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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0 13:13:47

이충재(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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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재
출생 1969년 8월 20일 ([age(1969-08-20)]세)
전라남도 광양시
현직
학력 순천고등학교 (졸업)
소속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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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광양시청 공무원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위원장
공무원통합노동조합 위원장
제20대 대선 이재명 후보 노동특보단 부단장
링크

1. 개요

광양시청 공무원 출신 정치인이다.
광양토박이로 광양을 떠나지 않고 공무원, 노조위원장 등 다양한 활동을 역임했다.

2. 생애

1969년도 구 광양읍 용강리 검단마을에서 6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표면적으로 내성적으로 보였으나 반장과 전교 어린이회장까지 할 정도로 외향적인 기질이 많았다. 과학경진대회와 학예발표회 및 학교 행사에는 빠짐없이 참여하던 어린시절의 나름 인사로 자라났다.

바둑을 배우고 싶었으나 아버지의 권유로 장기를 배우게 되었고 동네 어르신들과 견주어도 패하지 않을만큼 장기에 소질이 있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니 소위 말하는 범생이가 되어 공부만 하고 당시 지역의 명문고였던 순천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0대 중후반에 찾아온 사춘기 시절에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었다. '삶'이라는 큰 덩어리를 놓고 온갖 잡다한 생각을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생각의 끝에서 하게 된 결심은 대학진학을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당시에는 '대학은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지, 누구나 다 의무적으로 대학을 갈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학진학에 대한 고민 대신 만화를 통해 인물, 역사, 문화 등 다양한 경험들을 얻었다. 당시 대학 진학을 하지 않은 것에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다.[1]


3. 공무원 그리고 공무원노조

① "나는 무엇을 할 것인지?", "무엇을 해야 훗날 후회 없는 길이 될 것인지?"라는 생각을 몇달을 하릴없이 무위도식하며 청춘을 보내고 있으나 형님께서 공무원의 길을 권하셨다. 공무원은 생각도 해 본적도 없지만 당시에는 임시방편으로 찾은 비상구 같은 방향이었다. 두달도 남지 않은 시간에 1988년 6월 지방직 9급 시험 준비를 하였고 예상보다 어렵지 않은 시험으로 합격할 수 있었다. 일단 밥벌이는 할 수 있다라는 안도로 직업의식이나 야망없이 일단 시작하게 된 직장이었다. [2]
②1998년 공무원직장협의회법이 개정되면서 공무원직장협의회가 건설되었다. 초창기 멤버로 공무원노조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③2000년도에는 광양시청에서 "떡값 거부운동"을 시작하였다. 소위 말하는 떡값과 촌지가 당연하게 주고 받던 시절이었으나 거부운동을 통해 오히려 반기는 분위기가 있었다. 당연하게 받으면 당연하게 돌려줘야 하기 때문에 공무원 입장에서는 퍽이나 난감하고 부담스러운 거래?였기 때문이다. 운동을 시작한지 3년째 되는 해에는 민원인으로부터 금품이 건네진 것을 나중에야 알게된 한 공무원이 전국공무원노동조합(전공노) 광양시지부에 신하였고, 시지부측이 광양시청 기획감사관실에 전달하는 훈훈한 사건도 있었다. 당시 광양시청 홈페이지에는 "금품 찾아가세요" 공고를 내기도 했었다. 결국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 광양시청 금고로 귀속되었다.
④공무원노조 활동은 당시에는 불법이었다. 1999년부터 공무원노조가 생겨 활동을 해나갔지만 모든 활동이 불법이었고 공무원 징계감이었다. 2002년 3월 23일 전국 7만 조합원으로 전국공무원노동조합(전공노)가 창립되었다. 그럼에도 정부에서는 공무원노조를 인정해주지 않았고 "노동 3권 쟁취를 위한 결의대회"를 진행하였다. [3] 당시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중앙 전남본부 정책기획단장, 대변인으로 활동하였기에 집회 기획 및 참여를 했던 결과로 3개월 감봉처분을 받았다.
⑤노조라고 하면 투쟁이 떠오르겠지만 공무원 노조는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2005년 4월에는 낙하산 인사에 대해 지자체 인사권 침해 재발방지 마련을 위한 철야농성을 하기도 하였다.
⑥2005년에는 광양시의원들이 공무원노조를 경찰서에 고소하기도 하였다. 당시 익명으로 유일하게 공무원 및 시민들이 자유롭게 시정 현안에 대해 비판과 정보교환이 이루어지던 '광양시노조 광양시지부' 인터넷 게시판에 시의원들을 비판하는 글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4]
⑦2005년 6월 26일에는 전남지역 공무원노조와 시민단체들이 자치단체와 시군의회 감시를 전담하는 연대기구 [행-의정 감시를 위한 전남 연대]를 창립하였고, 공동운영위원장을 맡아 과다한 보조금 집행 및 지방의원 해외연수에 대해 지적하기도 하였다.
⑧2005년 12월 24일에는 미군기지 정비공장을 광양항에 이전한다고 하여 당시 청장인 백옥인 규탄 및 범시민대회를 진행하기도 하였는데 범시민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아 노조의 경험?을 살려 집회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 2014년부터 2015년은 공무원 노조 역사상 가장 시끄러웠던 해였다. 공무원연금 개혁안을 추진중인 여당과 이를 반대하는 공무원 노조의 갈등이 치솟았다. 이에 즉시 '공적연금 개악저지를 위한 공동투쟁본부'를 결성하였고 공동위원장으로서 뉴스, 라디오, 토론회 등 적극 참여를 통해 공무원연금에 대한 협상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고위공무원을 위한 개혁안을 지속적으로 내놓는 여당에 사사건건 부딪혔고 결국 2014년 11월 1일 12만명의 공무원들이 여의도공원에 집결해 당시 새누리당(현. 국민의 힘)을 비판하였다. 이에 야당(전.새정치민주연합, 현.더불어민주당)이 나서 중재를 도우며 공무원연금 개혁안을 협상하려 했으나 이마저 하위공무원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어 당사자 합의 없는 정치야합이라고 비판하며 반대 기사회견을 열었다.
2015년 4월 25일 또 다시 4만명의 공무원노조(전공노)가 집결하여 공적연금 강화 국민대회 집회를 서울시청에서 개최하였다.[5]

4. 온라인쇼핑몰(복지몰)협동조합소스

2020년 오픈한 협동조합소스는 조합이 마트, 온라인 사업 등을 운영하고 이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여 운영비를 마련하고자 시작된 조직이다. 노동조합원들에게는 회비 부담을 최소화하고, 국내 중소기업들의 제품을 위탁판매해 줌으로 상생의 효과를 누리면서 노조운영비와 수익금의 일부를 빈민국 지원에 사용하고자 만들어졌다. 또한 '내 삶의 S.O.S'카테고리를 통해 법률, 세무, 회계, 심리, 부동산, 상조, 예식 등에 대한 무료 상담도 진행하여 노조에 가입한 누구나 다양한 혜택을 누리게 하고자 하였다.
당시 협동조합소스 이사장으로 기획부터 오픈까지 모든 준비를 준비하였고, 별다른 무리 없이 협동조합 소스는 오픈하였다. 중소기업, 벤처기업, 대기업까지 다양한 기업들과 업무협약을 맺어 분야별로 소홀하지 않도록 준비하였다. 이사장직을 내려놓은 2023년까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5. 연애와 결혼

공무원 1년차에 읍사무소에 단발머리 소녀가 나타났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여고 3학년생이 아르바이트 생으로 합류한 것이다. 전산 관련 자료 입력을 위한 타이핑을 하는 앳된 소녀는 차분하면서도 순수함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몇 달의 아르바이트 후 상용직으로 잠시 일하던 소녀는 공무원 시험에 도전했고 몇 년 후 같은 직업을 갖게 되었다. 광양 내에서 같은 공무원 생활을 하게 됐으니ㅏ ‘아’ 하면 ‘어’하고 주고 받을 공통분모로 삼을 대화거리가 많으니 이해하고 의지하는 간격도 점점 좁혀지는 것을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7년’이라는 긴 연애 끝에 1995년 부부가 되었다. 1남 1녀의 두 아이가 어느새 20대 청년으로 성장했으니 30여 년의 시간을 함께해온 셈이다. 20대 청춘의 시기에 무던하게도 바라보고 기다려준 아내는 다른 이들 앞에서는 종종 이 말을 하곤 한다.
“우리가 사귈 때는 제가 더 많이 좋아했었죠. 그 시절 제 눈에는 이 사람 말고는 다른 사람이 안 보였어요. 그렇지만 분명한 것 하나가 있어요. 그래도 프로포즈는 이 사람이 했는 걸요.”
아마도 1998년도부터 시작된 공무원노조 활동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공무원 노조는 불법이었으며 중립성에 어긋난다고 하여 노조 활동을 하는 공무원들은 해임과 징계를 받기 대부분이었다.
서울과 광양을 오가는 세월동안 아내는 공무원생활을 하며 오롯히 혼자서 아이 둘을 키워내야만 했다.
그럼에도 아내는 불평하지 않았고 전과 7범이 될 때까지 끝까지 남편을 인정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이 되어주었다. 국회의원선거를 치르고 있는 지금도 아내는 휴직을 하고 남편을 믿으며 도와주고 있다.

6. 정치 참여 계기

‘정치에 참여해달라’는 권유는 여러차례 받았지만 노동계에서도 할 일이 많았고 노동계 변화가 사회적으로 큰 정치의 일환이라 생각하였기에 출마 권유에도 답을 내놓지 않았다.
다만 지역민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가장 많이 들었어 얘기가 다름 아닌 ‘지역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치적 야망이 우선이 아니고 지역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 사람이 나서야 하는 생각에 고심했고, 보다 효과적인 방법론으로 정치로 풀어내는 ‘지역운동가’를 택하기로 했다. 지역사회에서 공존과 상생을 위한 길을 묻는다면 ‘정치’라는 무거운 글자를 앞세우기보다는 내가 나고 자란 지역사회 시민의 한 사람이자 지역운동가로서 지역을 고민하는 이들과 함께 실행으로 옮겨보기로 했다.

7. 경력

1989~2021. 광양시청 근무(32년)
2002~2015. 전국공무원노동조합 활동
2014~2015. 전국공무원노동조합위원장
2015. 전국통합공무원노동조합 위원장
2016~2021. 공공서비스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2022. 더불어민주당 이재명대통령 후보 중앙선대위 노동특보단 부단장

2004. 도지사 엄정수사 촉구 투쟁
2005. 공적사회 개혁 검찰청 1인 시위
2005. 인사교류개선 1인 시위
2006. 3. 4 광양한 미군기지 반대 집회
2008. 공무원연금제도발전위원회 위원(행안부)
2009. 공무원연급법 개혁이 참여정부 시절에 전문가들이 안을 만드는 단계[이후]
2010. 6. 24 부당징계 규탄 투쟁
2011 노동조합 설립 헌법소원 청구
2011. 6. 27 공무원 단체 교섭 투쟁
2013 설립신고 반려한 박근혜 정권 사기행각 규탄 1인 시위
2014.4~2015.5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위원장
2014. 5. 2 부당징계 규탄 투쟁
2014. 5. 16 세월호 사건관련 대통령과 고위관료의 부적절한 처신에 대한 하위직 공무원 대신 사과
2014. 11월, 12만 명이 모인 공무원 노조 역사상 최대규모 집회[7]
2015. 통합공무원노조 설립
2015. 3. 29 5만 국민연금 강화와 공무원 연금 개혁안 반대 대규모 집회
2015. 5월, 3만 국민연금 강화와 공무원 연금 개혁안 반대 대규모 집회
2015. 5. 2 공무원연금개혁을 위한 실무기구는 공무원연금 개혁안에 대하여 합의를 이룸
2016. 7. 27 공공성 파괴 저지를 위한 국회 앞 1인 시위
2016. 공공서비스노총 설립
2016. 성과급제 폐지 투쟁
2017. 12. 5 적폐공무원 청산 요구 기자회견
2019. 8. 30 시간선택제본부 제도개선 촉구 기자회견 및 국회 토론회
2020. 2. 27 노인빈곤 해소와 노후소득보장 확충을 위한 정책협약[8]
2021. 11. 협동조합소스 복지몰(www.협동조합소스.com) 구축
2021. 2. 25 공무원노조법 개정 기자회견
2021. 3. 19 한국노총-공공노총 통합추진위원회 회의
2021.4 한국노총 통합
2021. 7. 22 공정무역 활성화 업무협약식[9]
2022. 9. 15 업무협약 체결식[10]
2022. 9. 30 사회적 약자 분야의 조직 연대 사회연대노동조합연맹 설립[11]
2022. 11. 29 복지몰 공급을 위한 MOU 체결식[12]
2023. 2. 23 전국외국인다문화노동조합 설립 지원
2023. 4. 4 “약자와의 동행 연대 협약식” [13]
2023. 4. 10 “약자와의 동행 연대 협약식” [14]
2023. 4. 18 “외국인 종합플랫폼 구축을 위한 업무 협약식“[15]

8. 국회의원에 대한 개인적 견해

직업공무원이 아니라 국민을 대표하여 법률을 제정하고 국정을 심의하는 임기 4년의 국민 대리인이다. ‘국회의원’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인의 길을 걷는다면 모름지기 ‘청백리’의 자세로 약자를 대변하는 정치인이어야 한다.

9. 여담

요섹남(요리하는 섹시한 남자)이다.
2007년 즈음부터 노조 활동 때문에 서울과 광양을 오가는 생활을 했다. 주말부부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아내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두 아이를 키워야 했다. 아내에게 감사와 미안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가족을 위한 주말식탁을 차리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요리가 취미가 되어 이제는 가족들을 위해 생일상이나 명절음식까지 만들 수 있는 나름의 요섹남이 되었다.
[1] 공무원 7년차에는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만한 재활의학과 야간대학을 다녔었다. 그러나 직장과 학교를 병행하는 것은 두마리 토끼를 놓치는 일이라 생각되어 2학년이 되는 해에 과감하게 자퇴를 하였다. 이에 대한 후회와 미련은 없다.[2] 당시에는 그랬으나 훗날 23년간 공무원 노조에 뛰어들어 노동조합의 일원이나 리더로 활동을 하는 것을 보니 공무원 시험은 운명이라고 생각된다.[3] 이는 훗날 모든 공무원노조의 활동의 시발점이 되었다.[4] 지금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염치없는 행동이지 않았나 싶다[5] 전공노의 역사를 살펴보면 가장 많이 집회를 열었던 정부는 이명박, 박근혜정부 때이다.[이후] 이명박 정부가 일방적 개악 움직임으로 공무원 노동자들이 대규모 집회 등을 개최하며 투쟁에 나섰고 사회적 대화의 틀로 전환됐다[7] 공적연금 개악저지 공동 투쟁 결의 대회[8] 공적연금 수급자 유니온-복지국가 소사이어티-공공서비스 노동조합 총연맹[9] 국제공정무역기구 한국사무소-한국 노총 공무원 교원 위원회[10] 협동조합소스-쿠프마케팅[11] 한국외국인다문화노조, 글로벌사회연대노조, 연금유니온, 노인복지산업종사자 노조 등을 비롯해 문화예술인, 소상공인, 출산 육아 지원 활동가 등[12] 협동조합소스-(사)지구촌안전연맹[13] 사회연대노동조합 이충재 위원장-국제e스포츠진흥원 전옥이 이사장[14] 사회연대노동조합 이충재 위원장-대한노인회 김호일 회장[15] 사회연대노동조합 이충재 위원장-(주)인에이블코리아 조성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