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1:18:50

전상호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전상호
田相鎬[1]로 등재되어 있다.]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은약(殷若) / 경운(耕雲)
본관 담양 전씨[2]
출생 1889년 1월 10일
경상도 영해도호부 묘곡면 백일동
(현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묘곡리 백일마을)
사망 1924년 7월 31일[3]
경상북도 영덕군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전상호는 1889년 1월 10일 경상도 영해도호부 묘곡면 백일동(현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묘곡리 백일마을)에서 아버지 전익제(田益濟)와 어머니 남평 문씨 문덕필(文德弼)의 딸 사이의 1남 1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낙평동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과 구세군 참위(救世軍 參尉) 권태원 등이 주동한 1919년 3월 18일 영해읍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여 남진두, 남계병, 남교문, 남효직, 손영세, 정규하 등과 함께 3천명의 군중을 이끌고 성내동 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이후 경찰주재소로 달려가 경찰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위협해 그들도 부르게 했다.

이후 장터로 가서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외친 후 주재소로 다시 향했을 때, 주임순사 스즈키 츠루지로(鈴木鶴次郞)가 해산을 명령하며 태극기를 빼앗으려 했다. 이에 격분한 전상호는 군중과 함께 곤봉과 돌멩이로 주재소를 파괴하고 순사부장을 넘어뜨린 후 2명의 일본 순사의 모자와 칼을 빼앗았다.

그후 공립보통학교로 시위 행진해 평소 일제의 정책을 극찬하던 교사들을 규탄하고 건물을 파괴했으며, 일본인 소학교, 우편소, 면사무소를 차례로 파괴하고 다시 주재소로 몰려갔다. 이후 군중은 주재소 안에 걸려 있던 경찰복을 모두 찢어버리고 비치되어 있던 장총 4정과 87발의 실탄을 빼앗아 파기했다. 이때 영덕경찰서에서 서장 무의손(茂義孫)과 4명의 경찰이 긴급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다가, 시위군중의 위세에 눌려 철수했다. 그러자 전상호는 군중과 함께 그들을 포위해 총과 칼을 빼앗고 제복을 찢은 후 곤봉 세례를 가하면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수본(水本) 여관에 감금했다.

만세시위는 이튿날에도 지속되다가 오후 5시경 대구에 있는 일본군 보병 80연대로부터 장교 이하 17명이 출동해 헌병과 합세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하자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강제 해산되었다. 이후 일제가 대대적인 검속을 펼쳤을 때 체포되었고, 1919년 4월 5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 경주지청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며#,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 공무집행방해, 건조물손괴, 기물손괴, 공문서훼기, 상해,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공소하였으나 1919년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 판결이 취소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고#, 또한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11월 6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소요,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이후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다 1924년 7월 3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전상호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독립운동판결문에는 田[2] 뇌은파 30세 상(相) 종(鍾) 항렬.[3] 담양전씨 인터넷족보에는 6월 17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