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8-10 01:33:13

정기연(독립운동가)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정기연(鄭琪衍)
출생 1903년 6월 5일
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 이문리 석지마을
사망 1952년 8월 11일
전라남도 함평군
서훈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애국지사.

참조.
독립운동가 애국지사 정기연의 조부는 독립운동가 정윤면.
독립운동가 순국선열 정윤면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운동가 정기연과 그의 조부인 독립운동가 정윤면의 유해는 1994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함께 안장되었다.

2. 생애

정기연은 1903년 6월 5일 전라남도 함평군 석지면 이문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함평군의 유지인 송대호, 조사현(曺士鉉)과 교류하면서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했고, 고종의 인산에 참례하고 귀향한 윤백언(尹伯彦)도 이에 가담하여 함평 장날인 1920년 3월 26일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사전준비를 하였다. 그는 모순기, 강정태 등을 거사 계획에 끌여들었고, 김용언(金用彦)·윤태완(尹泰完)·이행록(李行錄) 등과 사전준비를 하면서, 윤치영(尹致榮)·김재문(金在文)은 함평면, 김준령(金俊鈴)은 대동면. 모현기(牟顯基)·정영조(鄭永祚)는 그 밖의 다른 면의 책임자로 뽑았다.

1920년 3월 26일 오후 4시경 보통학교 학생과 청년·주민들로 수백명의 시위군중이 장날인 함평 장터에 모이자,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조사현 등과 함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그러나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 ·헌병의 야만적인 무력행사로 1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20여명이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체포된 그는 1920년 5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후 함평군 유지로 독립군을 위해 군자금을 지원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52년 8월 1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정기연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