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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11-03 17:40:54

윤양하(1908)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윤익하(尹益夏), 윤분하(尹盆夏)
일심(一心)
본관 해남 윤씨[1]
출생 1908년 2월 12일
전라남도 강진군 보암면 항촌리
(現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항촌리[2] 579번지[3])
사망 1980년 4월 17일
전라남도 강진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513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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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윤장은 장조카이다.

2. 생애

1908년 2월 12일 전라남도 강진군 보암면 항촌리(現 강진군 도암면 항촌리 579번지)에서 아버지 윤정식(尹廷植, 1873. 7. 3 ~ 1949. 1. 9)과 어머니 전주 이씨(1873. 7. 22 ~ 1931. 3. 19)[4] 사이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강진군 도암면 항촌리 580번지[5]이주했다.

광주농업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9년 6월, 조길룡·김남철(金南哲) 등 광주농업학교에 다니던 20여명의 학우들과 함께 광주군 석곡면 금곡리(現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무등산에 모여 '독서회 중앙본부'의 하부조직으로 항일 학생비밀결사인 광주농업학교 독서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전 독서회원을 4개 반으로 나누어 각 반별로 연구활동을 하며 항일의식을 길러 나갔다.

그는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하였으며, 11월 12일 2차 시위에 최정기·박병선(朴柄善)·임병욱(林炳旭) 등과 함께 광주농업학교 학생 시위대열의 앞장에 서서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이로 인하여 학교 당국으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고, 귀향한 뒤에는 도암면사무소 서기로 근무했다.

그러나 곧 광주농업학교 독서회와 관련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30년 7월 1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등의 혐의로 광주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다. 그리고 10월 18일 광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형(미결 구류일수 중 3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았고, 이에 공소하여 두 차례 구류갱신이 이뤄졌으며,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일부 감형된 징역 1년형(재판 미결 구류일수 중 365일 본형에 산입, 법정 미결구류 통산 4일)을 선고받아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서훈되었고, 1980년 4월 17일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별세했다.

사후 1990년 12월 16일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95년 11월 15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1] 참봉공파(參奉公派) 26세 하(夏) 항렬.[2] 인근의 만덕리·지석리와 함께 해남 윤씨 집성촌이다.[3] 1915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이 지번의 필지는 1915년 당시 윤양하의 5촌 당숙(堂叔) 윤정원(尹廷元, 1866. 11. 4 ~ 1953. 11. 14)의 소유였다. 579-1번지는 1974년 12월 31일 윤정원의 장현손자 윤태규(尹泰圭, 1964. 12. 1 ~ )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579-2번지는 1970년 6월 15일 윤양하와 16촌 지간의 족손(族孫) 윤형현(尹馨鉉, 1916. 11. 28 ~ 1992. 5. 16)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가 1995년 5월 23일 윤형현의 아내 원주 이씨 이경임(1919. 6. 25 ~ 2013. 4. 9)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이후 2012년 2월 9일 윤형현의 장손녀 윤채연(尹棌姸, 1974. 12. 22 ~ )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어 현재에 이른다. 579-3번지는 1973년 12월 31일 윤태규의 누나 윤원경(尹源卿, 1963. 12. 22 ~ )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가 1983년 9월 1일 강진군에 소유권이 이전되어 현재에 이른다. 579-4번지는 1970년 6월 15일 윤형현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가 1985년 12월 19일 강진군에 소유권이 이전되어 현재에 이른다.[4] 효령대군의 후손으로, 이은의(李殷儀)의 딸이다.[5] 1915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이 지번의 필지는 1915년 당시 윤양하의 아버지 윤정식(尹廷植, 1873. 7. 3 ~ 1949. 1. 9)의 소유였다. 이후 1970년 6월 15일 윤양하와 16촌 지간의 족손(族孫) 윤형현(尹馨鉉, 1916. 11. 28 ~ 1992. 5. 16)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가 1995년 5월 23일 윤형현의 아내 원주 이씨 이경임(1919. 6. 25 ~ 2013. 4. 9)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2011년 5월 19일에는 윤형현의 장손녀 윤채연(尹棌姸, 1974. 12. 22 ~ )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어 현재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