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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12-13 21:21:08

이문길

{{{#white 이문길(李文吉)
호(號) 화봉(花峰)}}}
시조(始祖) 이신우(李申佑)
관향 원주(原州)
출생 명종 6년 1551년
사망 광해 14년 1622년10월1일
관직 증(贈)통정대부(通政大夫)
예조참의(禮曹參議)
배(配) 숙부인(淑夫人)해남윤씨(海南尹氏)
슬하 1남 3녀
1. 개요2. 일생3. 상훈과 추모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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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름은 이문길(李文吉)이며 호(號)는 화봉(花峰)이다.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 이영화(李英華)의 현손(玄孫)이고, 증(贈)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 이원찬(李元纘)의 아들이다.

2. 일생

이문길(李文吉)은 아버지 이원찬(李元纘)과 어머니 선인(宣人) 동복오씨(同福吳氏) 정랑(正郞) 윤사충(尹士忠)의 따님 사이에서 2남 중 첫째 아들로 1551년(辛亥) 명종(明宗 6년)에 태어났다.
문길(文吉)은 어려서부터 울며 보채는 일이 없었고 3.4세 때에는 남이 음식을 주면 반드시 부모님에게 드렸다, 밖에 나가 놀 때 대소변을 보면 반드시 구덩이를 파고 누고 나서 묻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면 “만약 이 더러운 것을 남이 보면 그 욕이 부모님에게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5살에 글을 배우는데 한 글자라도 그 뜻을 알고 나서야 그 다음을 배웠다, 무리지어 노는 아이들을 따르지 아니하여 글자를 쓸 때는 미리 여러 모를 생각하고 나서 바르게 쓰곤 했다. 7살에 소학(小學)을 배우는데 오늘 한 가지를 배우면 다음 날에는 반드시 배운 대로 도리(道理)에 맞게 행실(行實)을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무릇 자식된 자는 마땅히 부모를 성심(聖心)으로 섬긴 다음에 남은 힘으로 글을 배울지어다.”라고 하였다.
어느 날 부모를 위해 강(江)에서 물고기를 잡는데 때는 겨울인지라 얼음이 얼어 있었다. 한 어부(漁夫)가 고기 잡은지가 한 달이 넘는다고 일러 주어도 문길(文吉)은 아랑곳하지 않고 얼음을 깨고 고기를 잡으려 했으나 의욕과는 달리 고기가 잡히지 않자 돌아오려는데 한자(尺)가 넘는 고기 두 마리가 얼음 위로 튀어나와 있으므로 잡아서 집에 돌아오려는데 추위가 뼈에 스며 그만 얼음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마치 그때 한 갯마을 사람이 낮잠을 자는데 꿈에 도포를 입은 늙은이가 다 죽어가는 한 사람을 부축하면서 “네가 어찌 이효자(李孝子)를 구하지 않느냐?”고 큰 소리로 꾸짖으니 그 소리에 놀라 깨어 꿈에 보이던 곳을 달려가 보니 과연 한 사람이 손에 두 마리의 고기를 쥔 채로 거의 죽어 가는지라 바로 업어다가 몸을 녹이고 미음과 약으로 회생(回生)시켰다.
한번은 아버지가 병에 걸렸을 때 의원(醫員)이“돼지의 쓸개를 먹어야 병(病)이 낫는다.”하였다.
그 시절은 돼지는 관부(官府)가 아니면 사사로이 기르지 못하던 때인지라 돼지를 구하지 못하고 있는데 뜻밖에 산돼지가 울안에 뛰어들어 여기서 쓸개를 얻어 신효(神效)를 거두었다. 이런 것들이 타고난 지극한 효성이 천지신명(天地神明)을 감동케 한 것이다.
문길(文吉)은 부모상(父母喪)을 당해서는 몸이 야윌 정도로 슬픔에 겨워하며 3년 상을 치렀고, 상복(喪服)을 벗은 뒤에도 미주(米酒)와 진미(珍味)를 먹지 않았다.
선조(宣祖)가 승하(昇遐)했을 때와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상(喪)에도 부모와 같은 상례(喪禮)를 다 하였고, 스승님의 상(喪)에도 심상(心喪) 3년을 다 하였다.
나라에서 이문길의 효행(孝行)을 듣고 영릉참봉(英陵參奉)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마을 동산에 애일암(愛日菴)을 지어 은거(隱居)하며 화봉집(花峰集) 4권과 애일암기(愛日菴記) 2권을 저술(著述)하였는데 이 글을 읽어본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현대판(現代版) 소학(小學)이라”하였다.
홍무년간(洪武年間)에 칡 고깔을 쓴 늙은 중(스님)이 선은산(仙殷山)에 올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더니 나무꾼에게 말하기를 “이 산 아래 9대 정승(政丞)이 나올 명당(明堂)이 있는데 만약 술좌(戌坐)로 하면 빨리 3세(世)에 걸쳐 충효(忠孝)가 나올 것이고 18대(代)가 되면 반드시 동양에 이름 높은 큰 학자(學者)가 나올 것이다.”고 하거늘 나무꾼이 이름을 물은즉 웃으면서“無雨之務 有與之子”라 이를 풀이하면 무학대사(無學大師)라 한다. 문길(文吉)의 어머니 동복오씨(同福吳氏)의 무덤이 그 산 초미동(草尾洞) 술좌(戌坐)이니 3세(世) 충효(忠孝)는 말은 맞으나 동양의 큰 학자가 나온다는 말은 아직 모를 일이다. 이 마을은 해남군 화산면 안정리 안증촌(顔曾村)인데 해남읍지(海南邑誌) 명당록(明堂錄)에 쓰여있다.
사후(死後)에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추증(追贈)되었다.

3. 상훈과 추모

이문길과 더불어 아들 이광일, 손자 이신언도 대를 이어 효행이 지극하자 1714년(숙종 40) 조정에서는 이문길에게 예조참의, 이광일에게 호조정랑, 이신언에게 통정대부를 증직하고, 출생지인 화산면 탄동리에 원주이씨삼효문(原州李氏三孝門)이라는 정각을 하사하였다.
1926년 후손들이 마산면 화내리 영산사(英山祠) 아래편으로 이건하였다.
비각(碑閣)은 정면 3칸의 맞배지붕 형태이며, 비(碑)는 높이 115㎝, 너비 35㎝, 폭 15㎝로 세 개가 있다.
비명(碑銘)은 “증통정대부예조참의충효원주이문길지비(贈通政大夫禮曺參議忠孝原州李文吉之碑)”, “증통선호조정랑효자원주이광일지비(贈通善戶曹正郞孝子原州李光一之碑)”, “증통정대부충효원주이신신지비(贈通政大夫忠孝原州李愼信之碑)”라고 적혀 있다.
파일:원주이씨삼효문.jpg

4. 참고문헌

원주이씨대동보(1991년)
여지도서(輿地圖書)
문화유적분포지도-해남군(전라남도 해남군·목포대학교박물관, 2002)
우리마을의삶과문화편찬위원회, 『우리 마을의 삶과 문화』상(해남문화원, 2011)
해남군지 중(해남군지편찬위원회, 2015)
해남군지 하(해남군지편찬위원회, 2015)
해남읍지(명당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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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이씨대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