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실 참모부 참사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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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1년 5월 11일 |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추동리 | |
사망 | 1974년 4월 22일 (향년 82세) |
경기도 포천시 | |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추동리 |
본관 | 한양 조씨[2] |
가족 | 아들 조병의 |
학력 | 유신학교 (졸업) |
서훈 | 대통령표창 수훈 (1968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99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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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다.2. 생애
1920년에 상해(上海)에 있는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의원으로 피선되었으며 비서장을 겸임하였다.또한 1921년에는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하였다. 1924년 5월 15일에는 임정 국무원 서무국 참사(參事)에 임명되었으며, 한국유일당 촉성회 집행위원으로 활약하다가 1926년 촉성회 대표로 만주에 파견되었다. 1927년 7월 신민부(新民府)가 재정비되어 조직되자 그는 군사부위원에 임명되어 무장항일투쟁을 지도하였다.
1930년에는 재만독립운동자(在滿獨立運動者)들을 규합하여 신한농민당(新韓農民黨)을 조직하고 조직부장으로 활약하였다.
신한농민당은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의 지도당으로 조직되었는데 공산주의자들의 방해 공작으로 말미암아 북만주(北滿洲)의 독립운동 노선이 혼란케 되는 것을 방지하고 정상적인 항일 독립투쟁 활동을 전개시키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여 창당되었다. 위원장에는 김광희(金光熙)가 선출되었으며, 이 달(李達) 김 일(金一) 이용한(李用翰) 김온순(金溫順) 등이 중심이 되어 활약하였다.
1932년에는 이청천(李靑天)이 조직한 한국독립군총사령부(韓國獨立軍總司令部)의 참모로 독립군을 양성하는 등 활약하다가 1933년 9월 봉천(奉天) 일본영사관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신의주(新義州)형무소에서 3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