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池袋通り魔殺人事件1999년 일본 이케부쿠로에서 일어난 무차별 흉기 난동 및 살인 사건. 백주 대낮의 번화가에서 벌어진 사건이었기에 당시 일본 사회를 큰 충격에 빠뜨렸다.
2. 사건 경위
1999년 9월 8일 오전 11시 35분에서 40분경, 도쿄 히가시이케부쿠로의 토큐핸즈 이케부쿠로점 앞에서 당시 23세의 조타 히로시(造田博)라는 남성이 행인들에게 마구잡이로 식칼과 망치를 휘두르며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타는 이케부쿠로 선샤인 시티 지하통로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토큐핸즈 정면 출입구로 나와서는 갑자기 "우오-! 짜증난다, 죽여버릴 거야"라고 소리치더니, 에스컬레이터로 올라오던 노부부를 먼저 습격, 아내 스미요시 카즈코(당시 66세)를 칼로 찔러 살해한 뒤 남편 스미요시 나오시(당시 72세)를 둔기로 때리고 칼로 찔러 부상을 입힌 뒤 달아났다. 다음으로 토큐핸즈 앞을 지나가던 타카하시 마사토시(당시 34세)와 마야(당시 29세) 부부와 마주치자 마야를 식칼로 찔러 살해한 뒤,[1] 이케부쿠로역 방향으로 가면서 도중에 고등학생 4명 중 3명에게 흉기를 휘둘러 상해를 입히고 이후 2명에게 더 상해를 입혔다. 이 사건으로 2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을 입었다.그 후 조타는 이케부쿠로역 앞에서 시민들에게 제압되었고 뒤이어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경찰 조사에서 조타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무직에 취직하고 싶었다"면서 "미국인들은 거의 다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 "기독교 신자들은 모두 노력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했고, "열심히 일하는데도 인정받지 못해 화가 났다"고 범행 동기를 진술했다. 한편 조타와 옥중 서신을 주고받았던 저널리스트 아오누마 요이치로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조타 히로시교(造田博教)'라는 것을 창시했다고 주장했다 한다.
3. 재판 결과
조타 히로시에게는 살인 및 살인미수죄, 총포 및 도검류 소지 등 단속법 위반 혐의가 적용되었고, 검찰은 그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조타의 변호인 측은 그가 사건 당시 인격장애 내지는 조현병 유사 증세가 있을 가능성이 지적된 것을 근거로 심신미약을 주장하였으나, 도쿄지방법원은 조타가 흉기를 구매할 당시 의심받지 않기 위해 범행에 불필요한 상품을 굳이 함께 구매했다는 점이나 범행 도중 날이 빠진 식칼을 버렸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무차별 살인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합리적인 행동을 취했다고 지적하며 변호인 측의 주장을 일축, 조타의 형사상 완전책임능력을 인정했다.2002년 1월 18일 도쿄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에서 재판부는 검찰 측의 구형대로 사형을 선고했다. 사실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판례로 거론되는데, 그동안 일본에서는 사망자가 발생한 묻지마 범죄 사건에서 피고의 형사상 책임능력이 인정된 사례 자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 이전에 발생한 신주쿠 버스 방화 사건이나 후카가와 칼부림 사건의 경우에도 사망자가 여럿 나왔으나, 이 두 사건은 모두 피고인들이 범행 당시 심신미약 상태였음이 인정되어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2] 또한 그 이전에도 심신상실이 인정되어 불기소 처분된 사례도 여러 건 있었다.
조타는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했으나 기각되었고, 이에 재차 최고재판소에 상고했다. 상고 당시 조타의 변호인 측에서는 그의 심신미약을 주장하는 한편 사형제도가 위헌이라는 취지의 주장을 덧붙였으나, 최고재판소가 조타와 변호인의 상고를 재차 기각함으로써 사형이 확정되었고, 2024년 현재 사형수 신분으로 도쿄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
4. 범인에 관하여
조타 히로시는 1975년 오카야마현 쿠라시키시에서 태어났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초등학교 5~6학년경 목수였던 부친이 상속받은 땅을 팔아 큰 돈을 거머쥐게 된 이후부터 금전감각이 마비되었는지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일을 하지 않게 되자 모친이 보험 판매원으로 일하면서 가계를 꾸려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즈음부터 그의 몰락인생이 시작되었다.모친은 보험 판매원 일을 시작했을 무렵부터 갑자기 요란한 옷차림을 하기 시작했고, 일하는 틈틈이 파칭코를 하러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는 부친까지 함께 파칭코를 시작으로 경륜, 경정 같은 다른 도박에 차차 손을 대게 된다. 결국 고등학교 2학년 즈음 도박에 빠진 부모가 거의 2천만~4천만엔에 달하는 거액의 빚을 지는 바람에 부모는 빚쟁이들을 피해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고, 조타는 이 여파로 고등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3] 그리고 그의 부모는 1993년 11월 집의 세간살이를 전부 가지고 도망친 이후 완전히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4]
1994년부터 그는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에서 혼자 자취를 하던 형(당시 대학생)의 집에 얹혀 살면서 파칭코점 점원, 신문배달, 선박 도장업 등 여러 일자리를 전전했다.[5] 이 당시 그는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이었던 한 여대생(이하 A)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조타는 초등학교 때 즈음에 그녀가 먼저 자신에게 고백했다고 진술했으나, A는 조타와 이렇다 할 친분이 있었던 사이도 아니었고 자신이 좋아하는 타입도 아니었으며 자신 쪽에서 호감을 표하거나 편지를 보내거나 한 일은 전혀 없었다고 일축했다. 즉 조타의 일방적인 연애감정이었던 셈. 그는 A에게 편지와 전화로 계속 일방적인 호의를 전하다 급기야 A를 만나야겠다며 그녀의 집에까지 찾아가지만, A의 부친이 "우리 딸은 당신을 알지도 못하고, 본인도 싫어하는데다 아직 공부도 많이 해야 하는 몸이다"라고 거절의 뜻을 밝히자 의외로 순순히 물러갔다고 한다.[6]
1996년 11월 일자리를 찾아 도쿄로 상경한 조타는 변변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지내다가 아이치현 오카자키시에서 간신히 취직하는데, 이 때 교회에 잠시 다니면서 기독교와 미국인에 대해 이상한 편견이 섞인 친밀감을 갖게 된다.[7] 이후 다시 아이치에서 도쿄로 상경, 세타가야구의 한 신문 판매점에서 일하는 와중에 외무성, 법원(재판소), 경시청 등의 공공기관과 정부 앞으로 의미를 알 수 없는 괴편지를 수십 통씩 보내는 등의 기행을 저지른다. 아래는 그가 당시 보낸 편지 중 하나.
일본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구질구질한 인간들입니다. 이 구질구질한 자들은 가부키초에서 인간이 아니게 되든, 동물이 아니게 되든, 생물이 아니게 되든, 존재하지 않게 되어도 계속 강간을 저지르고, 폭행을 저지르겠다고 말합니다. 존재, 물질, 동물이 갖는 근본적인 권리, 그리고 기본적 인권을 박탈할 능력을 개인이 가져야 합니다. 이 구질구질한 자들로부터는 박탈할 필요가 있습니다. UN 사무총장에게 전해 주십시오. Hiroshi Zota 造田博 |
1998년 6월 조타는 겨우 200달러를 가지고 무작정 미국으로 떠났다.[8] 그러나 아는 사람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미국 땅에서 그가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고, 결국 그는 여권을 찢어버리기까지 했다. 그나마 대사관의 도움을 받아 일본인 교회에 잠시 머무르면서 안정을 찾은 뒤 다시 일본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그러다 1999년부터는 마음을 다잡고 아다치구의 요미우리신문 대리점에서 일하면서 착실히 사는가 했는데, 9월 3일 평소 그가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라면서 좋지 않게 생각하던 동료가 그의 핸드폰 번호를 묻는다는 이유로 분노를 품기 시작했고, 그 날 밤에 걸려온 한 통의 무언전화를 '노력하지 않는 사람'의 장난이라고 멋대로 단정짓고 또다시 심한 분노에 휩싸였다. 이윽고 이 '노력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분노는 곧 거리를 지나다니는 무고한 사람들에게 향하게 된다.
5. 그 외
피해자 중 한 명인 타카하시 마야의 아버지 미야조노 세이야씨는 1차 공판 이후 취재진들을 향해 누군가가 말을 거는 것이 두려워서 동네 사람들과의 교류도 줄었고 외출할 때는 늘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다닌다면서, 가해자인 조타에 대해 동정적인 논조의 보도만을 내보내는 언론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표했다고 한다. 이후 미야조노 씨는 전국 범죄 피해자 모임의 간사를 역임했다.이 사건이 있고 약 3주 후인 1999년 9월 29일 시모노세키역 무차별 살상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의 범인 우와베 야스아키는 경찰 조사에서 이케부쿠로 사건을 의식하고 저지른 범행이라고 진술했다.
[1] 이 당시 조타의 범행이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탓에 부부는 근처 파칭코점에 들어가 도움을 요청한 시점에서야 아내가 칼에 찔린 것을 알았다고 한다.[2] 이 중 신주쿠 버스 방화 사건의 범인 마루야마 히로후미는 1997년 형무소 내 작업장에서 자살했다.[3] 조타의 사정을 알게 된 담임교사가 대입 검정고시(2004년 말 폐지, 현재는 한국의 고입 검정고시에 해당)라도 봐서 대학에 진학하라며 그를 위로했다고 한다.[4] 이후 오카야마의 자택은 1996년 경매에 넘어가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어느 일가에게 낙찰되었다고 한다.[5] 부모 대신 그를 돌봐 왔던 형의 증언에 따르면 조타는 이직을 거듭할수록 말수가 적어졌고, 보다 못해 동생을 크게 꾸짖기도 했지만 그 때마다 그는 점점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히게 되었다고 한다.[6] 조타는 1996년 오카야마 시내의 한 전기공사 업체의 취업 면접 자리에서 대학생인 여자친구가 있어서 결혼 비용을 모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그가 말한 대학생 여자친구가 바로 A를 의미한다.[7] 위의 진술 내용 중 '미국인은 거의 다 노력하는 사람, 기독교 신자들은 모두가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8] 본인의 진술에 따르면 무작정 떠난 것 치고는 1달 동안 계획적으로 준비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