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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8 12:31:50

울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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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명 고자 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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尉繚[1]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생애

1. 개요

전국시대 진시황모사. 위나라 사람이라고 한다.

병법의 고전 무경칠서 중 하나인 울료자(尉繚子)의 저자이며, 진시황에게 천하통일의 계책을 진언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2. 생애

진시황 10년(기원전 237년) 진시황을 알현하여 전국 통일에 대한 계책을 고하였다. 진시황이 이를 받아들이고 예를 갖춰 우대하였으나, 이후 진시황이 교만해질 것이라 판단하여 도주하려 하였다. 그러나 진시황이 간곡히 만류하여 진나라에 머물렀고 그가 고한 계책의 실행은 이사가 맡았다고 한다.

열국연의에서는 제자 왕오와 같이 각 국가의 각료들에게 뇌물을 보내서 전국의 6국을 이간질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전국이 통일된 이후에 진시황이 자만하는 것을 보고 진나라의 기운이 쇠하였다고 한탄하며 말없이 떠나는 것으로 나온다.
무릇 열국을 강한 진나라와 비교하면, 진나라의 전체에 상당합니다. 만일 열국이 분산되면 쉽게 도모할 수 있지만, 그들이 하나로 합치면 공격하기 어렵습니다. 삼진이 합하자 지백이 망하고, 오국이 합하자 제나라를 무너뜨렸다는 것을[2] 대왕께서는 생각하지 않으실 수 없습니다

장의가 주장한 진나라를 중심으로 한 연횡론의 최후의 실행자. 시황제는 계획의 전권을 울료에게 넘기고[3], 이를 시행하기 위한 국고도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했고, 결과적으로 6국의 결속을 약화시켜 진나라가 무력으로 천하통일을 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4]

진시황의 용모를 묘사한 문장으로 후세에 진시황의 모습을 상상할 기록을 남긴 것으로도 나름 유명한데 그 묘사는 아래와 같다.
"진왕이란 위인은 그 상이 우뚝 선 콧날, 가로 길게 찢어진 눈, 맹금(猛禽) 같은 가슴, 시랑(豺狼) 같이 쉰 목소리, 은혜를 베푸는데 인색하고 호랑이이리 같은 흉악한 마음을 가슴에 감추고 있으면서 자기가 곤궁할 때는 밑의 사람일지라도 몸을 굽히나 일단 자기의 뜻을 얻게 되면 쉽게 그 사람을 잡아먹는다. 진왕이 지금은 나와 같이 평민의 복장을 하고 나를 대할 때는 항상 나에게 몸을 낮추고 있으나, 진왕이 장차 천하를 얻게 되면 천하는 모두 진왕의 노획물이 되어 그와는 결코 오랫동안 같이 지낼 수 없을 것이다."

울료가 남긴 병법서가 무경칠서 가운데 하나인 울료자 24편인데, 내용적으로는 무경칠서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으나, 동시에 위서라는 주장도 끊이지 않고 있다. 명나라의 유명한 방효유부터 시작해서, 청나라 때에는 이미 위서라는 것이 통설이 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한나라 초기 무덤에서도 발견된 것을 봐서는 전국시대에서 진나라 시기 정도에는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이후에 가필은 있어도 완전한 위작은 아니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그가 제안한 계책 중에 유력한 것은 바로 각국 대신들의 매수였는데, 그 과정에서 조나라곽개제나라후승을 매수한 것으로 유명했다고 알려진다. 얼핏 보면 그냥 단순한 로비 정도가 아니냐고 여기겠지만, 언급한 두 간신이 매수된 이후에 저지른 짓을 보면 그 여파가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때 전국시대 패권까지 다퉜었고 또 전국시대의 손꼽히는 명장들인 백기악의도 끝내 멸하지 못했던 두 나라를 단숨에 무너뜨려 버린 것이다. 두 나라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면 진나라의 천하통일을 각각 10년은 늦췄을 수 있었으리라는 점을 보면 그가 제안한 계책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1] '尉'자는 성으로 쓸 때 '울(於勿切, 音鬱)'로 읽기 때문에 '위료'/'위료자'가 아닌 '울료'/'울료자'로 읽어야 한다.[2] 연, 조, 위, 한, 진의 5국 합종군이 제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밀어붙인 일. 전단제민왕 항목 참조[3] 삼공의 하나인 태위(太尉)의 직책을 주어다.[4] 진시황으로부터 약 100여년 전인 위 혜왕 시절에도 언급이 되고 있다는 속설이 있지만, 이건 혜왕과의 대담이라는 별도의 내용이 지금까지 울료자의 일부로 전해졌던 탓이다. 즉, 단순한 실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