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덕빈 김씨德嬪 金氏(세자빈 시절) → 덕비 김씨德妃 金氏(왕비 시절) → 순덕왕대비順德王大妃(왕대비 시절 존호)定安王后/安定王后
정안왕후/안정왕후
연못에 핀 목화 - 송경별곡의 등장인물.
작중에서는 시호인 정안왕후가 아니라 왕비 시절 호칭인 덕비 김씨로 나온다.
2. 작중행적
이방과의 첫 번째 아내이자 정처로 경주 김씨이다.어린 시절에 이방과와 혼인했으며 나이는 김씨가 두 살 연상이다. 작중에서는 가끔씩 언급만 되다가 후반부에 잠깐 등장한다. 불임이라서 왕후임에도 불구하고 이방과의 후궁들과 달리 자식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입지가 좋지 않다. 전근대 시절에 정처가 아이를 가지지 못하고 첩들이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지위뿐만 아내라 생사조차 걸린 문제이기도 했는데, 작중 이미 혜령을 사랑하는 이방과는 덕비와 합방을 해도 동침하지 않는다.
불안한 상황에 서럽기까지 한 만큼 남편에게 사랑받고 싶지만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남편이 즉위한 뒤 입궐시킨 성빈 지씨를 총애하자 그동안의 감정이 폭발해서 사고를 치고 만다.
연재 시절부터 경주 김씨 후손으로부터 지지를 받으며 여주인공인 혜령 지지파와 갈등을 빚게 만든 캐릭터. 후손들 및 몇몇 정종 애처가파의 주장은 "이방과는 덕비 김씨를 사랑한 애처가"라는 것. 동생인 이방원이 정비靜妃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넷이나 됨에도 새로 아내를 들이겠다고 하자 "주상, 나는 아들이 없어도 아내와 젊은 날의 정으로 잘 삽니다. 주상은 아들도 많으면서 왜 또 장가를 들려고 하시오?"라고 유일하게 태종의 정사에 간섭했다고 한다.[1] 하지만 이 일화로 인해 정종이 애처가라는 이미지가 심각하게 굳어졌다. 실제로 정종실록에는 덕비 김씨의 투기로 인해 정종이 부부싸움 후 경연청에 나와 기거했다는 불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동생 방원에게 한 말 한마디로 이미지가 굳어진 셈.
3. 기타
정안왕후는 조선 왕조 최초의 왕대비로 정종이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순덕왕대비의 존호를 받은 인물이다.[3][1] 얄궂게도 원경왕후의 자식은 7남 4녀로 역대 조선 왕후들 중 가장 많은 자식을 봤다. 3명은 고려시대 유아기 때 사망해서 조선왕조실록에 등장 無. 그 때문에 태종은 원경왕후와 허구한 날 부부싸움을 해도 아들 셋을 일찍 보내서 원경왕후의 아들에게는 지독한 아들바보였다.[2] (임금이) 중궁(中宮)의 투기 때문에 경연청(經筵廳)에 나와서 10여 일 동안 거처하였다. - 조선 『정종실록』 정종2년(1400) 12월 19일 中[3]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서는 상왕이 살아있는 시절이라도 왕대비라고 명칭했다. 나라에 따라서는 이 차이를 구별하기도 했는데 일본 황실에서는 천황이 생전에 상황으로 퇴위하게 되자 상황후라고 황태후와 별개의 호칭을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