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韋玄貞(? ~ 684)
중국 당나라의 외척. 당나라의 제4대 황제 중종의 황후인 위황후의 부친이다.
2. 생애
옹주(雍州) 만년현(萬年縣)을 본관으로 하는 경조 위씨(京兆韋氏) 부마파(駙馬派) 출신이다. 위현정은 위홍표(韋弘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처음 벼슬을 보주(普州) 참군으로 시작하였다. 680년 고종의 태자로 아들 이현이 책봉되었고, 위현정은 자신의 딸을 이현에게 시집보내면서 이현의 장인이 되었다.683년 고종이 세상을 떠나고 태자 이현이 황제로 즉위하였다. 중종의 황후가 된 위씨는 집안을 일으키기 위하여 중종에게 계속 청탁을 넣었고, 위현정은 보주 참군에서 예주 자사로 발탁되었다. 여기서 위현정의 최초 관직인 보주 참군은 종8품이며, 예주 자사는 정4품이므로 그야말로 초고속 승진이었다. 위씨의 수작은 계속되어, 중종은 위현정을 시중(정2품)으로 내정하려고 하였다. 위현정을 황제의 장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초고속 승진시키려는 중종의 행태에 배염이 반대하고 나서자, 중종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서 배염의 반발을 무릅쓰려고 하였다.
짐이 천하를 전부 위현정에게 준다고 해도 안된다 할 것인가? 시중이라는 자리가 그렇게 아까운가?
황후가 부탁했고 장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시중이라는 요직을 주려는 중종의 행태와 상술한 발언에 대해 대신들은 결국 당시 태후였던 측천무후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중종의 발언을 듣고 넘길 수 없었던[1] 측천무후는 중종을 폐위하여 여릉왕으로 강등시켰고 방주로 귀양보낸다. 중종이 시중으로 발탁하려고 했던 위현정은 결국 유배형을 받아 흠주(欽州)로 갔고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705년 중종이 복위하면서 위현정은 상락군왕(上洛郡王), 태사(太師), 옹주목(雍州牧), 익주 대도독으로 추증되었다. 706년에는 위현정을 풍왕(鄷王)으로 추봉하고 헌혜(獻惠)라는 시호를 내렸다.
[1] 다른건 몰라도 저 천하를 준다고 발언이 결정타였을 것이다. 송나라 유우 이래 선양한 왕조는 모두 그 끝이 비참했는데 당중종이 덜컥 위현정에게 선양이라도 한다면 당나라 황실은 아작날 것이 뻔했다. 위황후가 정말 그것까지 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위황후의 터무니없는 욕심을 생각하면 아주 없다고도 하기 어렵다. 물론 이 때까지는 위황후도 측천무후가 있어서인지 감히 그 말은 하지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