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7AA9C><colcolor=#000000> 아르마냐크 백작 장 3세 다르마냐크 Jean III d'Armagnac, Comte d'Armagnac | ||
이름 | 장 3세 다르마냐크 Jean III d'Armagnac | |
출생 | 1359년 경 프랑스 왕국 아르마냐크 | |
사망지 | 1391년 7월 25일 이탈리아 피에몬테 알레산드리아 | |
배우자 | 코밍주 여백작 마르그리트 | |
자녀 | 잔, 마르그리트 | |
아버지 | 장 2세 다르마냐크 | |
어머니 | 페리고르의 잔 | |
형제 | 베르나르 7세, 베아트리스 | |
직위 | 로데즈와 아르마냐크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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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에 잉글랜드군에 맞서 싸웠다.2. 행적
1359년경 프랑스 왕국 아르마냐크에서 아르마냐크 백작 장 2세 다르마냐크와 페리고르 백작 로저베르트랑 드 페리고르의 딸인 페리고르의 잔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베르나르 7세, 베아트리스[1]가 있었다. 1385년 10월 25일 랑그독과 기옌의 보안관에 선임되어 시골과 요새, 도시를 약탈하고 점령하는 자유 용병대를 물리치는 임무를 수행했다. 1386년 아라스 근처에서 잉글랜드군과 교전했다.1390년 마요르카 국왕 하이메 3세의 딸이자 상속녀인 이사벨라가 그에게 마요르카 왕위 계승권을 양도했다. 그는 마요르가 왕위를 쟁취하는 한편 용병대를 프랑스 바깥으로 내보내는 데 이를 활용하기로 마음먹고, 용병대를 대거 고용했다. 여기에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에게 50,000플로린을 받고 샤롤레 백국을 양도했다. 이후 마요르카를 병합한 아라곤 왕국으로 쳐들어갔지만, 나바타 전투에서 베르나르도 데 카브레라가 지휘하는 아라곤군에게 패배하고 본토로 귀환했다.
1391년 주로 용병으로 구성된 20,000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군해, 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에 의해 감금되어 있던 여동생 베아트리스를 구출하려 했다. 파르마 영주이자 베아트리스의 남편이었던 카를로 비스콘티도 그를 도왔으며, 피렌체 공화국도 이 기회에 밀라노를 약화시키기 위해 군자금을 제공했다.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는 그에게 뇌물을 주고 물러나게 하려고 했지만 실패로 돌아가자, 일부 용병대장에게 뇌물을 건넸다. 이 뇌물을 받은 용병대가 반란을 일으키자, 장 3세는 군대가 붕괴될 것을 우려해 반란을 일으킨 용병대를 진압하고 용병대장들을 잔혹하게 죽였다. 이때 처형된 이들은 대부분 부르고뉴 출신이었기 때문에,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는 이를 모욕으로 간주했다. 이에 형제 베르나르 7세가 그를 대신해 디종으로 가서 필리프에게 사과했다.
1391년 7월 25일, 장 3세의 군대는 밀라노 공국의 알레산드리아 포위 공격하던 중 밀라노군의 매복 공격을 받아 참패했다. 그는 그 직후에 사망했는데, 사망 경위는 불분명하다.
이보다 앞서, 아버지 장 2세는 생전에 자신이 죽은 뒤 아르마냐크 백작위를 장남이 물려받되, 장남이 적법한 아들을 두지 못한 채 죽으면 차남이 물려받으라는 유언장을 남겼다. 장 3세는 딸 2명만 낳고 사망했고, 아르마냐크 백작령과 로데즈 백작령은 장 2세의 유언에 따라 베르나르 7세에게 이전되었다. 그러나 장 3세가 아내 마르그리트 드 코밍주를 통해 확보했던 코밍주 백작령은 마르그리트에게 도로 돌아갔다. 이에 베르나르 7세가 코밍주 백작령마저 확보하려 했고, 이로 인해 갈등이 발생했다.
3. 가족
- 마르그리트 드 코밍주(1363 ~ 1443): 코밍주 백작 피에르 레이몽 2세와 코망주 여백작 잔 드 코밍주의 딸.
- 잔 다르마냐크: 레오파드, 블라시몬, 로산, 푸졸, 칸시온의 영주인 기욤아마네 드 마다얀의 부인.
- 마르그리트 다르마냐크: 나르본 자작 기욤 2세 드 나르본과 초혼, 마르상 남작 기욤 드 티니에르와 재혼.
[1] 1366 ~ 1410년 2월 이후, 푸아 백작 가스통 4세 드 푸아의 아들인 가스통과 초혼, 파르마 영주 카를로 비스콘티와 재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