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우구데이 울루스 전쟁 원-오고타이 칸국 전쟁 | ||
기간 | 1268~1301 | |
장소 | 중앙아시아, 중국 | |
원인 | 영토 갈등 | |
교전 세력 | - [[차가타이 칸국| ]][[틀:국기| ]][[틀:국기| ]] | |
지원국 | [[킵차크 칸국| ]][[틀:국기| ]][[틀:국기| ]](~1284) | |
지휘관 | → → | [[차가타이 칸국| ]][[틀:국기| ]][[틀:국기| ]]두아 칸 → → → |
[[킵차크 칸국| ]][[틀:국기| ]][[틀:국기| ]]멩구티무르 칸 [[킵차크 칸국| ]][[틀:국기| ]][[틀:국기| ]]투다멩구 칸 | ||
결과 | 우구데이 울루스의 원나라 점령 실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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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나라와 우구데이 울루스(오고타이 칸국) 사이에 일어난 전쟁2. 배경
1264년 8월 툴루이 가문 내전에서 아리크부카가 패배하고, 쿠빌라이가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이 되자 평소 카이두를 탐탁지 않아 했던 쿠빌라이는 카이두를 제거하기 위해 상도로 소환했으나 말들이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했다. 카이두는 1266년 아리크부카가 사망하자 그의 계승자임을 선언했다.3. 1차 침공
카이두 칸은 1268년에 군사를 이끌고 카라코룸을 공격했다. 노무간의 군대가 응전하여 3일간 전투를 벌였지만 손실만 있을 뿐 승패가 가려지지 않았다. 쿠빌라이 칸이 지원군을 파견한다는 소식을 들려오자, 카이두는 빠르게 사마르칸트까지 후퇴한다.그 후 카이두는 킵차크 칸국과 차가타이 칸국, 일 칸국 등에 지지를 요구하는 서한을 보내 몽골 왕공족들의 지지[6]를 얻어냈고, 1269년 차가타이 칸국-오고타이 칸국 전쟁을 벌여 차가타이 칸국의 바락을 물리친 후 대칸을 선언했다.
4. 2차 침공
차가타이 울루스를 복속시키고 주치 울루스와 동맹도 체결했겠다 카이두는 1273년에 두아 칸과 대규모 군대를 일으켜 원나라를 침공한다. 쿠빌라이는 명장 바린 바얀을 보내 이들을 격퇴한다. 카이두는 1274년에 위구르 지방을 정복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간다.5. 3차 침공
1275년, 카이두는 티베트와 서하의 옛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다시 군사를 일으킨다. 쿠빌라이는 넷째 아들 노무간으로 하여금 카이두를 공격하게 했는데, 몽케 칸의 아들 시리기, 아리크부카의 아들 요부쿠르 및 멜릭 테무르가 함께했다. 1276년 세 왕자가 진중[7] 반란을 일으켜 노무간을 킵차크 칸국에 넘겨버리고, 자신들은 카이두에게 의탁했다.(시리기의 난,1277) 그리고 이 왕자들 사이에 차가타이 칸의 차남 사르반도 합류하게 되었다. 이 왕자들과 킵차크 칸국, 카이두가 반(反) 쿠빌라이 전선을 구축하고, 원나라의 수도 카라코룸으로 진격했고, 쿠빌라이는 바린 바얀으로 하여금 이 진격을 막아내게 했다. 그러나 카이두는 이 왕자들의 반란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았고 결국 바린에게 패배한다. 시리기는 자신을 대칸이라고 선언했지만, 카이두는 그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바린에게 패배한 뒤, 반란을 일으킨 사르반은 시리기를 원나라에 넘기고 항복해버린다.시리기는 1282년에 쿠빌라이에 의해 고려의 한 섬로 유배되었고 후에 그 곳에서 사망한다. 고려에서는 그를 석렬흘이라고 불렀다.
○원(元)에서 대왕 석렬흘(石列紇, 시리기)을 인물도(人物島)로, 야리불(野里不, 예리부)을 고란도(高鸞島)로, 살리지(撒里只, 사리지)를 여음도(與音島)로 유배 보내었다.
고려사절요, 일자,1289년 09월 미상 (음)
고려사절요, 일자,1289년 09월 미상 (음)
6. 여러차례의 침공
그 후로도 카이두는 여러차례 산발적인 공격을 했지만 번번히 바린 바얀의 방어에 막혔고, 쿠빌라이 사후에는 오히려 본인 진중에 있었던 세력들이 이탈해 감에 따라 세력이 약화되는 결과를 맞게 되었다. 1284년에는 멩구티무르 칸에 이어 주치 울루스의 칸으로 즉위한 투다멩구 칸이 원나라와 평화 조약을 맺는다.가장 주요했던 기회는 동방3왕가 중 하나인 나얀이 동쪽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이때 카이두는 나얀과 동맹을 맺고 쿠빌라이가 없는 틈을 타 카말라의 군대를 격퇴하고 몽골 고원의 서쪽까지 진군했다. 쿠빌라이는 카단을 지원 보냈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카이두는 진군하여 카라코룸까지 점령한다. 그러나 테무르가 이끄는 군대에 패배하고 나얀의 반란을 진압한 원나라 본군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자 군사를 물린다. 쿠빌라이는 1289년에 직접 카이두의 군대와 교전해 원나라 영토에서 몰아낸다. 그 이후로도 여러차례의 교전이 있었지만 특별한 성과는 내지 못했다.
7. 성종 재위기
카이두는 1294년 성종이 즉위하고도 원나라 공격을 멈추지 않아서 1298년에는 원 성종 테무르 칸의 사위('쿠르겐')였던 쾨르기즈를 생포하여 처형하기도 했다.성종은 이제까지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카이두의 편에서 싸웠던 인물들을 모두 용서해주기로 한다. 이에 요부루크와 울루스부카를 비롯한 많은 인물들이 카이두의 편에서 벗어나 원나라로 투항한다.
자신의 세력이 줄어드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카이두는 두아 칸과 함께 1301년 최대 규모의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처음에는 카말라[8]의 군대를 압도했지만, 곧바로 투입된 카이산[9]의 군대로 인해 차가타이 칸국의 두아는 본국으로 돌아갔고, 카이두도 전장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