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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04 20:16:38

이승만(검은머리 미군 대원수)

1. 개요2. 작중 행적3. 평가4. 기타

1. 개요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의 등장인물.

원 역사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인 이승만에서 모티브를 따온 인물이다.

2. 작중 행적

김유진이 처음으로 만나게 된 역사적인 인물1. 미래인인 유진의 해박한 식견에 감탄해 외교관과 상대하는 것 같다는 감상을 남겼다. 자신의 외교독립론을 설파해서 잠깐 박용만과 말싸움이 붙었지만, 유진이 둘의 의견을 절충시켜 자신이 웨스트포인트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 요청하자 자신의 인맥으로 웨스트포인트 입학 추천서를 받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유진의 계획대로라면 일본이 패망하는데 30년이 걸릴 거라 자신들이 살아서 보기는 힘들 거라 수다를 떨었는데, 박용만과 달리 유진의 정치적 소양을 간파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목줄을 채워서 장기말로 쓰려고 이런저런 공작을 했지만, 유진이 몇몇 행운과 본인의 능력, 미래 치트를 이용해서 피하는데 성공하고 오히려 미국에서 지위를 다진 뒤 이승만을 치워버리려고 했다. 커티스 상원의원의 딸과 혼인하고 미국 재벌인 헨리 포드와 협업관계가 된 이후에는 이승만에게 나에게 빨갱이 소리 듣는 사람(쑨원)의 관계자를 소개시키려 하다니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이승만을 비꼬자 유진의 멱살을 잡으며 박용만에게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았지만 이 녀석은 없는 나라도 팔 놈[1]이라고 비난했다가 커티스 의원의 축객령에 물러나고 만다. 그 과정에서 유진의 부친 김상준과도 원수가 됐지만, 김상준도 그의 애국심은 인정하고 있었기에 해방 후에 자연스럽게 응어리를 해소했다.

유진이 공화당 중진 사위에 전쟁영웅까지 되면서 힘의 격차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결국 패배를 인정하게 되고 유진한테 숙청당할 것이라는 공포에 휩쌓여 제발 목숨만 살려달라며 애걸복걸했다. 실제로 유진은 이승만의 권력욕과 암살을 포함한 권모술수 능력을 경계하고 있어서 여차하면 그냥 태평양에 담가버리려고 했고, 이승만은 유진을 초면부터 군인보다 정치인에 가까운 사람이라 바로 알아봤기 때문에 이런 결말을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이후 유진의 지시로 우드로 윌슨의 비선실세 의혹을 폭로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건너가 유진의 후광을 등에 업고 임시정부를 장악한다. 이승만에게 프린스턴 대 박사 학위를 수여한 사람이 바로 우드로 윌슨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폭로였는데, 아예 무관계한 사람이, 그것도 동양인이 폭로를 했다고 하면 헛소문으로 일축될 수 있었을 것이다. 유진은 이런 내부고발자가 좋은 대우를 받는 건 힘들 텐데 얼마나 잘할 수 있겠냐 생각하면서도, 갈 때 돈도 꽤 쥐어줬고 이승만의 말싸움 능력이라면 충분히 임정 내에서 자리를 다질 수 있을 것이며 여차하면 다른 사람을 내세우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이승만이 이런 쪽으로는 말이 통하기 때문에 자신의 선을 안 넘는 게 본인에게 제일 편하다고.

이후 임정에서 유진의 대변인으로 실력양성론을 내세워서 장기 집권에 성공하면서 어느 의미로는 원 역사보다 훨씬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원 역사의 이승만과 같이 처음에는 실력을 배제한 외교독립론을 주장했었지만,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에도 독립 못한 자신들을 포함한 다른 사례를 예시로 들면서 독립에 필요한 외교력의 확보를 위해서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논리로 전환하면서 본인의 입지를 잃지 않으면서도 실력양성론이 주류이던 임정의 주요 인물들을 설득할 수 있었고, 유진 킴이 자신을 후원해준다는 배경에 힘입어 임정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이후 언급을 보면 유진 킴이 만든 일제 첩보망과 내부공작 쪽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으며, 극성 좌익계가 아닌 독립운동가들은 대체로 유진의 1940년대 일제 몰락 작전에 동의한 편이었던 걸로 보인다. 임시정부의 세가 커진 덕분에 원 역사보다 훨씬 많은 조직들이 임시정부 아래에 모였으며, 갈등을 빚던 몇몇 좌익 세력들은 숙청당하거나 쫓겨났다고 한다.

임시정부에서 좌익 세력을 쫓아내거나 존버 전략 때문에 반발을 한 독립운동가들도 여럿 있기는 했지만 김가의 엄청난 후원 덕분에 전차 연대만 2개일 정도로 병력을 크게 확충하는데 성공했고, 당시 여운형 같은 온건파가 아닌 소련파나 연안파는 소련과 중공 스파이 노릇도 하고 있던지라 김구를 시켜 이들을 견제한 태도가 크게 잘못된 건 아니었다. 방심하다 털리는 건 한 번이면 족하다며 각 잡고 정치질을 했다고 하는데, 아무리 김가의 후원이 있었다지만 20년 넘게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독립운동가들을 임정 아래 묶는데 성공한 걸 보면 이 양반이 여간내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김유진과의 오랜 유착 때문에 김유진과 척치기보다는 서로 이용하는 쪽으로 머물고 있었고, 오히려 냉혈 자본가였던 최대 물주인 김유신에게 더 쩔쩔맸다. 임시정부에서 쫓아낸 박헌영이 조선에 밀입국하려는 걸 알게 되자 김구를 시켜 태국에서 암살했는데 몇 년이 지나고도 조선 공산당이 몰랐던 걸 보아 조직의 규모가 커진 만큼 원 역사보다 정보력도 훨씬 뛰어났던 모양이다. 덤으로 김일성은 간도특설대에게 마적 두목으로 사살당해서 이승만이 손쓸 필요도 없었다.

중일전쟁 당시에는 유진의 꼬드김에 넘어가 중국으로 부임한 휴 드럼과도 잘 유착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드럼을 이용해 임시정부의 지휘권을 일원화시키고 유진에게 받은 전차 2개 연대를 사천 전역에서 비장의 수로 숨겨놓았다가 무타구치 렌야의 삽질로 검각을 넘어 돌격한(...) 대규모의 일본군을 전차로 격퇴하며 공을 세우는데 성공한다.

이후 국내 좌익 세력과 손잡고 임정의 공작원들을 파견해 경성 탈환에도 조력했다. 원래 유진과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조선 왕조의 적통으로 인정받아 대한민국을 건국하려 했지만, 영국과 프랑스 같은 제국주의 국가들 문제와 양자대전으로 독립한 국가들의 혼란상 때문에 국내 동발 유학생들이 모여 만든 싱크탱크까지 합쳐 논의한 끝에 유진이 한반도를 탈환해 유진을 중심으로 한 미군정을 잠깐 만들고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일본에 대공습을 퍼붓던 당시, 미국 정계가 1942년 중간 선거 문제로 혼란스러워지자 다른 임시정부 요인들과 달리 D.C로 향해 외교관 노릇을 했는데 공화당의 파이프는 김가가 맥아더를 통해 꽉 쥐고 있었고 김유신이 유대인 자본가들을 설득하는 동안 이승만은 개신교도라는 점을 이용해 딕시크랫의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에게 접근해서 성과를 봤다.

윌슨 건은 20년도 더 전이고 자업자득으로 몰락한 거라 큰 지장이 안 되었고, 딕시크랫이 인종주의자로 악명 높기는 하지만 동시에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이기도 해서 일제의 원시적인 천황 숭배 강요에 맞서 동방의 예루살렘을 만들고자 개신교 신앙을 고수했다는 주장이 꽤 먹혔다고 한다. 한반도가 당시부터 동양에서 가장 개신교도가 많은 편이었던 건 사실이다.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렸을 정도.[2]

이 과정에서 처칠이 블러핑하려고 내건 한반도 4개국 신탁통치 제안을 월레스가 덥석 받아들였다는 정보를 딕시크랫 중진에게 듣자 오히려 '이겼다'고 판단해 유진에게 이를 알린다. 월레스의 내력도 꽤 꼼꼼하게 조사해서 유진에게 월레스는 정치 경험이 전혀 없어 뭘 모르는 먹물쟁이 같은 소리를 하는 거라며 정면에 들이받아 말을 듣게 만들고, 그러고도 안 들으면 윌슨 때처럼 날려버리라고 조언해 유진이 윌슨을 정면에서 찍어내려 일본 본토 상륙과 신탁통치를 물리게 만들기도 했다.

한반도가 확실히 해방된 뒤 동발 유학생들을 데리고 임정 인사 중 제일 마지막으로 귀국해 잠시 건국준비위원회의 일원으로 참석해 김원봉의 바로 옆자리에 앉으며 신경전을 벌였다.

제헌 선거 당시에는 노동당에 동족상잔을 바라는 무리가 너무 많다며 탈당한 중도좌파 인사인 조봉암을 러닝메이트로 삼아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고 노동당 내란음모 사건 때 여운형이 중상을 입고 부랴부랴 사회민주당을 분당시키는 혼란이 있던 덕분에 초대 대통령이 되는데 성공했다. 제헌 선거 당시에는 미국에서 돈 좀 끌어왔는지 이승만이 만든 한국독립당은 제헌 선거 당시 제일 자금 여유가 많은 당 중 하나였다고 한다.[3]

그놈의 권력욕은 여전해서 장기집권을 할 꿍꿍이를 가졌지만, 해방 초기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데다 유진 또한 그의 장기집권을 경계했기 때문에 결국 2선을 끝으로 퇴임하며 정권을 내주었다.

3대 대선 당시에는 이승만의 한국독립당이 호남과 호서를 텃밭으로 삼는데 성공했고, 영남을 기반으로 한 사민주의 정당인 사회민주당이 캐스팅보트인 수도권과 강원도에서 승리해 여운형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한다. 여운형이 좌익이라는 걸 싫어한 CIA가 쿠데타를 계획했다 유진에게 대판 까이고 여운형이 정권 잡게 놔뒀으며 곧바로 줄을 갈아타서 한국독립당이 미국 정부에게 불만을 가졌다는 언급이 있다.

이승만이 선을 지켜 물러난 덕분에 한국독립당은 1960년대에도 호남과 호서를 기반으로 한 보수주의 정당으로 1, 2위를 다툴 정도의 세를 자랑하며 본작에서는 김대중이 1964년 대선에서 한국독립당 대선후보로 등장해 이승만과 김유진의 정신을 본받자(!)고 선거하는 모습이 나온다.[4]

원 역사와 정반대 구도라서 놀랍긴 하지만 원 역사에서도 해방 직후 정치 성향은 이랬기 때문에 통일 한국과 중국 분할로 성향이 그대로 내려왔다고 보면 되며, 본작에서도 1964년 대선 때 40대 기수론을 외치며 한 공약을 보면 원 역사와 크게 달라진 것도 아니다. 다만 좌익 정당 소속 독립운동가 박정희와 우익 정당 소속 쁘띠부르주아[5] 김대중의 구도라서 원 역사를 아는 독자들이 뿜었을 뿐.

3. 평가

원 역사에서 부정적 평가를 받게 된 요소들이 유진의 개입으로 거의 다 없어진 덕분에 작중 이승만은 거의 무결점의 독립운동가에, 전승 대통령에, 결정적으로 신생 대한민국에서 임기를 지키고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룬 선례를 만드는 업적만이 남게 되어, 이래저래 개변된 역사의 큰 수혜자가 되었다.

경제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했다는 흠은 있었으나 식민지 시기에 극심한 수탈을 당해 만신창이가 된 한국의 경제 사정을 고작 8년의 임기만으로는 뭘 어떻게 할 수 없었다는 것이 정론이었기에 참작의 여지는 있다는 평. 이것도 본편 이승만 시절에 경제 발전 돌리는 연출이 박정희의 경제 개발 정책과 유사하다는 암시가 있기 때문에 원 역사처럼 경제 구조를 망가뜨리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해당 세계에서는 진정 국부라고 할만한 위인이 되었는데, 어떻게 보면 유진이 사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한 보답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유진도 이승만과 한편을 맺고 나서는 개인적으로 다소 꺼리는 것과 별개로 나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실존인물의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만큼 등장할 때마다 댓글창에 지저분한 병림픽이 열렸으나, 그와 별개로 본작에서는 독립에 대한 열망, 애국심, 권력욕, 냉정한 현실 파악, 뛰어난 외교력과 정치력이 복잡하게 뒤섞인 입체적인 캐릭터로 그려졌다.

특유의 정치력과 외교력 때문에 유진과 정치외교적인 측면에서는 가장 말이 잘 통하는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4. 기타

담배 냄새를 아주 싫어해서 박용만이 담배 피우는 걸 보고 바로 창문을 열면서 담배 피우면 몸만 망친다고 말싸움하기도 했다.

원 역사와 달리 1919년에 중국으로 가서 1942년에 잠깐 D.C로 갔던지라 1934년에 중혼한 후처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했는지는 불명이다.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과 혼인했을 수도 있다.

임시정부 시절 다른 독립운동가들보다 사치스럽게 산다고 욕을 먹었다고 한다. 이승만 본인의 말에 따르면 유럽-북미의 상류층 사교계에서는 조금이라도 값이 떨어지는 옷이나 장신구, 화장 등이 보이면 사람 취급도 안 하기 때문에 서양인을 주로 상대하는 입장에서 품위 유지 차원이라 무시했다고.[6]

이승만이 워낙 나이가 많아서 사고방식이 구시대적인 것과 별개로[7]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 구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이해하고 있었는지 월리스 대통령이 왜 정치력이 그렇게 떨어지는지 제대로 간파하고 있었다. 김유진조차 이승만에게 설명을 듣고 나서야 이해했을 정도.


[1] 본래 신채호가 이승만을 비판했을 때 한 말로 유명한데 여기서는 이승만이 쓴 게 웃음 포인트다.[2] 실제로는 천도교가 좀 더 강세였지만, 당시 평양에서 교회 종탑 소리가 많이 들렸다는 일화를 보면 성당과 교회가 많기는 했던 모양이다.[3] 그 외에는 호남과 호서의 지주들이 창당한 한국민주당이 있는데, 한국민주당은 이후 등장하지 않으며 호남과 호서에서 한국독립당이 세를 굳혔다는 것으로 보아 합당했을 가능성이 높다.[4] 제헌 선거 당시에는 원 역사 김대중이 처음 속했던 호서 지주들의 정당인 한국민주당이 있었는데, 본편에서 김대중이 처음 등장할 당시 한국독립당 초선 국회의원으로 나온 걸 보아 둘이 합당한 모양이다.[5] 원 역사 김대중의 아버지가 일제 시절 면장을 한 적이 있고 축첩을 할 수 있어 처음에는 서자로 태어났다 적자가 되었으니 자기 동네에서는 나름 유복했을 것이며, 김대중이 젊은 시절 사업가로 벌어들인 돈을 기반으로 젊은 나이에 정계에 입문한 것을 고려하면 거제도 거부의 아들이었던 김영삼만큼은 아니지만 소지주-쁘띠부르주아 출신에 속한다.[6] 이승만의 성격 문제와 별개로 저 말은 사실인데, 중세 시절부터 귀족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덜 꾸미면 엄청난 이지메에 시달려서 파티장에서 사람을 상대할 때는 거액의 빚을 져서라도 있어 보이게 꾸미는 풍습이 있었다.[7] 대체역사소설 고종, 군밤의 왕에서 1895년 을미정난 때 이미 20세의 성인으로 징병되어 참전하는 장면이 있다. 1940년대 후반~1960년에 대통령이었던 사람이 19세기에 이미 성인이었던 것이다. 1911년이 배경인 본편 첫 등장 당시에도 36세라서 독립에 30년 걸릴 거라는 말을 유진에게 듣고 나이에 부담을 느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