착시켜야 했다. 이들은 오늘날 통용되는 의미의 부제가 아니라 예루살렘의 유다-희랍계 그리스도인들의 특별한 상황에 부응하여 이 사람들을 담당하는 새로운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이었다. ... 루카가 전하는 교회 직무의 탄생 이야기인 것이다. 열두 사도들은 함께 모여 새로운 지도자들에게 안수하였다.
-샤를르 페로(Charles Perrot), 《초대 교회의 예수, 그리스도, 주님 ㅡ 주석학적 그리스도론》(JÉSUS, CHRIS ET SEIGNEUR DES PREMIERS CHRÉTIENS), 백운철 옮김 (서울: 가톨릭대학교출판부) 118쪽

물론 루가가 전하는 사도와 주교(봉사자)의 관계를 다른 개별 교회의 사례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지는 따로 보아야 하지만, 안수를 통한 사도계승은 여기에서 확인이 되는 것이다.

또한 안수는 셈족계 교회를 다룬 디다케에서도 암시가 된다.
과거의 예언자가 오늘날의 교역자가 되는 전이 과정에서 디다케는 주님의 날과 빵의 나눔을 언급한 직후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해준다.
"따라서 온유하고 사욕이 없으며 진지하고 신뢰할 만하며 주님께 맞갖은 사람들을 (손으로) 가리켜 감독들과 봉사자들로 삼으시오. 그들은 여러분 곁에서 예언자와 교사의 직무(글자 그대로는 전례)를 수행할 것입니다"(디다케 15,1).
이처럼 새로운 지도자들이 성체성사의 맥락 안에서 말씀의 봉사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직무와 은사들을 책임짐으로써 직무의 실제적인 계승이 이루어졌다.
-《예수 이후》 275쪽
"주님께 맞갖은 감독들과 봉사자들을 유순하고 사욕이 없으며 진지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들 가운데서 선출하시오. 왜냐하면 그들은 여러분 곁에서 예언자들과 교사들의 직무를 완수하기 때문이니다. 따라서 그들을 업신여기지 마시오. 또 그들은 예언자들과 교사들과 같은 자격으로 여러분 가운데서 존경을 받기 때문입니다"(디다케 15,1-2).
여기서 '선출하다'[19]라는 동사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고[20] 한편으로는 예언자와 교사 간에 또 한편으로는 감독과 봉사자 간에 이미 계승 관계가 설정되었다.
-《예수 이후》 188-189쪽

공동체의 안수라는 말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으나, 위의 《예수 이후》 212-213쪽 발췌에서 언급하듯[21] 사도행전 6장의 안수 주체를 공동체로 파악한다면 디다케의 안수는 사도행전 6장의 안수(사도를 포함한 공동체의 안수)와 매우 유사하다.

바울로 계통 교회에서도 사도계승은 확인이 되며, 사목서간에서는 "교회들에서 시행되고 있는 서임이 사도에게까지 소급된다는 것"은 중요한 개념으로 나타난다.
두루 알다시피 사목서간에서 바울로 사도의 영향은 절대적이다. …… 바울로는 무엇보다도 교회 조직가다. 바울로는 전체 교회 지역들을 몸소 정비하거나, 두 제자 디모테오와 디도를 통해 돌본다. 이로써 사도의 한 가지 중대 관심사가 뚜렷이 부각되는데, 사도행전은 이것을 부수적으로만 언급한다. 바울로는, 자신이 그리스도께 직분을 부여받았듯, 디모테오에게 안수를 통해 직분을 부여했다. 그때 이 제자에게 직무의 은사가 전달되었다(2디모 1,5). 안수가 한번은 바울로 자신에 의해 다음번엔 장로들에 의해 행해졌다는(1디모 4,14) 것은, 사목서간 교회들에서 관철된 직무와 직무 위임의 관례에 바울로를 끌어들임을 의미한다. 디도가 그레데 섬의 교회 지역 정비를 마무리하고 도시마다 장로들[신중히 선택되어야 한다(1디모 5,22)]을 임명할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것은(디도 1,5), 에페소로부터 시도한 그레데 선교가 성공을 거두었음을 전제한다.
장로에 임명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건전한 가르침을 옹호하고(디도 1,9) 자신들에게 맡겨진 귀한 것을 잘 간직할(2디모 1,14; 1디모 6,20) 임무를 지닌다.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바울로》, 이종한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8), 474쪽
'바오로'는 곧 티모테오에게 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희망을 표명한 뒤, 이렇게 말한다: "내가 늦어지게 될 경우, 그대가 하느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교회로서,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입니다." 이로써 사목 서간의 근본 의도가 확실시 시사되었다. 티모테오를 만난 적이 없는 '바오로'가 교회를 위한 지시를 내린다. 교회라는 주제가 중심이라는 것이 이로써 확증되어 있다.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신약성경신학》, 이종한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14), 475쪽
교회의 내적 조직화와 공고화는 과거를 회고하며 이루어진다. 여기서 사람들은 바오로 사도와 연결된다. 이는 물론 교회들이 바오로와 그의 제자들의 예전 선교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과도 관계가 있다. 과연 그들의 이름부터가 방향을 지시해 준다. 하지만 (에페소서에서와는 달리) 다른 사도들은 언급되지 않는 것이 눈길을 끈다. 여기서 달리 규정지어진 교회들과의 일종의 경계 설정 시도를 읽어 내서는 안 될 것이다. 앞으로 보려니와, 사람들은 교회 구조 문제에서 조정과 동화에 힘썼다. 교회의 사도적 성격으로의 복귀를 오로지 바오로에 맞추어 시도한 것은, 전진하는 연속성을 추구한 것과 관련이 있다. 요컨대 사목 서간은 이미 바오로와 상당한 시간 간격을 두고 쓰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바오로 차명 서간 집필을 통해) 바오로를 다시 붙잡음으로써, 사도적 연속성을 확보하려 시도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맨 앞에 바오로가 나온다. 바오로는 (누구나 예상하려니와) 세 편지(티모테오 1·2서, 티토서) 모두 인사말에서 사도로 불릴 뿐 아니라, 선포자와 이민족들의 교사로 불린다(1티모 2,7; 참조: 2티모 1,11). 후자는 바오로 권위의 확고함과 그가 선포한 복음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바오로 친서에서 사도는 교사 칭호를 자신에게 사용한 적이 한번도 없다. 그러나 필경 더 중요한 것은, 바오로에게 복음이 맡겨졌다는 언명이다.[22] 예전에 바오로가 박해하고 모독했던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그를 성실한 사람으로 여기시어 그 직무를 맡기셨다(1티모 1,11-13). 낱말 선택에 유의해야 한다. '맡겨진 것'의 믿을 만한 수령자와 수호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전면에 부각되는데, 이미 사도부터 그렇다. 이 사도관이 첫째 편지 앞머리에 (이단에 관한 첫 번째 언급이 곧이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데, 다른 두 편지에서는 이렇게 상세히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이 세 편지가 하나의 앙상블로 구성되었다는 데서 출발할 수 있거니와, 이 짜임새있는 앙상블은 숙고된 배분을 통해 동일한 관심사를 주장하고 또 그로써 더욱 인상 깊게 표현될 수 있었다. 다만 순서에서 티모테오 2서를 마지막에 놓아야 할 것이다. 바오로의 순교에 대한 예상이 이 앙상블을 종결한다.
바오로 사도 시대와 사목 서간이 묘사하고 있는 현재 사이에 사도 유산의 중개자인 티모테오와 티토가 자리잡고 있다. 그들이 바오로에게서 받았고 계속 전해야 하는 것을 다양하게 둘러 말할 수 있다: "내 아들 티모테오, … 그대에게 이 지시를 내립니다"(1티모 1,18); "많은 증인 앞에서 그대가 나에게서 들은 것을, 다른 이들도 가르칠 자격이 있는 성실한 사람에게 전해 주십시오"(2티모 2,2); "그대가 맡은 것(παραθήκη)을 잘 지키십시오"(1티모 6,20); "그대는 건전한 가르침에 부합하는 말을 하십시오"(티토 4,5). 지시, 사도들에게서 들은 말, 맡은 것, 건전한 가르침, 복음이 사도성과 권위를 특징짓는다. 복음 선포자의 직무를 완수한다는 것은 이 권위 있는 말씀을 선포하고 관철하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다.[23]
티토서 1,5에서 티토에게 크레타의 고을마다 원로들을 임명하는 임무가 부여되는 데서 또 다른 차원이 나타난다. 위임 의식儀式은 "많은 증인 앞에서"(2티모 2,2)라는 언급에 이미 암시되어 있다. 위임은 안수를 통해 이루어졌다. 교직 서임은 사목 서간 교회들에서 통상적으로 행해졌다.[24] 서임 과정에 관해 몇 가지 상세한 내용을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여기서는 여러 가지가 논란되고 있다. 특히 눈에 꽂히는 것은, 서임 시행을 위한 상세한 지침들을 제시하지 않고, 예전의 서임을 상기시킨다는 점이다. 티모테오는 자신의 서임을 상기해야 한다!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2티모 1,6); "원로단의 안수와 예언을 통하여 그대가 받은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1티모 4,14). 이 비교적 상세한 상기에 비해 안수에 대한 셋째 언급은 색이 바랬다" "아무에게나 선뜻 안수하지 말고…"(5,22). 덧붙여 이 구절은 서임과 관련되는지 아니면 죄인의 교회 복귀와 관련되는지가 불확실하다.[25] 그러나 아무래도 둘째 견해는 신빙성이 없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죄인의 참회 후 교회 복귀의 전례적 거행에 관한 암시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서임 후보자를 꼼꼼히 검증하라는 훈계다.
티모테오의 서임이 한 번은 바오로에 의해, 또 한 번은 원로단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설명이 필요하다. 가장 선호되는 설명은 티모테오 1서와 2서의 상이한 성격과 관련된다. 1서는 공식적 서술이고, 2서는 이를테면 티모테오에게의 고별 서간으로서 사적 서술이라는 것이다.[26]
필자의 의도에 따른 두 편지의 실제적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남아 있다. 둘 다 문학적 허구다. '역사상' 티모테오는 바오로에 의해서도 원로단에 의해서도 서임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중의 이 허구는 바오로와 원로단에 의해 티모테오가 서임되었음을 전제할 때에만 의미 있게 보인다. 실은 이로써 지금 교회들에서 시행되고 있는 서임이 사도에게까지 소급된다는 것이 알려져야 했던 것이다.[27]
서임은 대략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서임은 '많은 증인 앞에서', 즉 소집된 회중 앞에서 시행되었다. 이것이 티모테오 2서 2,22도 서임식과 관련됨을 암시한다면, 여기서 '맡은 것'(티모테오가 바오로에게 들은 것)의 일종의 양도가 이루어졌음이 분명하다. 수임자는 이것을 '많은 증인 앞에서' 신앙고백을 통해 확증했다(1티모 6,12). 그리고 믿음을 위한 훌륭한 싸움을 촉구하는 권고의 말이 주어졌다(참조: 5,11-16; 4,11-16; 1,18-19). 중심 행위는 안수였는데, 이를 통해 직무 카리스마가 부여되었다. 이 의식은 유다고 라삐 임직식의 손받치기를 본뜬 것인데, 그러나 카리스마로 말미암아 고유한 의의를 획득했다.[28]
선출도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서임과 관련하여 예언(προφητεία)이 두 차례 언급된다: "내 아들 티모테오, 전에 그대에 관하여 선포된 예언에 따라 그대에게 이 지시를 내립니다"(1티모 1,18); "원로단의 안수와 예언을 통하여 그대가 받은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4,14). 예언이 서임되어야 할 사람들을 지명했다. 예언은 안수에 선행했고, 아마도 교회 집회에서 발설되었을 것이다.[29] 그런 다음 서임식에서 예언적 지명이 반복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사목 서간에서 예언 활동의 마지막 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예언 직분은 제도화된 직무로 대체되었다.
-같은 책, 476-479쪽

또한 1세기 말경의 코린토 공동체는 사제들이 신적-사도적 임명을 받았음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 후 1세기 말경의 코린토 신자들이 사제들의 임명은 신적-사도적인 임명임을 사실상 잘 알고 있었음을 전제로 한 상태에서 클레멘스 교황이 이 공동체의 문제에 개입했던 사실도 잘 알고 있다.
-호세 안토니오 사예스(José Antonio Sayés), 《교회론》(La Iglesia de Cristo), 윤주현 옮김(서울: 가톨릭출판사, 2008)[30], 208쪽

또한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초대 교회의 위서(爲書) 현상[31]은 사도계승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위서(僞書) 현상은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관점에서 커다란 흥미를 제공한다. 사목 서간이나 베드로 후서의 경우처럼, 사도의 이름을 빌려 글을 쓴 저자는 사도가 자신의 대변인을 통하여 계속해서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이 교회의 말씀과 여기에 약동성과 가치를 부여한 창건적 전승을 구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진다. 이 둘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인 말씀의 새로운 직무들은 사도의 이름 아래 숨어들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말씀만이 오직 가치 있는 것으로 남기 때문이다. 위서의 저자들은 위증을 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분이 파견하신 첫 사도들이 늘 살아 있고 영의 지배하에 제자들을 늘 소환하고 있음을 믿는 자들인 것이다. 위서의 저자들은 끓어오르는 말씀의 대변자요, 예언자일 수밖에 없다. 사도들의 직접적인 초석과 멀어져 가는 후대의 서간에 출현한 위서의 말씀은 중요한 전환기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그들은 사도들이 사라진 뒤에도 최초의 말씀을, 이와 내용이 다른 말씀으로 대체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창건적 메시지의 연속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새로운 지도자들이 창설자들을 계승하는 경우에도 이것은 대체가 아니다. 그들은 차라리 창설자들을 재현하고 첫 말씀의 진리를 고백한다. 이러한 재현은 비록 시공의 간격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여전히 사도들과 그리스도와 살아 있는 관계 속에 있음을 확신으로 보여준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위서라고 부르는 현상은 옛 것이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말씀이 전달되도록 전략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예수 이후》 106-107쪽

3.1. 동시대 유대교의 직무 계승

다음은 참고할 수 있는 사례인 동시대 유대교의 상황이다. 독일의 개신교 성서학자 위르겐 롤로프(Jürgen Roloff)는 동시대 유대교 율법학자의 직무 위임 및 안수가 초대 교회의 직무 위임 및 안수에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신약 성서학자 롤로프(J.Roloff)는 안수를 통한 직무 위임이 그 당시 유다교에서 행했던 율법학자들의 직무 위임과 닮아 있다고 주장한다. 로마인의 침공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에 "모든 관심은 유다 신앙과 삶의 정체성을 계속 지탱하는 가르침을 스승에게서 제자에게 전하는 데에 집중되었다." 그래서 율법학자들이 행하던 안수가 의무를 지니게 되었다. 사목서간도 신앙의 정체성이 위험에 처하게 된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유다교에서든 그리스도교에서든 "공동체의 정체성을 간직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가르침의 일관성이 문제되었고, 여기에서든 저기에서든 이 일관성을 보존하기 위해 가르침을 특정한 사람에게 법적으로 고정시켰다. 랍비들의 해결 방식이 (그리스도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음을 부정할 수 없다"(J.Roloff, Der erste Brief an Timotheus, 1988, p.266).
- 손희송, 《일곱성사, 하느님 은총의 표지》, 313-314쪽

4. 직무와 연계된 성찬

신약성경에서는 이들[32]이 맡은 임무 중에 성찬례 거행에 대한 언급이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성찬례를 거행했던 것은 아니다. 어떻든 교회 직무자들이 성찬례를 주도했다고 추정되는데, 왜냐하면 이들의 직무 자체가 성찬례 거행과 구조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회 직무에는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공동체를 화해와 일치로 이끄는 임무도 속하는데, 이 화해의 임무는 십자가상 그리스도의 화해의 죽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2코린 5,11~21). 그러므로 공동체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사도적 직무에는 당연히 예수의 죽음을 기억하는 예식을 거행하는 것도 속한다. 이런 배경에서 예수가 최후만찬에서 사도들에게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1코린 11,24.25)는 위탁의 말씀을 남긴 뜻을 이해할 수 있다.
-- 손희송, 《일곱성사, 하느님 은총의 표지》, 313쪽

"부활 이후의 교회 공동체에서는 공동체와는 구별된 신분으로서의 제의적 사제(ἱερεύς)[33] 계층은 존재하지 않았다."[34] 그러나 그것이 아무나 성찬례를 거행했다는 의미는 아니며 성찬례는 교회 직무자들이 주도했다고 추정된다.

또한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가 순교한지 20여 년이 지난 다음에[35] 쓰인 클레멘스 서간에 의하면 ... 백성의 동의하에 임명된 교회 직무자는 '희생 제물'을 봉헌하는데(44,4), 이는 성찬례의 주례를 의미한다. 교회 직무를 맡지 않은 이들에 대해서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계층의 질서에 견주어서 처음으로 "평신도"(λαίκος ἄνθρωπος)라는 표현이 사용된다."[36] 즉 늦어도 마태오, 루가, 요한 복음서가 나올 시기쯤이 되면 성찬례가 '희생 제물'이라는 제의적 용어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AD 100년경의 《디다케》에서도 교계의 직무를 사제로 이해한다.[37]

종합하자면, 교계 직무와 연관된 성찬례가 부활 직후에는 제의적 용어로 표현되지 않았으나 늦어도 AD 1세기 말쯤에는 성찬을 제의적으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5. 바울로 계통 교회에서의 지도자적 직무와 카리스마

바울로 계통 교회에서 지도자적 직무가 미미하였으며, 오히려 개개인의 카리스마가 중요했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
고린도 교회 같은 그런 교회가 그러한 무질서를 겪고 있었을 때, 이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만약 고린도 교회에 지도자들이 존재하였다면 이런 경우에 그런 지도자들에게 호소하거나 책망하는 말이 바울의 서신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설명하기 어렵다. 따라서 본문은 이와 다른 것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이 어떤 사람의 음행을 처리하도록 호소할 만한 인정받은 지도자 집단이 고린도 교회에 없었다는 것이다. (중략) 성찬을 주재하는 사람도 없었고, 무질서한 예배를 바로잡을 지도자도 없었으며, 연보를 거두고 관리하는 집사도 없었다. 또한 바울은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그들의 예언 및 가르침의 기능을 넘어서서 권위를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음이 분명하다.
지도자들이 출현하였다. 바울은 서신 끝 부분에서 문안인사를 하면서 고린도 교회의 스데바나와 그의 가족, 그리고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에게 권면을 한다. 그러나 전자에 대해서 바울은 그들의 "성도 섬기기"가 스데바나와 그의 가족이 스스로 맡은(etxan heautous[38], "작정했다") 섬김의 행위라 분명하게 말한다.바울은 그들을 그런 직위에 임명한 적이 없었다.[39]
- 제임스 D. G. 던, 크리스챤다이제스트, 《바울신학》 2003, 776-777p (이하 "바울신학"으로 표기)

또한 던은 갈라디아서 6장에서 "신령한 자들"에게 죄 범한 형제를 "온유한 심령으로" 회복시키라고 권면한 것도 모든 교인에 대한 것으로, 어떤 정해진 규칙에 따라 형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지도력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들이 행할 것으로 기대하였음이 분명하다고 본다.[40] 또한 데일 마틴은 바울로 친서인 필레몬서에서 바울로의 태도를 지적한다.
이 편지는 또 교회 즉 그리스도교 운동이 4세기나 5세기는 고사하고 2세기에 다다르게 될 제도적 발달 수준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했다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권위적 지위가 뚜렷하게 규정된 '사제'가 없다. 주교도 없고 심지어 공식적인 부제도 없다. 바울로의 권위조차 비교적 '카리스마적'인 것이어서,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수사법을 구사해야 한다. '명령'이라는 것을 내린다 해도 그리스도로부터 개인적으로 받은 계시를 통해 권위를 부여받은 옥중의 사도로서 해야 하며, 교회라는 기관의 어떤 공식적 행동으로서가 아니다.
바울로는 필레몬에게 자기가 바라는 것을 하도록 명령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필레몬이 거절하면 바울로의 편을 들어줄 제도적 장치가 없었다. 그래서 바울로는 나중에 발달하게 될 제도적 직위와 장치 같은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신중하게 지도력을 발휘하면서 설득을 통해 해야 한다.[41]
데일 마틴, 문학동네, 《신약 읽기》, 397p (이하 "신약 읽기"로 표기)

여기에 반하여, 호세 안토니오 사예스 및 하인리히 프리스는 지도자적 직무의 존재를 옹호한다:
코린토 교회에 대해 언급한 사실과 관련해서 보다 세부적인 사항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흔히 말하길, 이 교회는 공동체의 모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실, 코린토 교회는 여러 어려움들을 갖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분열되어 있는 공동체였다[일부는 바오로파라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아폴로파, 또는 케파스파라고 불렸다(1코린 1,11-13)]. 또한 여기에는 공동체가 묵묵히 견디고 있던 근친상간 사례도 있었다(5장). 그리고 시민 법정에서 해결해야 할 소송 사례도 있었고(6장), 자유가 너무 쉽게 잘못 이해되기도 했다(6장). 이것이 바로 코린토 공동체의 실상이었다. 그래서 코린토가 다른 공동체들을 위한 모델일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이 사례는 바오로가 개입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던 경우인데, 이는 그가 신앙 안에서 이 공동체를 탄생시킨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제기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권위를 십분 발휘했다. 그래서 이 문제들이 자유로운 카리스마적 방법으로 해결되도록 방치하지 않았다. 바오로는 공동체가 다양한 직무들이 성장하는 몸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그들에게 그러한 공동체의 이미지를 제시했다. 즉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또 어떤 이들은 교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1코린 12,28-30), 모든 카리스마가 공동체를 위한 봉사를 지향해야 한다고 그는 가르쳤다(1코린 12,1). 바오로는 공동체 회중을 위해서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무질서를 이루시는 분이 아니라 평화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리스(Frieds)[42]는 과연 코린토 교회가 카리스마적인 공동체였는가에 대해 질문하면서, 만일 카리스마를 특별한 선물이라는 의미에서 이해한다면 그 공동체는 카리스마적이 아니었다고 대답한다. "카리스마적인 것이 어떤 구조나 명령, 규정, 권위 그리고 권리적 요소에 대한 배제로 이해되는 것이라면 코린토 교회는 그렇지 않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카리스마와 모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바오로는 티모테오와 티토(갈라 2,23; 2코린 2,13) 그리고 에파프라스(콜로 4,12 이하)와 에파프로디토(필리 2,25) 그리고 오네시모콜로 4,9)의 경우처럼 자신이 창립한 여러 공동체(1코린 16,10-11)에 파견한 자신의 협력자들에 대해 암시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1서 5장 1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애쓰며 주님 안에서 여러분을 이끌고 타이르는 이들을 존중하십시오."
-《교회론》 206-207쪽

바울로는 자신의 사도적 권위에 호소하고 있으며 "어떤 구조나 명령, 규정, 권위 그리고 권리적 요소에 대한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슷하게, 샤를르 페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오로는 고린토 및 다른 곳에서 처음부터 그리스도인 직무를 조직하였다. 이어서 바오로 위서의 전통은 그의 목소리를 계속 담아내고 교회를 조직하고 있었다.
-《예수 이후》 195쪽
예루살렘과 갈릴래아 그리고 안티오키아에서 시작된 말씀은 외관상 무질서해 보이는 가운데 폭발적으로 퍼져나갔다. 그 말씀은 전방 위로 뻗어나갔으며 여기서 파생된 일탈 현상이 효과적인 실행을, 곧 위협하게 되었다. 이미 바오로는 고린토 교회에서와 같이 자신이 창설한 공동체 내부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직무의 무정부 상태를 진압하고자 하였다.
-《예수 이후》 150쪽
사실 바오로 계통의 서간들은 앞선 세대와의 직무의 연속성을 보장하기 위한 생생한 관심을 각자의 방법과 나름의 언어로 증언하고 있다. 바오로의 후계자로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후발 주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과거에 기초하여 미래를 올바로 준비하고자 노력하였다. 직무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늘 새롭게 전개되는 중개(仲介)의 다양한 자리에서 순례의 언어로 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리하여 직무에 관한 사도 바오로의 건설적인 메시지는 망각되지 않고 각자의 상황에 적응되었다.
-《예수 이후》 100쪽

또한 Franzen 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도적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는 어떠한 교회상을 나타내고 있을까? 사도행전과 바오로의 서간들은, 원시교회에서 처음부터 영적 '직무'가 교회 질서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로 간주되고 있었음을 명백하게 알려준다. 직무도 없고 법규도 없고 확고한 신앙의 구성도 없이, 자유로운 영적 활동에 의거한 온전한 카리스마적 체제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오로의 교회 개념과 일치하지 않는다. ...... 직무는 특별한 봉사를 위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되었던 카리스마와 대립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는 직무의 소유자가 동시에 카리스마적 소유자였던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2고린 8,23; 디도: 필립 2,25; 갈라 1,19; 1고린 15,7). 반대로 카리스마의 소유자들이 교회의 지도직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결국 바오로 자신도 성령의 소유자요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다. 동시에 그는 직무의 소유자로서 새로 세운 그의 교회들이 세심하고 실제적이고 직무적이고 권위적인 엄격한 지도를 필요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냉정하고 객관적이었다. 카리스마들은 통상적인 교회 지도에 있어서 직무에 종속되어야만 하였다.
--August Franzen · Remigius Bämer · Roland Fröhlich. 《세계 교회사》.[43] 최석우 옮김. 27-28쪽
이 은사적 교회 모델을 어찌 평가해야 할까? 아니 도대체 하나의 모델에 관해 말할 수 있는가? 바오로는 상황ㅡ코린토 교회의 경우 상황이 빌미가 되었으나 또한 상황을 넘어선다ㅡ을 묘사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바라는 대로 교회를 구상한다고 말해야 옳다. 이 구상은 이상적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구상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론과 성령론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단순한 훈계적 관심을 넘어서는 모델(본보기)로서의 성격을 띤다.[44] 이 모델은 하나의 교회상을 얻도록 도와줄뿐더러, 신자 개개인이 전체 안에서 자기 위치를 보고 제 역할을 완수하도록 가르쳐 준다. 실천에 관해 말한다면, 바오로가 교회 안에서의 '기능 수행'을 전적으로 상황 자체에 맡겼다고 짐작하면 안 된다. 신자 개개인이 성도들을 위한 봉사에 기꺼이 헌신한(1코린 16,15-16) 것과 더불어, 바오로가 사도로서 편지와 대리인을 통해 직접 개입한(예컨대 14,26-33 참조) 것도 유념해야 한다. 은사적 교회 모델에서도 봉사 직분의 수행에서 위아래가 드러난다. 이 직분 수행은 거부당해서는 안 되며, 존경과 순종도 요구한다.[45]
--Joachim Gnilka. 《신약성경신학》. 이종한 옮김. 154쪽
아울러 '초기 가톨리시즘'(Frühkatholizismus, "초대교회의 특유한 가톨릭적인 형태")[46]과 관련하여, 개신교 신학자인 Ernst Käsemann은 "바울로사도를 '초기 가톨리시즘'의 창시자로 여기고자 한다. 왜냐하면 바울로사도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세계적인 선교를 할 수 있는 하나의 공동체로서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47]"[48]

6. 로마 주교와 베드로

주교직에 대하여 가톨릭과 정교 간에 다소 논쟁적인 주제는 로마 주교(혹은 로마 개별 교회)와 다른 주교(혹은 다른 개별 교회)의 관계이다. 일단 학술적으로 합의가 가능해 보이는 것은 다음 두 가지이다. '1. 베드로가 사도들 중 (구체적으로는 학자간에 논쟁적일 수 있으나) 어떤 특별한 누군가였다는 점 2. 베드로와 로마 개별 교회의 연결이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서 인지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역사학적 관점에서는, 오늘날 적어도 다음과 같은 점이 널리 성서 해석학자들에 의하여 인정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베드로는 그가 부활의 최초의 목격자였다(1고린 15,5; 루가 24,35)는 사실에 의하여 확실히 열두 제자 중에서도 특별히 뚜렷한 존재였다. 그는 최초의 부활 증인이라는 점에서 교회의 반석이라고 볼 수 있다. 계속해서 베드로는 예루살렘 공동체 내에서 영도자였다. 즉, 사도회의 때까지 적어도 사실상 최초의 공동체와 흩어진 그리스도 신자들(diaspora)을 지도했다. 이것은 베드로와 바울로 사이에 이루어진 유대인과 이교도 선교의 분담에 관한 공식 합의가 확인되어 있는 갈라디아서 2,7-8에 의하여 증명된다. 이미 복음서에서도 루가는 마르코와 마태오에 비하여, 베싸이다에서 나고 가파르나움에서 결혼한 어부 시몬을 참으로 인간다운 모습으로 이상화하려 하고, 사도행전 1-12장에서도 이상화 경향이 드러나지만, 그런 점에서도 베드로가 최초의 선교 활동에 있어서 신생 공동체의 실력자였다는 것만은 확실히 인정될 수가 있다. 그리고 베드로의 신학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그 역사적 근거 자료를 마르코 복음이나 ―파피아스(Papias)의 기록에 의하면 마르코가 베드로의 통역이라고 했으나 신빙성이 없다― 베드로의 이름으로 나온 편지들에서 찾기는 어렵고 바울로의 편지들과 사도행전을 참작할 수밖에 없지만, 그런 점에서도 그만큼 더, 베드로가 유대인 그리스도 신자들의 대표자였으며 바울로의 이교도 선교와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또 열두 제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베드로에 대해서만 예루살렘 밖에서도 선교 활동을 했다는 것이 확인되어 있다. 그가 안티오키아에 체류했다는 것은 갈라디아 2,11-12(사도 15,7 참조)에 증언되어 있고, 고린토에도 머물렀을 가능성이 있다(1고린 1,12 참조). 확인된 여정과 정확한 연대는 물론 없다. 이 모든 것은, 자료를 근거로 해서 초대 교회의 베드로의 지위에 관하여 인정해야 할 최소한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한스 큉, 《교회란 무엇인가》, 이홍근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1994), 176-177쪽
역사학적 관점에서는, 늦게 잡아도 레오 1세 때에 교회 운영의 수위권에 대한 로마의 주장이 ― 언제나 바로 동방에서 그것을 인정해야 했던 당시의 상황은 어떻든간에 ― 확립되고 명시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 머물렀고 거기서 순교했다는 것도 최근 가톨릭·비가톨릭을 막론하고 갈수록 많은 사학자들이 시인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바티칸 성당 아래의 베드로의 무덤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가톨릭의 유능한 전문가들도 매우 회의적이다. 그러나 문헌상의 증언들은 매우 인상적이다. 「클레멘스의 편지」(1,5-6)를 보면 베드로와 바울로(!)가 네로 시대에 로마에서 순교했을 개연성이 극히 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베드로 전서 5,13의 "바빌론"이란 바로 로마가 아닐까?). 이 1세기 말의 로마인의 증언은 또 2세기 초의 소아시아인인 이냐시우스가 「로마에 보낸 편지」(4,3)에서도 확인된다. 95년경부터 분명하고도 이의 없이, 그리고 처음에는 아무런 교회 정책적인 의향도 없이 고수되어 온 이 전통의 신빙성을 부인하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라 할 것이다.
-같은 책, 180쪽[49]

루터교 신학자인 Adolf von Harnack는 초기 로마교회가 실질적 수위권을 지녔다고 해석하고 있다. 다만 큉에 의하면 로마를 첫째라고 인정한 까닭은 특별한 성경적인 ‘약속’이나 법적인 ‘권위’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의 묘지가 로마에 있었기 때문이다[50].
From the close of the first century the Roman church was in a position of practical primacy over Christendom. It had gained this position as the church of the metropolis, as the church of Peter and Paul, as the community which had done most for the catholicizing and unification of the churches, and above all as the church which was not only vigilant and alert but ready[51] to aid any poor or suffering church throughout the empire with gifts.[52]
1세기 말부터 로마교회는 전체 그리스도교 지역에 대한 실질적 수위권이 있었다. 로마교회는 메트로폴리스의 교회로서, 베드로와 바오로의 교회로서, 교회들을 가톨릭화하고 통일하는데 최고로 활동하는 공동체로서, 무엇보다도 경계하고 경고할 뿐만이 아니라 제국의 어떤 가난하고 교통받는 교회든 기부로 돕는 교회라는 점에서 이 위치를 얻었다.
-Adolf von Harnack, The Mission and Expansion of Christianity in the First Three Centuries,[53] James Moffatt 옮김 (Grand Rapids, MI: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395쪽

해당 책을 언급하며 가톨릭측 교회사 학자인 Ernst Dassmann은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
이탈리아에서 그리스도교화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코르넬리우스 주교는 로마에서 노바티아누스를 단죄하기 위해 '60명의 주교와 이보다 더 많은 사제와 부제가 참석한 대규모의 교회회의'가 열렸다고 전한다. 그는, 로마에서 열린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결의 사항에 동의한 주교들의 이름과 교회도 보고하기 때문에 이탈리아에는 백 명 또는 그 이상의 주교 공동체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에우세비우스 『교회사』 6,43,1.21-22 참조).[54]
로마는 매우 일찍이 이탈리아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우위를 차지했다. 네로 황제 치하에서 처음으로 매우 혹독한 박해를 겪은 로마 공동체는, 『클레멘스의 첫째 편지』가 입증하듯이 빨리 복구되었으며,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박해들로도 약화되지 않았다. 로마 공동체는 1세기 말부터 전 그리스도인에게 '실질적인 수위권'을 지녔다.[55]로마 공동체는 베드로와 바오로가 세운 공동체로 여겨졌으며 곧바로 교회 신앙의 규범이 되었다. 2세기에 전통 신앙과 이단을 정확히 구분하기 시작했다면, 이는 특히 로마인들이 지닌 신앙의 척도에 따라 이루어졌다. 「사도신경」과 주교들의 '사도 계승'successio apostolica에 대한 고증은 로마 관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 공동체는 신앙을 실질적으로 전파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인 것 같지 않다. 로마는 곧바로 교회의 중심이 되었지만 선교의 중심은 아니었다. 로마 공동체의 매력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2세기에 (어떤 이유에서든) 로마로 여행한 전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유명 인사들의 목록, 곧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우스,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푸스, 이레네우스, 헤게시푸스, 유스티누스, 타티아누스, 아베르키우스, 마르키온, 발렌티누스, 사벨리우스, 테오도투스를 한 번이라도 상기해야 한다.
사람들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로마에 도움을 청했고, 로마는 조언뿐 아니라 능력에 따라 물질적 원조도 했다. 코린토의 주교 디오니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여러분에게는 모든 형제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돕고 모든 도시에 있는 많은 공동체에 기부금을 보내는 관습이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로마인인 여러분은 전승된 로마 관습을 철저히 지켰기 때문에 예부터 보낸 희사금으로 곤궁한 이들의 가난을 덜어 주었으며, 광산에 사는 형제들을 도와주었습니다. 여러분의 거룩한 주교 소테르는 이 관습을 철저히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자애로운 아버지가 자식에게 따뜻한 말로 위로하듯이 성도들뿐 아니라 (로마에) 오는 형제들에게도 (많은) 희사금을 나누어 주어 이 관습을 더 확대했습니다(에우세비우스 『교회사』 4,23,10).[56]

실제로 코린토와 아라비아, 카파도키아, 메소포타미아 공동체에 행해진 기부금들은 잘 알려져 있다(381쪽 참조). 이그나티우스가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 서론에서 로마는 '사랑의 연맹의 수좌'라고 쓴 표현은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 배경에서 실질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그나티우스는 이 낱말로 2세기 초에 로마가 재판 관할 수위권을 지니고 있다고 내세우는 것도 아니며, 원조를 받은 공동체들이 몇 세기 뒤에도 기억하고 있는 '사랑의 실천'caritas에서 로마가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제국의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줄곧 로마로 왔으며 로마 공동체는 이들을 친절하게 맞이했다. 아직도 많은 점에서 법적·규율적으로 확정되지않은 공동체들의 관계는 대부분 이러한 방문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로마인들은 그들이 지금까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새 공동체들의 곤경과 근심거리에 관해 들었으며, 방문자들은 유명한 로마의 사도 공동체와의 친교communio를 진심으로 느꼈다. 그 뒤 그들이, 아마도 그들 공동체를 위한 희사금을 가지고 다시 떠나면, 로마 공동체가 어떻게 살며, 어떻게 미사를 지내고 어떤 신앙을 고백했는지를 그들이 와보지 않고 이야기한 것보다 쉽게 이해되었을 것이다. 변두리의 소공동체들이 로마인들의 '사도적 권위'auctoritas apostolica에 관해 들어 알고 있는 것을 본받고자 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따라서 의도적이든 않은 로마의 사랑 실천 행위는 교회일치를 위해 구심력을 지니는 운동에서 과소평가될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
로마가 훈령을 내릴 수 있다는 권한은 아직도 인정받지 못했다. 이는 로마의 주교 빅토르가 양보해야 했던 부활절 논쟁에서 입증된다(277; 340쪽 참조). 로마의 권리를 요구하는 신학적·법적 강구는 이른바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와 로마의 스테파누스(254~257)의 이단자 논쟁에서 시작했다. 이 논쟁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바위)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라고 한 이 말씀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후대의 수위권론은 오래 전부터 로마의 실제적인 우위를 인정한 것보다는 교의적으로 이 약속을 실마리로 삼았다.
-에른스트 다스만, 《교회사 I》[57], 하성수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7), 410-412쪽

확실히, 구체적으로 뭐라 표현해야 할지는 의견이 분분하여도, 베드로가 초대 교회에서 매우 특별한 사도로 취급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복음 전승들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과의 관계를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예의 수위권" 내지 "사법권의 수위권"이라는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 관계들은 주석학에서 나온 언어도 아니다. 이 관계는 굳이 권력의 언어로 표현되지 않았지만 오히려 이보다 발전된 의미로 표명되었다. 이 관계는 실존적이고 표상적인 언어로 표현되었고 주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와 준거의 틀 안에서 이해되었다. 그리하여 이 핵심적인 준거는 베드로와 유기적인 관계를 갖지 않고는 참되게 언표될 수 없었다.
그러나 가톨릭 신학자는 이 준거적인 관계가 성서 안에서 확정된 과거의 표시만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그것은 베드로의 신앙에 대한 기억이 소멸해 가는 과정에서 베드로의 과거만을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관계는 오늘날 교회의 현실 안에서 언표되어야 한다. 가톨릭 주석가는 자신의 전문 분야를 넘어서는 이 주제에 직접 뛰어들지 않는다. 다만 그는 신약성서의 정보들이 공동체적 삶의 중심에서 이들이 갖는 중요성에 따라 말이나 글로 전해진 첫 전승들에 의해 얼마나 점진적으로 선택되고 기억되었는지를 강조한다. 여기에는 신약성서가 베드로에게 부여한 중요성도 포함된다. 베드로에 대한 준거적인 기억이 솟아나는 과거가 이 으뜸가는 인물과 늘 엮어왔던 유기적인 관계의 존속을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하느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와의 살아 있는 관계가 베드로에게 부여된 몇 가지 권한보다 훨씬 중요하다. 비록 초대 공동체들이 때로는 베드로가 남긴 흔적을 구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베드로의 면모는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었다. 베드로는 이 지고한 말씀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고 그는 신도들과 주님 간에 엮어진 관계에 늘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실제로 요한은 시몬이 게파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음을 상기시켜주고(요한 1,42) 갈리 2,9의 바오로와 함께 베드로의 이름을 아람어로 전해준 유일한 인물이었다. 한편 게파는 다른 돌들이 덧붙여질 건축물의 첫 번째 돌을 의미하지 않고 바위를 뜻한다. 물론 그는 엄격한 의미로 머릿돌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이다(1고린 10,4; 1베드 2,8). 베드로는 굳건한 바위로서 그것 없이는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마태 7,24 이하) 건축물이 무너져 내릴 수 있는 그런 존재였다. 베드로는 결코 지나쳐 버릴 수 없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덧붙여야 할 것이 있다. 성서의 제한되고 동시에 본질적인 이 영역에서 베드로에 관해 이처럼 주석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후대의 베드로 전승의 가치를 미리부터 판단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마태오 교회 같은 일부 유다계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입장을 처음부터 선입견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더욱더 아닌 것이다.
-《예수 이후》 148-149쪽
탁월한 의미로 사제적 공동체인 쿰란에서 발견되는 요소들은 성전 건축에 대한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데 도움이 된다. 에세네파 공동체는 이사 28,14-28에서 단어를 차용하여 "거룩함의 집", 즉 성전이라고 불렀다. 이 공동체는 "소중한 주춧돌"이고 "그 기초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1Q 공동체의 규약 8,5-8). 찬미가의 저자는 하느님께 "당신께서 굳건한 건축물을 세우시려 바위 위에 기초를 놓아두시니 흔들림이 없으리라"고 말한다(1Q 찬미가 6,25-27). "당신은 바위 위에 나의 건축물을 세워주셨고 벽이란 벽이 무엇으로도 흔들릴 수 없는 믿을만한 성채가 되었나이다"(7,8-9). 바로 이것이 에세네파 스승의 공동체적인 성전이었다.
한편 같은 이미지가 바오로의 고린토 전서에서 발견된다.
"나는 하느님이 베푸신 은총에 따라 슬기로운 건축사로서 기초를 놓았습니다. 다른 이는 그 위에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각자는 자기가 어떻게 그 위에 집을 지을지 살펴야 합니다. 아무도 이미 놓인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 말고 다른 기초를 놓을 수는 없습니다"(1고린 3,10-11).
이제 예수께서 중개의 새로운 기반을 이루는 자리가 되었다. 그리고 바오로와 그 밖의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은 사도적 활동을 통해 이 첫 기초 위에서 계속 건설해야 한다. 바오로의 이 언명은 전혀 다른 맥락의 유다계 그리스도인 계열의 베드로 전통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이번에는 베드로(Képha)가 그리스도꼐서 지으시는 집의 기초를 이룬다. "그대는 베드로입니다. 내가 이 바위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데 저승 문들도 내리누르지 못할 것입니다"(마태 16,18). 쿰란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은 정의의 스승에게 당신을 위하여 흔들리지 않는 집을 세워줄 것을 당부하신다(4Q 시편 강해 37,8,16).[58]
-《예수 이후》 270-271쪽


심지어 루가는 1. 베드로는 바울로처럼 2. 바울로는 베드로처럼 그려내어 의도적으로 바울로를 띄우는 경향이 보인다.
루가는 바오로의 위상을 베드로와 거의 동급에 위치시키고 교회의 첫 역사에 통일성을 부여하였다. 베드로 전서 역시 이 일치 운동에 가세하여 베드로의 면모를 나름대로 바오로적인 모습으로 만들기에 이르렀다.
-《예수 이후》 174쪽
루가는 산발적인 요소들을 통합시키려는 의도 아래 베드로와 바오로를 긴밀한 평행관계 속에 부각시켰다.[59] ...... 루가는 사도 13장에서 28장에 이르는 상당히 통일적인 담론을 통하여 바오로가 이룩한 지역 교회들의 창립사(創立史)를 전해주고자 한다. 왜냐하면 루가의 교회는 바오로 계열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베드로의 전승군을 많이 담고 있는 사도 1장에서 12장까지의 내용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병렬적으로 연결시킨 것에 불과하다. 루가는 동일한 이야기의 틀 안에서 바오로의 선교 역사를 추적하여 전해준다. 그러나 루가는 유다계 그리스도인의 옛 전승과 독립적인 형태의 짧은 이야기들의 도움을 받아 초대 공동체들의 초기 역사를 제공한다. 이로써 그는 일각[60]에서 강하게 공격했던 바오로 교회들의 정통성을 미리부터 확인시켜 주고자 한다. 루가에 의하면 바오로는 온전하게 베드로의 노선에 부합한다. 양자 간에 일치의 끈이 견고하기에 바오로는 정당화되는 것이다.
나아가 베드로의 전승군에 속하는 짧은 담화들은 원형적인 이야기들의 도움을 받아 교회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루가의 관심을 반영한다. 그는 이 이야기들을 유다계 그리스도교적 기원의 중심에 위치시키고자 하며 바오로 계열에 속한 그리스계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범이 되게 하고자 한다. ... 훨씬 후에 고르넬리오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바오로 이전에 이미 베드로가 그리스계 그리스도인들의 영역에서 선교 활동을 처음으로 전개하였음을 보도한다(사도 10-11장).
-《예수 이후》 202-203쪽

일각에서[61] 제기하는, '수위권'이 베드로에게서 예수의 형제 야고보로 넘어갔으리라는 추정은 설득력이 있다고 보기 힘들다.
베드로는 자신의 자리를 야고보에게 넘겨주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62] 실제로 예루살렘의 상황에서 바오로가 야고보를 게파와 요한에 앞서 첫 번째 거명하였고(갈라 2,9) 우리가 이미 지적하였듯이 야고보는 예루살렘 사도 회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사도 15,12-19; 21,18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수위권이 야고보에게 넘어갔으리라는 논증은 시대착오적인 사고를 어느 정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 또 그 시대는 말씀의 직무가 장소나 도시보다는 베드로와 바오로의 경우처럼(갈라 2,7) 사회-종교적인 영역에 결부되어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랑 형식의 직무가 나중에 우리가 말하는 소위 지역 관할권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리하여 말씀의 전달이 어디서나 가장 중요하였다. 베드로와 바오로는 그들의 이름을 빌려 쓴 위서에 이르기까지 지역 교회의 지도자들보다 우위에 있었다(1베드 1,1 참조). 나중에야 비로소 디다케 시대에 이 유랑 예언자들의 활동이 지역 교회의 지도자들에 밀려 사라지게 되었다(디다케 11,3 이하; 15,1).
-《예수 이후》 182-183쪽

7. 개별 교회: 집단 지도체제에서 단독 지도체제로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가 순교한지 20여 년이 지난 다음에 쓰인 클레멘스 서간에 의하면 직무의 후계를 위한 분명한 규정이 있었다. 그러나 클레멘스 서간은 아직 장로(신부)와 감독(주교)을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고, 군주제적 주교직[63]을 알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44,3~5) 백성의 동의하에 임명된 교회 직무자는 '희생 제물'을 봉헌하는데(44,4), 이는 성찬례의 주례를 의미한다. 교회 직무를 맡지 않은 이들에 대해서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계층의 질서에 견주어서 처음으로 "평신도"(λαίκος ἄνθρωπος)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손희송, 《일곱성사, 하느님 은총의 표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1, 320쪽

초기에는 개별 교회가 집단 지도체제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AD 2세기 초에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사제단의 우두머리인 주교를 중심으로 모이라고 권유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권유를 통해, 2세기 초에 공동체적인 이유를 위해서 단독 지도자에게 모일 필요성이 높아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117년경에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Ignatius antiochenus, ✟135년경)가 저술한 『일곱 편지』에 나타난 중심 주제는 그리스도의 육화에 대한 강조와 교회 공동체의 분열의 위험에 직면해서 일치를 유지하라는 권고이다. 이냐시오는 공동체를 지도하고 사제단의 우두머리인 주교를 중심으로 모이라고 권유하는데, 여기서 군주제적 주교직이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손희송, 《일곱성사, 하느님 은총의 표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1, 321쪽

다만 이냐시오가 권유를 하는 모델이, 모든 교회에서 이미 적용되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헤르마스의 《목자》에서는 로마가 집단 지도체제 였음을 보여준다.
130~140년 사이에 로마에서 헤르마스(Hermas)가 로마에서 저술한 이 문헌은 한편으로는 사도, 감독, 교사, 봉사자들에 대해 언급하고(「셋째 환시」 5,1), 다른 한편으로는 장로들을 교회의 지도자라고 말한다(「둘째 환시」). 이렇게 볼 때 로마에서는 2세기에도 군주제적 주교직이 형성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예언자와 증거자가 큰 역할을 하는데, 이들이 장로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손희송, 《일곱성사, 하느님 은총의 표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1, 323쪽

아무튼 episkopos(ἐπίσκοπος)라는 단어가 오늘날의 용법(사도의 계승자로서 개별 교구의 단독 최고 지도자)으로 굳어지는 과정을 구체적으로는 추적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episkopos가 개별 교회의 단독 지도자여야 한다는 이해가 이냐시오의 서간에서 확인된다는 것이며, 이것이 교회의 표준 용법으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presbuteros(라틴어 presbyter)는 유태인 공동체의 집단 지도자를 뜻하는 단어였으며,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태인들이 그들의 새로운 산앙공동체의 집단 지도자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였다. 이는 초대 교회에서 ‘사도의 후계자’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다가 2세기말부터 ‘사도의 후계자의 보조자’를 뜻하였는데 오늘날에는 사제(司祭)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중략)
처음에는 집단 지도체제였던 교회가 2세기부터 단일 지도체제로 되었는데 이때부터 사도의 후계자로서 지역단위 교회를 이끌어 나가는 이를 에피스코푸스(eposcopus)라고 부르는 것이 정식 호칭이 되었고, 마침내 교회법전의 공식용어로 쓰이게 되었다.
-《가톨릭대사전》, 〈주교〉 문서 #


2세기의 episkopos, 곧 '주교'가 오늘날과 같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아니지만 점점 교회의 핵심적인 지도자로 이해되었다. 특히 박해와 맞물려 주교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보존, 계승하고, 교회를 변증하는 일을 하면서 중요성이 더해졌다. 2세기에 등장한 주교들을 흔히 ‘속사도 교부(Post Apostolic Fathers)’, 혹은 ‘사도적 교부’라고 부른다. 이 시기 박해와 더불어 이단이 등장한 것도 주교들의 권한을 강화한 계기가 되었다. 마르키온(Marcion)과 몬타누스(Montanus), 영지주의(Gnoticism)의 도전으로 그리스도교의 경전과 교리를 체계화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 역할이 자연스레 주교에게 맡겨진 것이다. 이로써 주교는 단순히 감독(監督)을 넘어 명실상부한 교회의 우두머리[主敎]가 된 것이다.

3세기 경에 쓰여진 『사도 전승』은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64]
2. 감독자들에 대하여[65]
감독자는 온 백성에 의해 선출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이의 동의를 얻어 그의 이름이 발표되면, 주일에 회중은 장로단과 (그곳에) 참석한 감독자들과 함께 모일 것이다. 모든 (감독자들은) 한 마음에 되어 그분 위에 안수(按手)할 것이며, 장로단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참석만 할 것이다.
모든 이는 성령께서 내려 오시기를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침묵을 지킬 것이다. 임석한 감독자들 중에 한 분이 모든 이의 요청을 받아들여 감독자로 서품될 분에게 안수하고 이렇게 기도할 것이다.(라틴어 역본)
감독자는 규정된 대로 온 백성에 의해 선출되어 세워질 것이다. 그는 책잡힐 대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모든 이의 동의를 얻어 그의 이름이 발표되면, 주일에 온 백성과 장로들과 봉사자들이 모일 것이다. 모든 감독자들이 한 마음이 되어 그분 위에 안수할 것이다. 장로들은 (그냥) 서 있고,
모든 이는 침묵하고 성령께서 그분 위에 내려오시기를 마음 속으로 기도할 것이다. 임석한 감독자들 중에 한 분이 모든 이의 요청을 받아들여 감독자가 될 사람 위에 안수하고 (이렇게) 기도할 것이다. (사히디꼬 방언 역본)

이후 고대 교회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절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고 국교화 되면서 안전을 보장 받게 된다. 오랜 분열을 수습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교회의 통일 또한 간절히 바라며 아리오스(Arios)에 의해 빚어진 삼위일체 논쟁을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일단락했다. 그리고 황제공의회 기간 동안 국가 행정구역교회의 행정구역을 일치하도록 조정하여 비로소 오늘날과 비슷한 교구(diocese) 제도가 완비되었다. 니케아 공의회 당시의 체제에서는 이미 옛부터 베드로의 순교 전승과 얽혀 있던 로마 교구,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큰 연관이 있는 안티오키아 교구, 그리고 마르코 전승을 통해 베드로와 간접적으로 엮인 알렉산드리아 교구의 3두 체제가 중심이 되었다. 이후 칼케돈 공의회 시기 쯤에 동로마 제국의 정치적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와 예루살렘 교구가 추가된 5두 체제(다섯 총대주교 체제)가 완비되었다.

8. 기타: 여성과 직무

적어도 신약성서는 여성 장로직을 정당화하거나 거부하는 오늘날의 언어로 여성들의 직무 문제를 취급하지 않는다. 오직 성서 본문에 의거하여 여성 사제직을 주장하고 이를 방해해 왔던 과거의 사회 문화적인 필연성들이 무효라고 선언하는 일은 신약성서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반대 논증도 마찬가지이다 전승이나 신학적인 논증에 근거하여 여성 사제직을 순전히 부정하는 입장도 성서 본문을 넘어서서 선언하는 행위이다.[66] 성서 자체는 신학적이고 사목적인 이유에서 선택된 여성 사제직의 부정이나 인정을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이 주제에 대하여 너무 쉽게 성서적 인증의 라벨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려는 시도를 가로막는다.
-《예수 이후》 334쪽


[1]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에피스코포스'는 '감독자', '관찰자'라는 뜻을 가진다. 이 말이 행정용어로 쓰인 예로, 우선 기원전 4-5세기 경 도시국가 아테네로부터 아테네 동맹의 도시들에 파견된 감독관이 있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에 의해 선출되었고, 동맹도시들이 아테네와의 동맹규약을 잘 지키는지 감시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에게는 상당한 법적 권리가 주어졌다고 한다. 로마 시대에 들어 에피스코포스는 특히 정부의 공공건물이 운영되는 것을 감시하는 직책이었다고 한다. 아테네의 에피스코포스와 마찬가지로 감독관의 임무를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2] '스테파노는 부제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면 아래의 사도계승 설명을 참고할 것.[3]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4] episkopos(라틴어: episcopus)[5] presbyteros(라틴어: presbyter)[6] diakonos(라틴어: diaconus)[7]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둘째 편지와 디도에게 보낸 편지. 추정 집필 연대는 AD 100년경으로, 클레멘스서나 디다케등 일부 속사도 문헌은 연대상 사목 서간보다 먼저 집필되었을 수 있다.[8] 한 예로, 정주 지도자에 대한 대우가 오늘날과는 다르다. 오늘날의 교계제도의 정점인 주교들은 기본적으로 개별 도시에 정주하는 지도자들이지만, 초세기 교회의 고위 지도자인 베드로는 유랑 선교사였고 바울로 역시도 그러하였다. 디다케에도 유랑 선교사가 가장 큰 권위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참조: 손희송, 《일곱성사, 하느님 은총의 표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1, 318쪽)[9] 유다 계열인가, 이방 계열인가.[10] 원문에서의 오탈자[11] 이하: 《예수 이후》[12] 희랍어 원문(UBS GNT5): παρέδωκα γὰρ ὑμῖν ἐν πρώτοις, ὃ καὶ παρέλαβον, ὅτι Χριστὸς ἀπέθανεν ὑπὲρ τῶν ἁμαρτιῶν ἡμῶν κατὰ τὰς γραφὰς καὶ ὅτι ἐτάφη καὶ ὅτι ἐγήγερται τῇ ἡμέρᾳ τῇ τρίτῃ κατὰ τὰς γραφὰς καὶ ὅτι ὤφθη Κηφᾷ εἶτα τοῖς δώδεκα ἔπειτα ὤφθη ἐπάνω πεντακοσίοις ἀδελφοῖς ἐφάπαξ, ἐξ ὧν οἱ πλείονες μένουσιν ἕως ἄρτι, τινὲς δὲ ἐκοιμήθησαν ἔπειτα ὤφθη Ἰακώβῳ εἶτα τοῖς ἀποστόλοις πᾶσιν ἔσχατον δὲ πάντων ὡσπερεὶ τῷ ἐκτρώματι ὤφθη κἀμοί.[13] 공동 번역이 의역되어서 '열두 제자'와 '사도'를 대조하기 위해 이 번역을 사용함[14] (책 속 주석) 사도행전 14,4 참조. SCHNEIDER(Apg I 228)는 14,14에서 사도 칭호가 없는 서방 텍스트의 '더 어려운 이문(異文)'을 우대한다.[15] 바울로 당시에 "권위는 지역 교회에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님이 파견하신 순회 사도의 권위와 행위의 실천에 관한 예수의 말씀을 전해주는 그리스도인 예언자의 권위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예수 이후 83쪽) 지상 예수와 직접 만나보고 대화한 사람이 넘쳐나던 시절에는 이러한 느슨한 구조로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보존하고 이단자를 상대적으로 잘 걸러낼 수 있었다. 그러나 시대적 격차가 커질 수록 엄밀한 제도 없이 이단자를 걸러내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이러한 상황이 직무의 엄밀화에 대한 수요를 키웠을 것이다.[16] 이러한 면모를 보여주는 예 중 하나가 복음서인데, 유다계 개별 교회에서 유래하였을 마태오 복음서가 이방계에서 유래하였을 마르코 복음서를 출전으로 사용한다. 또한 루가 복음서는 희랍계(혹은 헬레니즘에 익숙한 셈족계) 저자가 셈족계에서 유래했을 예수 어록 전승을 출전으로 사용한다. 요한 복음서는 가장 이질적인 계통의 개별 교회에서 유래하였으나, 이 복음서 역시도 전체 교회에 수용되었다.[17] 마태오 복음서 18장 18절 및 요한복음 20장 23-24절은 그 자체로는 직무자의 독점적 권한보다는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태오복음 18장 전체는 교회 공동체를 대상으로 얘기하고, 특별한 위탁을 받은 사람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 ... 오늘날 성서 주석학의 관점에 따르면, 요한복음 20장 23-24절의 "용서하다"와 "그대로 두다"란 말은 특별한 권한을 가진 직무자를 고려한 해석은 아니다."(손희송, 《일곱성사, 하느님 은총의 표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1, 224-225쪽)[18] (책 속 주석) 참조: C. Perrot, "Charisme et institution chez saint Paul", Recherches de Science Religieuse 71(1983), pp. 81-92.[19] (발췌자 주석) 희랍어 원문: χειροτονήσατε[20] (책 속 주석) '선출하다'라는 동사는 글자 그대로 '안수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21] "그리스어 본문에서 안수의 주체는 분명하지 않다. 열둘이 안수하였거나 차라리 열둘과 공동체가 함께 안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열둘을 제외하고 공동체만이 안수하였을 가능성은 없다."[22] (책 속 주석)티토서 1,3에 따르면, 바오로에게 복음 선포의 임무가 맡겨졌다.[23] (책 속 주석) '복음 선포자'라는 낱말은 사도행전 21,8과 에페소서 4,11에도 나오는데, 복음에의 공동 정향에도 불구하고, 각기 고유한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24] (책 속 주석)참조: VON LIPS, Glaube; E. FERGUSON, Jewish and Chrstian Ordination: HthR 56 (1963) 12-19; W.B; HUNT, Ordination in the NT: SWJT 11 (1969) 9-27; E. BERBUIR, Die Herausblidung der kirchlichen Ämter von Gehilfen und Nachfolgern der Apostel: WiWei 36 (1973) 110-128; H. KRAFT, Die Anfänge des geistlichen Amtes: ThLZ 100 (1975) 81-98.[25] (책 속 주석) 참조: N. ADLER, Die Handauflegung im NT bereits ein Bußritus?: Ntl. Aufsätze (FS J. Schmid) (Regensburg 1963) 1-6; P. GALTIER, La réconciliation des pécheurs dans 1 Tim: RSR 39 (1951/1952) 317-320; J.W. FULLER, Of Elders and Triads in 1 Tim 5,19-23: NTS 29 (1983) 258-263.[26] (책 속 주석) 참조: DIBELIUS - CONZELMANN, Past 56-57; ROLOFF, 1 Tim 258-259; H. BOOTH, Stir it up: ExpT 91 )1980) 369-370.[27] (책 속 주석) 사목 서간과 사도행전의 관계가 어떻든 간에, 두 문서가 보여 주는 바오로상들은 서로 닮았다. 교회들 안에 퍼져 있던 바오로상에 두 문서가 의존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사도행전 14,20-23에 따르면,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데르베, 리스트라, 이코니온 그리고 안티오키아에서 안수를 통해 원로들을 임명했다. 그리고 사도행전 16,1-3에 따르면, 바오로는 리스트라에서 티모테오를 협력자로 얻었다. 이 정보들로부터 바오로와 원로들(리스트라의)에 의한 티모테오의 서임이 어렵지 않게 추정되었을 것이다.[28] (책 속 주석) 안수: E. LOHSE, Die Handauflegung im Spätjudentum und im NT (Göttingen 1951); P.A. ELDERENBOSCH, De Oplegging der Handen ('s-Gravenhage 1953); J. BEHM, ''Die Handauflegung im Urchristentum) (Darmstadt 21968).[29] (책 속 주석) DIBELIUS - CONZELMANN(Past 26)도 같은 견해인데, 이들은 사도행전 13,1-3을 지적한다. 이렇게 보아야만 티모테오 1서 1,8의 분사 τάς προαγούσας(전에 선포된)를 올바로 이해하게 된다. BAUER - ALAND, Wörterbuch 1406 참조. 반면 ROLOFF(1 Tim 102)는 예언을 권고와 훈계의 말과 동일시한다.[30] 이하: 《교회론》[31] 예: 바울로 차명(借名) 서간.[32] 발췌자 주석: 감독(episkopos)과 원로(presbyteros)[33] 발췌자 주석: ἱερεύς(사제, iereus, 라틴어:sacerdos)는 πρεσβύτερος(원로, presbyteros, 라틴어:presbyter)와는 다른 어휘이지만 가톨릭과 정교회와 성공회는 교회의 원로가 신약 시대의 직무 사제라고 이해하기에, 서로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한국어에선 모두 '사제'로 번역한다. 다만 가톨릭 성경과 교회법은 두 단어를 다르게 번역하는데, iereus는 사제로 번역하되 presbyteros는 성경에선 '원로'로 교회법에선 '탁덕'으로 번역한다.[34] 손희송, 같은 책 305쪽[35] 발췌자 주석: 1세기 말. 동시기 신약 문헌으로 마태오, 루가, 요한 복음서 등이 있다.[36] 손희송, 《일곱성사, 하느님 은총의 표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1, 320쪽[37] 디다케 13장 3절에서는 교회의 예언자를 "여러분의 대사제들(αρχιερείς)"이라고 말한다.[38] εταχαν εαυτους[39] 원문 각주 102) 1 Clement 42:2와 비교해 보라: 그들은 "그들의 첫열매들(16:15에서 Stephanas에 대하여 사용된 동일한 용어)을...장래의 신자들의 감독들과 집사들로 임명했다"[40] 바울신학, 778p[41]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도주한 노예가 주인의 친구에게 자신을 선처해 줄것을 부탁해 달라고 호소하는 사례가 있었는데, 바울 역시 이러한 관행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신약 읽기", 392~397p[42] (책 속 주석) H. Fries, L'église, questions actuelles, Paris 1966, p.540.[43] 원제: 《Kleine Kirchengeschichte》(2000년판)[44] (책 속 주석)U.BROCKHAUS.'Charisma und Amt''(Wuppertal 1972).226-227에 따르면, 은사들에 관한 표상은 윤리 안으로도 교회 제도 안으로도 흡수되지 않고, 오히려 성령론 안에 정착한다. 사실 '제도'라는 말은 지나치다 하겠다.[45] (책 속 주석)참조: E.SCHWEIZER, Gemeinde und Gemeindeordnung im NT(AThANT 35)(Zürich 1959).90-91.[46] 『백과사전이나 신학전문서적을 펼쳐봐도 '초기 가톨리시즘'이란 하나의 독립된 어휘로서의 표제어를 찾아볼 수가 없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초기 가톨리시즘'이란 낱말이 학문적으로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금세기 불후의 명작인 개신교계통의 신학대사전 Die Religion in Geschichte und Gegenwart와 가톨릭계통의 신학대사전 Lexikon für Theologie und Kirche에서도 다른 주제나 표제어를 설명하는 가운데 다만 부분적으로 언급하거나 암시할 뿐이다. 뿐만 아니라 '초기 가톨리시즘'에 대한 개념이나 의미설명도 약간씩 차이가 있다. 하지만 F. Mussner의 설명이 가장 포괄적이고 무리가 없다고 여겨진다. 그는 '가톨리시즘'을 설명하면서 '초기 가톨리시즘'을 곁들여 해설하는데, '초기 가톨리시즘'을 한마디로 "초대교회의 특유한 '가톨릭적인' 형태"라고 요약한다.』, 이영헌, "新約聖書와 初基 가톨리시즘", 〈신학전망〉 90(1990)[47] (논문 내 주석) E. Käsemann, Paulus und Frühkatholizismus, in : ebd. S. 240-245[48] 이영헌, "新約聖書와 初基 가톨리시즘", 〈신학전망〉 90(1990)[49] 굵은 글씨는 원문 그대로 옮겼다.[50] 한스 큉, 가톨릭의 역사, 93[51] (책 속 주석)Evidence is forthcoming from the second and the third centuries, for Corinth, Arabia, Cappadocia, and Mesopotamia (cp. above, pp. 157, 185, 376; and below, Book IV.). In a still larger number of cases Rome intervened with her advice and opinion.[52] (책 속 주석)A considerable amount of the relevant material is collected in my History of Dogma, I. pp. 455 f. (Eng. trans., vol. ii. pp.149-168), under the title of “Catholic and Roman.”[53] 원제: Die Mission und Ausbreitung des Christentums in den ersten drei Jahrhunderten[54] (책 속 주석)A. VON HARNACK, Die Mission und Ausbreitung des Christentums in den ersten drei Jahrhunderten (Leipzig 41924) 807.[55] (책 속 주석) VON HARNACK, Mission 487.[56] (책 속 주석)번역: KRAFT 223.[57] 원제: Kirchengeschichte I: Ausbreitung, Leben und Lehre der Kirche in den ersten drei Jahrhunderten[58] (책 속 주석) 참조: Christian Grappe, D'un Temple à l'autre. Pierre et l'Église primitive de Jérusalem, PUF, Paris, 1992. 저자는 예루살렘 교회의 출현 과정과 이 공동체의 중심에서 베드로가 행한 역할에 대해 언급한다. 초대교회는 다양성을 받아들이면서 인자의 파루시아를 대망하는 가운데 에세네파의 삶에 크게 영향을 받은 형제애를 보여주었다. 이어서 초대교회는 쿰란에 정좌한 공동체가 그러했듯이 새로운 성전의 온전한 실현으로 자신을 곧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신도들은 제자들의 으뜸 자리에 있는 베드로에게 대사제의 권한들을 부어했으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제적 유형의 계승은 예수의 형제 야고보로 대표되는 왕조의 계열과 차별화되었다. 그라프의 주장은 정밀하게 논증된 것으로서 이상에서 언급된 쿰란적 요소들에 근거하여 있고 이제는 마태 16,17-18에 의거하여 베드로에게 적용시키고 있다.[59] (책 속 주석)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일치 모티브와 병행 관계를 드러내는 문학적인 방법에 대하여 참조: C. Perrot, Introduction à la Bible, éd nouvelle, II, Desclée, Paris, 1976, p.248s, 263s[60] (책 속 주석) 특히 에비오니스트들이 바오로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초대 교부들 중에서도 바오로의 사상과 거리가 먼 이들도 있었음을 지적할 수 있겠다.[61] 특히 개신교 쪽에서[62] (책 속 주석) 예컨대 Oscar Cullmann, Saint Pierre, disciple, apôtre, martyr, Neuchâtel, 1952.[63] (발췌자 주석) Monarchy, 곧 단독(monos)으로 개별 교회의 최고 권위(archē)를 지닌 주교직[64] 이하 사도전승의 번역과 페이지 표시는 히뽈리뚜스, 『사도 전승』, 분도출판사, 2017(이하 『사도 전승』)에 따름[65] 『사도 전승』 , 75p[66] (책 속 주석) 신학자는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성서에서 인증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성서가 확인해주는 내용과 오늘날 제기되는 질문 간에 유사성 내지 적합성이 과연 존재하는지는 검증해야 한다. 성서가 모든 질문에 답을 주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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