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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3년 |
조선 | |
사망 | 1955년 (향년 62세) |
대한민국 | |
본관 | 해평 윤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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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1] 출신 정치인. 그의 아버지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유명한 윤택영이다.2. 생애
2.1. 해방 전
해풍부원군을 지낸 친일반민족행위자인 윤택영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와 다르게 독립운동을 했다.1918년 6월 민족자결주의가 미국에서 발표된 후, 그는 신익희, 나경섭과 같은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모의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최남선의 부탁을 받고 윤용구에게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지만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면서 체포되어 취조를 받았다. 그래도 그는 일본의 압박에도 순정효황후로 부터 10만원을 받고 신익희에게 상해 임시정부 설립 자금에 보태게 했다.
1922년 자녀들을 서울에 남겨두고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뉴욕에서 그는 장덕수와 같이 친이승만 계열의 뉴욕 한인 유학생들이 창간한 3.1신보의 발기인과 3.1신보 영업부 직원을 지냈다. 그러다가 대학에 진학, 오리건 주립대학교 신문학과 학사,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을 거쳐 1935년 아메리칸 대학교에서 국제정치와 비교헌법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5년 11월 귀국 후 흥업구락부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일제가 참의원 의원직을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윤홍섭은 이를 거부하고 어렵게 생활했다.
2.2. 해방 후
해방 후, 9월 한국민주당이 창당되자 한민당 창당 발기인과 심사부원을 지내는 정치 생활을 시작했다. 이어 구 왕궁청 사무장관, 숙명학원 이사장, 국제법급 외교연구회 이사 등을 지내고 한민당을 탈당하여 대동청년당 상무이사 등을 지냈다. 이후 1955년 그는 사망했다.3. 여담
- 아버지는 앞서 말했듯 친일반민족 행위자 윤택영이고 마찬가지로 백부도 친일반민족 행위자인 윤덕영이다.[2]
- 해방 후, 신익희는 정치 활동으로 힘들 때마다 윤홍섭을 찾아가 같이 술을 마셨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