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 정치계(鄭致桂) |
자 | 기문(岐文, 屺文) |
호 | 농해(聾海) |
본관 | 연일 정씨[1] |
출생 | 1849년 11월 6일 |
경상도 영천군 자양면 검단리 (現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 | |
사망 | 1921년 4월 7일 (향년 71세) |
묘소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신광면 반곡리 |
상훈 | 대통령표창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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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20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독립유공자 정환직(鄭煥直)은 친형, 정용기(鄭鏞基)는 장조카이다.
2. 생애
1849년 11월 6일 경상도 영천군 자양면 검단리(現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에서 아버지 병산(屛山) 정유완(鄭裕玩, 1817. 10. 11 ~ 1882. 1. 1)[2]과 어머니 순천 이씨(順天 李氏, 1815. 12. 15 ~ 1884. 6. 24)의 [3] 사이에서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경상북도 영일군 신광면 반곡리 3851906년 3월 고종황제의 밀지를 받은 시종관 정환직(鄭煥直)이 장남 정용기(鄭鏞基)에게 의병을 일으키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정용기가 고향 영천군으로 내려가 이한구 등을 규합하여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조직하자, 가산을 정리해 쌀 100석과 돈 500냥을 각각 군량미와 군자금으로 헌납하는 한편, 정환직의 가족들을 인솔해 흥해군 신광면 반곡리(現 포항시 북구 신광면 반곡리 385번지)[4]로 피신시켰다.
이후 산남의진에 입대했으며, 붓과 먹을 파는 장사꾼인 필묵상(筆墨商)으로 변장해 충청북도 황간군이 고향이라고 하는 등 본적지와 행적을 숨기며 군수물자를 조달해 보급했다. 또한 일본 제국 육군과 관련된 여러 지역을 정탐하며 의병 활동에 도움이 되는 기밀 정보를 수집하는 등의 임무를 맡아 보았다. 이후 산남의진이 와해된 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으나, 당시 일본 경찰측 통역관이었던 정홍석의 아버지가 정환직이 의병활동을 하던 당시에 수행했던 오장(伍長)의 아들이었던 덕택에 정홍석의 적극적인 변호와 주선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이후 여생을 보내다 1921년 4월 7일 별세했다.
2020년 삼일절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