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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4-20 14:47:38

조선빠

1. 개요2. 이들의 행태
2.1. 조선까=식민사관으로 낙인 찍기2.2. 조선 후기 지배 세력에 대한 비호2.3. 조선 왕조에서 발생한 일부 업적을 과장2.4. 성리학에 대한 비호

1. 개요

국뽕의 한 갈래로, 유독 조선 왕조에 대한 집착이 과해 분별없는 쉴드를 일삼는 무리들을 일컫는다. 최근 헬조선 열풍과 더불어 자국을 향한 애정 어린 자성의 흐름과 함께 이전 체제이자[1] 현 시점에서도 한국인들의 정신적 뿌리라 할 수 있는 조선-대한제국 이씨 왕조에 대한 비판이 대두되어 가는 가운데 조야한 민족주의 담론에 갇혀 이를 무력화 시키려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조선까=식민사관 이라는 단순 공식을 기본적으로 탑재한 가운데 한 가운데서 논리 전개가 펼쳐지기 때문에 이들의 스펙트럼은 보수부터 진보까지 넓다. 사실 우리 정치 지형 특성상 유달리 진보가 민족주의적이라는 점에서 조선빠 중엔 상당수가 에스노센트리즘이 결합된 변태적 진보가 많은 편이며 이는 세계적으로도 특수한 상황이라 볼 수 있다.

2. 이들의 행태

2.1. 조선까=식민사관으로 낙인 찍기

역사를 단순무식한 이분법적 관점에서 바라보는데서 발생한 일종의 오류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조선을 깐다면 식민지화라는 불행한 결말을 맞았기 때문에 자연스레 먹힐만해서 먹힌 나라라는 결론으로 귀결되며 이는 식민사관의 연장선상이라는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초딩 논리다. 쉽게 말해서 뒷골목에서 또래 상대로 삥 뜯고 다닌 애가 나이 많은 중학생 형한테 맞았다는 이유로 불쌍하니까 좀 밉더라도 착한놈으로 추켜세워줘야 한다는 수준의 궤변이다. 실제로 조선은 후기에 이르러서는 피지배계층일 일반 민중의 광범위한 불신을 받고 있는 정권이었으며 이는 임술농민봉기와 홍경래의 서북 민중 봉기를 거쳐 조선 왕조를 뒤엎으려는 동학농민운동[2]에 의해 정점을 짝는다. 한 마디로 조선은 민중 사관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비판할 수 있으며 그 여지가 충분히 많은 왕조인 것이다.

사실 해방 정국 국가 지도자 후보로 떠오른 지도자들의 면면만 봐도 조선까=일뽕의 논리가 참으로 한심스럽다는 것이 증명이 된다. 우선 김구는 역적의 후손으로서 상놈 취급 당하다시피 하면서 유년기를 보내다 과거 시험장에서 매관매직이 성행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조선왕조에 대한 적대감을 품었고, 여운형은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유년시절부터 고압적인 계급의식에 대해 비판[3]의식이 있었고 이승만 김규식 등의 여타 지도자들 또한 조선왕조를 탐탁치 않아 했다. 즉 조선왕조와 일제를 동시에 경험한 지도자들부터가 이미 조선에 대해 비판의식 혹은 개혁의지를 가진 존재들이었다.

2.2. 조선 후기 지배 세력에 대한 비호

국가 멸망의 책임을 을사오적을 비롯한 일부 기회주의 매국 세력에게 돌리며 정작 당시의 일등 기득권이었던 고종을 비롯한 왕족과 민씨 척족에게는 면죄부를 주다시피 하는 뻔뻔한 작태를 보인다. 특히 고종 재평가에 관해서는 이미 고종이 각종 이권 침탈 조약 사인의 당사자로서 국가를 말아먹은 것이며 민씨 척족들의 각종 부패 행각에 대해서는 눈감아주면서 고종이 추진했던 광무개혁[4]엔 높은 점수를 준다던지, 민비가 제 자리 보전하려 외국군대를 자국 영토에 끌어들인 병크는 싸그리 무시하고 막판의 친러외교 하나로 일제에 항거한 순교자로 쳐준다던지, 전반적으로 필요 이상의 쉴드를 친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또한 조선 후기 지배 세력에 대한 옹호만큼이나 이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개혁의지를 갖고 있었던 세력, 즉 엘리트 개화세력과 동학 농민운동을 주도한 민중 세력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다. 일부 불량 유림들의 모함으로 고종이 보부상 깡패들을 동원해 강제 해산시킨 독립협회를 뽀개졌어야 마땅한 준친일 단체로 본다거나 동학농민운동의 동학 민초들을 단순 반역 폭도들로 폄하하는 것이 좋은 예시라 할 수 있다.

2.3. 조선 왕조에서 발생한 일부 업적을 과장

대표적인 예로 "훈민정음도 조선 시대 때 만들어졌는데 조선을 왜 까냐" 식의 논리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국가 사회적 큰 틀인 조선에서 벌어진 일부 업적을 곧 조선 왕조 자체가 벌인 업적으로 동치시키는데서 발생한 오류다. 실제로 그 훈민정음 창제라는 파격적 혁신이 개혁적 군주인 세종의 주도로 이루어졌을 때 당시 조선의 국가이념이었던 성리학을 따르던 주류 양반유림계층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사실상 그들의 주도로 몇세기가 가까이 천한 언문으로서 사장되다시피 되었다는 점에서 훈민정음 창제라는 사건은 조선을 찬양해 마지 않아야할 명분이라기보다는 눈부신 혁신을 받아들이지 못한 부끄러운 조선의 민낯의 사례로서 적당하다. 한마디로 스티브잡스가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폰팔이나 되었을 것이라는 우스개소리가 현실로 일어났는데 몇백년이 지난 후 그 폰팔이가 재평가 받자 그런 스티븐 잡스를 낳은 대한민국이 위대하다고 하는 꼴이다.

2.4. 성리학에 대한 비호

추가바람.

[1] 일제 강점기는 영토 내 국가가 없던 상태였으므로 제외한다.[2] 체제 내 개혁을 요구한 전봉준 외 김개남 세력에 한정[3] 여운형이 소년 시절 나무에 뺨이 긁혔다는 이유로 감히 상놈이 키우는 나무 주제에 양반 자제에게 상처를 냈다며 도끼로 그 나무를 베어버린 에피소드 이후 그는 동리의 노비가 죽었을 때도 상례를 갖추던 인격자로 성장한다. 아버지의 사상과 정 반대인 휴머니즘의 길을 걷게 된 셈[4]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전근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고종이 주도한 독재적 성격이 강한 개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