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2-10-08 02:18:04

이태직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이태직
李泰稙[1]으로 썼다고 한다.]
파일:이태직.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대능(大能) / 경산(耕山)
본관 영천 이씨(永川 李氏)[2]
출생 1878년 7월 12일
경상도 의성현 산운면 다상동
(現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160번지)[3]
사망 1913년 9월 5일
묘소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 산36번지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78년 7월 12일 경상도 의성현 산운면 다상동(現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160번지)에서 아버지 이장수(李章秀, 1858. 2. 22 ~ 1900. 9. 28)와 어머니 의성 김씨(1856. 3. 20 ~ 1914. 2. 21)[4]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5년 11월 17일 일제에 의해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에 반대하고 일제를 규탄하는 소회진술문(所懷陳述文)을 작성해 이상재를 방문해 건네고 대책을 토의하다가 일본 경찰에 문서를 압수당하고 구금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한 뒤 일본 제국 정부에 보내는 항의문을 작성했으나 이후 발각되어 경찰에 압수당했고, 의성경찰서에 50일간 구금되어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

1912년부터는 일제에 대해 납세부역을 거부했고, 그해 7월 29일 메이지 천황이 죽자 이때 상복을 입는 것을 반대하다가 다시 의성경찰서에 구금되어 고문을 당했다. 이후 석방되었으나 고문의 여독으로 1913년 9월 5일 별세했다.

198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1] 처음에는 이름의 한자를 李[2] 영동정공파(領同正公派)-감사공파(監司公派) 25세 태(泰) 항렬.[3] 1913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1913년 당시 이 지번은 이태직의 첫째 남동생 이태능(李泰能, 1887. 5. 2 ~ 1961. 6. 14)의 소유였다. 2018년 12월 17일 현재 이 지번은 이태직의 종증손자 이시욱(李時旭, 1979. 9. 30 ~ )의 소유이다.[4] 학봉 김성일의 후손으로, 김진만(金鎭萬)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