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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총신대학교 제21대 총장 이재서 李在緖 | Lee Jae-seo | ||
<colbgcolor=#404040><colcolor=#fff>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
출생 | 1953년 11월 20일 ([age(1953-11-20)]세) | |
전라남도 순천시 | ||
교단 |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 |
학력 | 총신대학교 (신학과 / 수료) 필라델피아 비블리컬 대학 (학사/ B.S) 템플 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 M.S.W) 럿거스 대학교 (사회복지정책학/ Ph.D) | |
현직 | 세계밀알연합 총재 총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 명예교수 | |
재임기간 | 제21대 총신대학교 총장 | |
2019년 5월 25일 ~ 2023년 5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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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재서는 제21대 총신대학교 총장이자 현 세계밀알연합 총재로, 세계 최초의 시각장애인 대학교 총장이다.2. 실명과 장애인을 위한 비전
이재서 박사는 황전북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가정 형편상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부모님을 도와 농사짓는 일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어려서 앓았던 열병 후유증으로 인해 15세 때에 두 눈의 시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서울로 상경, 국립서울맹학교 중·고등부를 다녔다.
갑작스러운 실명은 그에게 엄청난 좌절과 고통을 안겨줬지만 시각장애인학교를 다니며 점차 삶의 의지를 되찾게 되었고, 장애인 당사자로서 현실적인 아픔과 사회적 분리를 직접 체험하면서 미래에 장애인과 소외계층을 위해 일해야겠다는 꿈을 품었다.
그 시각장애인 학교 시절에 받아들인 기독교 신앙은 이재서 박사가 그런 꿈과 비전을 향해 평생 정진해 가는 데 큰 힘으로 작용했다.
갑작스러운 실명은 그에게 엄청난 좌절과 고통을 안겨줬지만 시각장애인학교를 다니며 점차 삶의 의지를 되찾게 되었고, 장애인 당사자로서 현실적인 아픔과 사회적 분리를 직접 체험하면서 미래에 장애인과 소외계층을 위해 일해야겠다는 꿈을 품었다.
그 시각장애인 학교 시절에 받아들인 기독교 신앙은 이재서 박사가 그런 꿈과 비전을 향해 평생 정진해 가는 데 큰 힘으로 작용했다.
3. 미국 유학
1977년 총신대 신학과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했다.
총신대 3학년 재학 중이던 1979년, 26세 때, 어린 시절부터 품었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한국밀알선교단’을 창립했다. 장애인을 위한 복지, 선교, 교육, 권익향상 및 인식개선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창립 이후 미국 유학을 떠날 때까지 5년 동안 단장으로서 열정적인 활동을 펼쳐 국내에서 확고한 기독교 사회봉사 기관으로 자리 잡게 했다.
1984년,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미국 유학을 떠났다. 보다 전문적으로 일하기 위해 장애인 및 사회적 약자들과 관련된 복지와 정책을 그 분야에서 가장 발전된 미국에서 공부하겠다는 것과, 한국에서 시작한 장애인을 위한 ‘밀알운동’을 세계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국제적 활동이 편리한 미국에다가 그 전진기지를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한 치 앞도 못 보는 시각장애인이 학비 대책도 없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으로 혼자 흰지팡이 하나 들고 떠나는 무모하기만 한 유학을, 가족과 주변 사람들 모두는 강하게 만류했다. 모든 사람은 그의 미국 유학을 불가능하게 보았고, 더구나 가당치도 않은 두 가지 계획이라는 것을 성공할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과연 그의 미국 유학 10년은 시각장애인으로서 맞닥뜨려야 하는 불편과 불리함, 경제적인 문제로 인한 고통들, 가히 형극의 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험난한 길이었다.
그러나 본인의 피나는 노력, 나중에 합류하게 된 아내의 헌신, 미국에서 만나게 된 많은 사람들의 협력으로 인해 그 모든 난관들을 극복하고 두 가지 목적을 다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Cairn대학 사회복지학과 3학년으로 편입하여 학사학위, Temple대학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행정학 석사학위, Rutgers대학 대학원에서 사회복지정책학으로 박사학위(Ph.D.)를 취득했다.
또한, 바쁜 유학 중에도 미국 여러 지역을 다니며 밀알지부들을 설립했고, 그 미국 내 지부들을 법적으로 연합시켜 귀국하기 전까지 비영리 사회봉사 단체로 미 연방 정부에 등록을 완료시킴으로 세계를 향한 든든한 밀알 활동의 발판을 확보했다.
총신대 3학년 재학 중이던 1979년, 26세 때, 어린 시절부터 품었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한국밀알선교단’을 창립했다. 장애인을 위한 복지, 선교, 교육, 권익향상 및 인식개선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창립 이후 미국 유학을 떠날 때까지 5년 동안 단장으로서 열정적인 활동을 펼쳐 국내에서 확고한 기독교 사회봉사 기관으로 자리 잡게 했다.
1984년,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미국 유학을 떠났다. 보다 전문적으로 일하기 위해 장애인 및 사회적 약자들과 관련된 복지와 정책을 그 분야에서 가장 발전된 미국에서 공부하겠다는 것과, 한국에서 시작한 장애인을 위한 ‘밀알운동’을 세계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국제적 활동이 편리한 미국에다가 그 전진기지를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한 치 앞도 못 보는 시각장애인이 학비 대책도 없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으로 혼자 흰지팡이 하나 들고 떠나는 무모하기만 한 유학을, 가족과 주변 사람들 모두는 강하게 만류했다. 모든 사람은 그의 미국 유학을 불가능하게 보았고, 더구나 가당치도 않은 두 가지 계획이라는 것을 성공할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과연 그의 미국 유학 10년은 시각장애인으로서 맞닥뜨려야 하는 불편과 불리함, 경제적인 문제로 인한 고통들, 가히 형극의 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험난한 길이었다.
그러나 본인의 피나는 노력, 나중에 합류하게 된 아내의 헌신, 미국에서 만나게 된 많은 사람들의 협력으로 인해 그 모든 난관들을 극복하고 두 가지 목적을 다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Cairn대학 사회복지학과 3학년으로 편입하여 학사학위, Temple대학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행정학 석사학위, Rutgers대학 대학원에서 사회복지정책학으로 박사학위(Ph.D.)를 취득했다.
또한, 바쁜 유학 중에도 미국 여러 지역을 다니며 밀알지부들을 설립했고, 그 미국 내 지부들을 법적으로 연합시켜 귀국하기 전까지 비영리 사회봉사 단체로 미 연방 정부에 등록을 완료시킴으로 세계를 향한 든든한 밀알 활동의 발판을 확보했다.
4. 대학교수
1994년 귀국하여 처음엔 총신대와 성균관대 사회복지학과에서 시간강사로 강의를 하다가 1996년 총신대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로부터 2019년 2월 정년퇴임 때까지 23년 동안 총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학과장과 대학원장의 보직도 역임했다. 정년퇴임 때는 교수들의 만장일치 추대로 명예교수가 되었다.
그로부터 2019년 2월 정년퇴임 때까지 23년 동안 총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학과장과 대학원장의 보직도 역임했다. 정년퇴임 때는 교수들의 만장일치 추대로 명예교수가 되었다.
5. ‘밀알’활동
귀국 후 1995년, 본인이 직접 설립한 한국, 미국, 유럽, 남미 등 세계의 모든 밀알 지부들을 연합시켜 문광부 산하 사단법인 ‘세계밀알연합’을 출범시키고 총재로 취임했다.
이제 44년이 된 ‘밀알’은, 국내에서는 ‘세계밀알연합’을 비롯한 9개의 사단법인과, ‘밀알복지재단’을 비롯한 7개의 사회복지법인으로 발전, 확산되어 전국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해외에서는 18개 지단이 있는 미주를 비롯, 20여 개국 여러 현장에서 장애인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전개한다.
이제 44년이 된 ‘밀알’은, 국내에서는 ‘세계밀알연합’을 비롯한 9개의 사단법인과, ‘밀알복지재단’을 비롯한 7개의 사회복지법인으로 발전, 확산되어 전국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해외에서는 18개 지단이 있는 미주를 비롯, 20여 개국 여러 현장에서 장애인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전개한다.
6. 사회봉사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밀알’ 총재로서의 다양한 업무들 외에도 여러 다른 기관을 위한 봉사활동에도 힘을 썼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상임 고문과 정책자문위원장, 시각장애인 아카데미 회장 등을 맡아 시각장애인을 위한 여러 정책과 교육재료들을 개발했고, 서울시 공익사업 선정위원, 국무총리실 산하 장애인정책조정위원, 평화통일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남북 교류가 가능하던 2003년에는 세계밀알연합 총재로서 북한 장애인 돕기에 나섰다. 장애인 당사자로서는 분단 이후 최초로 평양 2회, 개성 1회를 방문하여 북한 장애인의 복지와 환경 개선을 위해 자문했으며, 4차에 걸쳐 총 85억 원 상당의 휠체어, 목발 등 장애인 보장구 및 보조기구와 의약품 등을 전달했다.
2004년에는 ‘밀알’을 통한 국내외적인 오랜 활동들과, 여러 사회봉사 실적들을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상임 고문과 정책자문위원장, 시각장애인 아카데미 회장 등을 맡아 시각장애인을 위한 여러 정책과 교육재료들을 개발했고, 서울시 공익사업 선정위원, 국무총리실 산하 장애인정책조정위원, 평화통일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남북 교류가 가능하던 2003년에는 세계밀알연합 총재로서 북한 장애인 돕기에 나섰다. 장애인 당사자로서는 분단 이후 최초로 평양 2회, 개성 1회를 방문하여 북한 장애인의 복지와 환경 개선을 위해 자문했으며, 4차에 걸쳐 총 85억 원 상당의 휠체어, 목발 등 장애인 보장구 및 보조기구와 의약품 등을 전달했다.
2004년에는 ‘밀알’을 통한 국내외적인 오랜 활동들과, 여러 사회봉사 실적들을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했다.
7. 세계 최초의 시각장애인 대학 총장
20여 년을 재직해온 총신대학교가 2018년이 되면서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총장은 구속되고 재단이사회는 제 기능을 못하고 학생과 교수들은 수업을 중단하고 시위에 나섰다. 마침내 교육부가 기존의 재단이사회를 해체하고 임시이사회 체제를 가동시켰다.
이재서 박사는 그 혼란의 시기에 교수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학교 수습에 나섰다. 학생, 직원, 교수 대표들로 내부대책위를 구성하여 학교의 정상화를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임시이사회가 새로운 총장선출 프로세스를 시작했을 때, 일부 학생들과 다수의 교수들이 이재서 박사에게 총장 후보로 나설 것을 권했다. 그런 주변의 권유에 따라 정년퇴임을 한 달여 남겨둔 2019년 1월 총장 후보로 지원하게 되었다. 모두 11명의 교수 및 외부 인사들이 후보로 나섰다.
총장선출 과정은 그 11명을 대상으로 4개월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총장추천위원회와 재단이사회가 검증과 심사를 하여 투표로 7명, 3명, 2명, 그리고 1명을 선출하는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놀랍게도 이재서 박사는 네 차례 다 1등으로 선택되었고, 마지막 2명에서 한 명을 뽑을 땐 전원이 그에게만 표를 던져서 만장일치로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앞을 전혀 못 보는 시각장애인이 총장으로 선출된 것은 국내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어서 크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재서 박사는 2019년 5월 총장으로 취임하자마자 학교 정상화를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코로나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에 빠진 총신대학을 위해 4년간 전국 293곳의 교회 및 기관을 방문하였고 400여 번의 설교와 강연을 하기도 했다.
시각장애인이기 때문에 총장직 수행을 잘 못 할 것이라는 주변의 우려들이 있었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했다. 임기 동안 난파선이나 다름없었던 학교를 완전히 정상화시켰을 뿐 아니라, 적지 않은 업적들을 남기고 2023년 5월, 4년의 임기를 종료하고 명예롭게 퇴임했다.
이재서 박사는 그 혼란의 시기에 교수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학교 수습에 나섰다. 학생, 직원, 교수 대표들로 내부대책위를 구성하여 학교의 정상화를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임시이사회가 새로운 총장선출 프로세스를 시작했을 때, 일부 학생들과 다수의 교수들이 이재서 박사에게 총장 후보로 나설 것을 권했다. 그런 주변의 권유에 따라 정년퇴임을 한 달여 남겨둔 2019년 1월 총장 후보로 지원하게 되었다. 모두 11명의 교수 및 외부 인사들이 후보로 나섰다.
총장선출 과정은 그 11명을 대상으로 4개월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총장추천위원회와 재단이사회가 검증과 심사를 하여 투표로 7명, 3명, 2명, 그리고 1명을 선출하는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놀랍게도 이재서 박사는 네 차례 다 1등으로 선택되었고, 마지막 2명에서 한 명을 뽑을 땐 전원이 그에게만 표를 던져서 만장일치로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앞을 전혀 못 보는 시각장애인이 총장으로 선출된 것은 국내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어서 크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재서 박사는 2019년 5월 총장으로 취임하자마자 학교 정상화를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코로나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에 빠진 총신대학을 위해 4년간 전국 293곳의 교회 및 기관을 방문하였고 400여 번의 설교와 강연을 하기도 했다.
시각장애인이기 때문에 총장직 수행을 잘 못 할 것이라는 주변의 우려들이 있었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했다. 임기 동안 난파선이나 다름없었던 학교를 완전히 정상화시켰을 뿐 아니라, 적지 않은 업적들을 남기고 2023년 5월, 4년의 임기를 종료하고 명예롭게 퇴임했다.
- 총장 4년 주요 실적
② 제도 및 직제를 과감하게 개편하고 혁신하여 효율적인 학사행정체계와 미래 지향적 교육 기반을 구축했다.
③ 장·단기적인 학교 발전 계획과 글로컬 인재 양성에 부합하는 구체적인 교육 목표 및 세부 이행 절차를 확립시켰다.
④ 학교 사태로 인한 구성원 간의 불신과 갈등을 해소시켜 협력과 화합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⑤ 학교를 위한 재정 모금을 4년간 161억 원, 연평균 40억 원을 모금했으며, 이는 서울 사립대학 총장들의 평균 모금액 20억 원의 두 배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8. 최초
1987. 2 최초 미주 밀알 선교단 개척(필라델피아밀알)1980. 3 시각장애인 성도를 위한 신앙 녹음도서 무료 보급 개시
1981. 2 수어중창단 설립 운영
1981. 2 점자 및 수어의 일반사회에 보급사업, 우리나라 최초의 장애인 및 소외계층 돕기 안내 책자 <사랑의실천운동안내서> 집필 보급, 개신교 교단들의 연합체인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한경직 회장)의 이름으로 5만부를 출간하여 전국 교회에 배포
1982. 3 장애인을 위한 방문상담소 개설 운영(훈련된 상담요원들의 재택방문 상담활동)
1984. 3 우리나라 최초의 장애아동 조기교육시설인 <밀알조기교실> 개원
2003. 3 우리나라 최초 북한 장애인 지원물품 전달(1,2, 3차)
2019. 5 세계 최초 시각장애인 대학 총장
== 생애 ==[1]
숫자로 보는 삶의 파노라마
- 15: 열다섯 살, 어느 푸르던 날에 나는 내 인생의 예기치 않은 암초를 만났다. 눈앞에 희뿌연 안개가 끼는 것 같더니 매일 그 증세는 더 심해졌다. 온갖 아름다운 색깔이 세상을 덧칠할 때 내게는 오직 검은색만 다가왔다. 날이 갈수록 눈앞은 더 캄캄해지고, 나는 영문 모를 어둠 속에서 매일 조금씩 피폐해졌다. 그러나 세상은 내 불행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분주하게 돌아갔다.
- 21:스물한 살, 나는 나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만났다. 여의도 광장에서 빌리 그래함 목사라는 분이 설교한 첫날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예수를 모르고 하나님도 믿지 않았지만 이튿날 호기심으로 그곳에 갔다. 내게 닥친 실명의 불행과 절망이 내 삶의 끝이라고, 나는 99%를 잃었고 이제 고작 남아 있는 것은 1%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그 1%가 숨겨진 가능성의 시작이라고 하나님은 그분을 통해 내게 속삭여주셨다.
- 27:스물일곱 살, 나는 아직은 작지만 선명하게 틔워가는 밀알의 씨앗들을 만났다. 총신대학교 3학년 때, 내가 성경공부를 가르치던 교회 청년들과 함께 장애인선교라는 거룩한 비전을 품고 ‘한국밀알선교단’을 창립하게 되었다.
- 32 :서른두 살, 나는 3년 넘게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드디어 미국 유학의 길과 만났다. 세 번의 인터뷰 만에 겨우 얻어낸 비자는 3개월짜리. 아내와 딸을 둔 가장이자 5년간 꾸준히 성장하는 선교단체의 단장으로서, 내게는 안정된 울타리와 책임이라는 짐이 주어져 있었지만 나 자신과 선교단체의 더 큰 성장을 위해 익숙함을 버리고 모두가 만류하는 새로운 모험을 선택했다.
- 42: 마흔두 살, 나는 쓰디쓴 인내의 열매가 주는 단맛을 보았고 지난 10년의 삶과 만났다. 논문심사가 통과되던 날 “축하합니다. 이재서 박사!”라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지나간 10년을 돌아보았다. 유학 생활은 멀쩡한 사람도 힘든데 눈이 멀어 뭘 제대로 할 수나 있겠느냐는 우려와 비웃음을 뒤로하고 한걸음씩 나아갔던 시간들, 학사와 석사에 이은 박사학위! 그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분, 그리고 내 곁에 함께했던 사람들의 능력이었다.
- 43:마흔세 살, 나는 오래전 꿈꾸던 비전과 만났다. 한국밀알선교단의 세계 지부를 만들겠다는 꿈! 1979년 변변한 선교단체도 하나 없었고 장애인은 손가락질 당하던 시절, “서울에서나 잘하면 다행이지, 세계는 무슨!”이라는 냉소를 들으면서도 나는 국내에서뿐 아니라 세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선교단체의 그림을 그렸었다. 그리고 그 그림은 현실로 내 눈앞에 나타났다. ‘세계밀알’이 출범된 것이다.
- 44:마흔네 살, 나는 배워가는 ‘학생 이재서’에서 배우면서 가르치는 ‘교수 이재서’와 만났다. 모교인 총신대 교수가 된 것이다. 등록금이 없어 총신대학교의 문턱을 넘지 못할 뻔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다시 돌아온 그 대학의 문은 내게 활짝 열려 있었다. 반가운 손님을 맞아주는 것처럼, 아주 기분 좋게.
- 52:쉰두 살, 나는 명예로운 ‘세계밀알’의 얼굴들과 만났다. 그동안 장애인을 섬겨온 밀알 식구들을 대표해서 나는 장애인의 날에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초창기 동역자들부터 중간에 거처간 사람들, 지금도 지속하는 사람들 모두 소중한 밀알들이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섬김이 귀하고 자랑스럽다고 인정해주는 상이라고 생각한다. “세계밀알의 이름을 빛내준 모든 밀알들, 고맙습니다!”
- 56:쉰여섯 살, 나는 오늘도 내게 주어진 1%의 가치와 만났다. 사람들이 멋진 경치에 탄복할 때 정말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그래서 기도를 해본다. “하나님! 잠깐만 보게 해주십시오!” 하지만 내 앞은 여전히 어둠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내 삶을 절망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내 안에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항상 1%의 숨겨진 가능성이 샘솟고 있으니까.
- 21:스물한 살, 나는 나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만났다. 여의도 광장에서 빌리 그래함 목사라는 분이 설교한 첫날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예수를 모르고 하나님도 믿지 않았지만 이튿날 호기심으로 그곳에 갔다. 내게 닥친 실명의 불행과 절망이 내 삶의 끝이라고, 나는 99%를 잃었고 이제 고작 남아 있는 것은 1%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그 1%가 숨겨진 가능성의 시작이라고 하나님은 그분을 통해 내게 속삭여주셨다.
- 27:스물일곱 살, 나는 아직은 작지만 선명하게 틔워가는 밀알의 씨앗들을 만났다. 총신대학교 3학년 때, 내가 성경공부를 가르치던 교회 청년들과 함께 장애인선교라는 거룩한 비전을 품고 ‘한국밀알선교단’을 창립하게 되었다.
- 32 :서른두 살, 나는 3년 넘게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드디어 미국 유학의 길과 만났다. 세 번의 인터뷰 만에 겨우 얻어낸 비자는 3개월짜리. 아내와 딸을 둔 가장이자 5년간 꾸준히 성장하는 선교단체의 단장으로서, 내게는 안정된 울타리와 책임이라는 짐이 주어져 있었지만 나 자신과 선교단체의 더 큰 성장을 위해 익숙함을 버리고 모두가 만류하는 새로운 모험을 선택했다.
- 42: 마흔두 살, 나는 쓰디쓴 인내의 열매가 주는 단맛을 보았고 지난 10년의 삶과 만났다. 논문심사가 통과되던 날 “축하합니다. 이재서 박사!”라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지나간 10년을 돌아보았다. 유학 생활은 멀쩡한 사람도 힘든데 눈이 멀어 뭘 제대로 할 수나 있겠느냐는 우려와 비웃음을 뒤로하고 한걸음씩 나아갔던 시간들, 학사와 석사에 이은 박사학위! 그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분, 그리고 내 곁에 함께했던 사람들의 능력이었다.
- 43:마흔세 살, 나는 오래전 꿈꾸던 비전과 만났다. 한국밀알선교단의 세계 지부를 만들겠다는 꿈! 1979년 변변한 선교단체도 하나 없었고 장애인은 손가락질 당하던 시절, “서울에서나 잘하면 다행이지, 세계는 무슨!”이라는 냉소를 들으면서도 나는 국내에서뿐 아니라 세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선교단체의 그림을 그렸었다. 그리고 그 그림은 현실로 내 눈앞에 나타났다. ‘세계밀알’이 출범된 것이다.
- 44:마흔네 살, 나는 배워가는 ‘학생 이재서’에서 배우면서 가르치는 ‘교수 이재서’와 만났다. 모교인 총신대 교수가 된 것이다. 등록금이 없어 총신대학교의 문턱을 넘지 못할 뻔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다시 돌아온 그 대학의 문은 내게 활짝 열려 있었다. 반가운 손님을 맞아주는 것처럼, 아주 기분 좋게.
- 52:쉰두 살, 나는 명예로운 ‘세계밀알’의 얼굴들과 만났다. 그동안 장애인을 섬겨온 밀알 식구들을 대표해서 나는 장애인의 날에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초창기 동역자들부터 중간에 거처간 사람들, 지금도 지속하는 사람들 모두 소중한 밀알들이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섬김이 귀하고 자랑스럽다고 인정해주는 상이라고 생각한다. “세계밀알의 이름을 빛내준 모든 밀알들, 고맙습니다!”
- 56:쉰여섯 살, 나는 오늘도 내게 주어진 1%의 가치와 만났다. 사람들이 멋진 경치에 탄복할 때 정말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그래서 기도를 해본다. “하나님! 잠깐만 보게 해주십시오!” 하지만 내 앞은 여전히 어둠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내 삶을 절망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내 안에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항상 1%의 숨겨진 가능성이 샘솟고 있으니까.
… 다음에는 어떤 만남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여기까지 내게 남은 1%의 가치 책에서)
- 65: 예순 다섯 살, 나는 나의 목표와는 다르게 총신대학교 총장이 되었다.(편집자주)
9. 경력
대학
1994. 9 ~ 1995. 12 총신대학교 신학과 시간강사
1995. 3 ~ 1995. 12 성균관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시간강사
1996. 3 ~ 1997. 2 총신대학교 신학과 전임강사대우
1997. 3 ~ 2001. 2 총신대학교 신학과 조교수
2001. 3 ~ 2002. 2 총신대학교 신학과 부교수
2001. 12 ~ 2004. 2 총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 학과장
2002. 3 ~ 2011. 2 총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 부교수
2010. 3 ~ 2011. 1 총신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 사회복지대학원 원장
2011. 3 ~ 2019. 2 총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정교수
2019. 3 ~ 현재 총신대학교 명예교수
2019. 5 ~ 2023. 5 총신대학교 총장
교회사역
1975. 2 ~ 1977. 1 전남순천시 황전면 회덕교회 중고등부 담당 교사
1979. 3 ~ 1980. 12 서울 신용산교회 고등부 교사
1979. 3 ~ 1979. 12 서울 대흥제일교회 청년부 교사
1985. 3 ~ 1986. 12 미국필라델피아 삼일장로교회 청년부 담당 전도사
2004. 1 ~ 2005. 12 서울 예손교회 협동목사
2006. 1 ~ 2012. 12 수원 창훈대교회 협동목사
2016. 1 ~ 현재 서울 삼광교회 협동목사
밀알사역
1979. 10 ~ 1988. 8 한국밀알선교단 초대 단장
1987. 2 ~ 1996. 7 미주밀알선교단 단장
1992. 6. 8 미주지역 밀알지부들의 연합체인 미주밀알선교단을 설립하여 연방정부에 등록 완료
1995. 3 ~ 현재 사단법인 세계밀알연합 총재
2007. 3 ~ 현재 사회복지법인 세석밀알 대표이사
사회봉사
2001. 6 총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 및 사회복지대학원 직접 개설
2002. 11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총회 사회복지재단 직접 설립
2000. 2 ~ 2004. 2 한국시각장애인아카데미 회장
2002. 3 ~ 2003. 12 서울시공무원교육원 강사
2002. 11 ~ 2017. 2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사회복지재단 이사
2003. 3. 22 ~ 26 1차 북한방문(평양) 및 1차 물품지원 / 의향서체결 및 장애인시설시찰, 지원물품 전달 (5천만 원 상당)
2003. 11. 4 ~ 9 2차 북한방문(평양) 및 2차 물품지원 / 장애인시설시찰 및 지원물품 전달 (24억 5천만 원 상당)
2004. 9. 22 3차 북한장애인 물품지원 / 의약품 지원(휠체어 및 장애인 재활용품과 항생제 등 의약품 21억 원 상당)
2004. 6 ~ 2006. 6 (사) 백범정신실천겨레연합 상임공동대표
2004. 6 ~ 2008. 6 서울특별시 공익사업선정위원회 위원
2005. 6 ~ 2007. 6 민주평화통일 자문위원회 위원
2005. 11. 2 4차 북한장애인 물품지원 / 장애인 물품 지원(휠체어 및 장애인 재활용품과 항생제 등 의약품 40억 원 상당)
2007. 9. 6 3차 북한방문(개성) / 장애인직업훈련센터 설립합의
2011. 2 ~ 2014. 12 (사)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상임고문
2014. 3 ~ 2017. 3 정부 장애인정책조정위원회 위원
2015 ~ 현재 (사)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중앙회 정책자문위원장
10. 저서
1984. 4 사랑의 실천운동 안내서 /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2005. 1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편저) / CLC기독교 문서선교회
2005. 4 아름다움은 마음의 눈으로 보인다 /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2006. 12 사회봉사의 성서신학적 이해 / 도서출판 세계밀알
2007. 7 담장 밖에 울고 계신 예수님 / 도서출판 세계밀알
2007. 7 밀알이야기 / 도서출판 세계밀알
2008. 10 내게 남은 1%의 가치 / 토기장이
2009. 4 신학으로 이해하는 장애인(편저) / 도서출판 세계밀알
2013. 7 성경과 장애인(편저) / 도서출판 세계밀알
2013. 10 기독교사회복지의 근원 / 도서출판 세계밀알
2015. 10 하나님 나라와 장애인(편저) / 도서출판 세계밀알
2018. 7 장애인사역의 신학적 의의(편저) / 도서출판 세계밀알
11. 수상
2004. 4 국민훈장 목련장 [기관 : 정부][2]2009. 6 백범봉사상 [기관 : (사)백범정신실천겨레연합]
2019.11 자랑스러운 한국장애인상 [기관 : 자랑스러운한국장애인상위원회]
2020. 10 제 41회 흰지팡이의 날 기념 전국시각장애인 복지대회, 공로대상 [기관: 사단법인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