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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04 20:06:42

요한 크루이프/클럽 경력/FC 바르셀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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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크루이프
FC 바르셀로나 (1973 ~ 1978)
파일:크라위프 바르사.gif
<colbgcolor=#064E9C><colcolor=#E4BB74> 등번호 9
라리가 우승 1회
139경기 47골
UEFA컵 26경기 12골 4도움
유러피언컵 8경기 4도움
코파 델 레이 우승 1회
9경기 1골
총합
180경기 60골


1. 개요2. 시즌
2.1. 1973-74 시즌2.2. 1974-75 시즌2.3. 1975-76 시즌2.4. 1976-77 시즌2.5. 1977-78 시즌
3. 평가4. 기타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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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한 크루이프FC 바르셀로나 경력을 소개하는 문서다.

통계는 트랜스퍼마켓을 사용했으나, 일부 시즌들은 트랜스퍼마켓측에서 출전 시간, 도움 개수, 골 종류 등을 명확하게 집계하지 못하기도 하기 때문에 틀린 기록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2. 시즌

2.1. 1973-74 시즌

아약스 팀 주장 투표에서 떨어지며 큰 충격을 받았던 크루이프는 본인의 에이전트 일을 수행해주던 장인어른에게 즉시 이적을 원한다고 말했고 1973년에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한다. 그의 이적료는 600만 길더[1]로 당시 세계 최고 이적료 기록을 갈아치웠는데, 이적료가 너무 높아 스페인 당국에서 허가를 받지 못하자 농기계로 등록해서 데려왔다는 이적 비화가 있다. 이때의 이적료를 유로로 환산하면 36만 유로였는데 연봉이 15만 유로였다. 당시 바르사의 스타였던 후안 마누엘 아센시의 연봉이 5,400 유로였다는 말이 있는데, 진짜면 얼마나 큰 금액인지 감이 온다. 이에 아센시는 크루이프가 경기 중에 조금 더 뛰어달라고 요청하자 "네가 더 많은 돈을 받으니 네가 더 많이 뛰어라"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1973년 9월에 이적 합의를 맺었지만 행정 절차가 늦어져 실제 데뷔한 것은 그해 10월 28일 그라나다 전이었다. 크루이프가 데뷔하지 못하는 동안 바르셀로나는 UEFA컵 1라운드에서 OGC 니스 상대로 탈락해 크루이프는 해당 시즌 유럽 대항전을 1경기도 뛰지 못했다.
파일:1973년 크라위프 발롱도르.jpg
아약스에서의 활약상을 바탕으로 1973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바르사는 당대의 이름난 전술가를 차례로 데려왔지만, 기대에 걸맞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이에 해답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미헬스와 크루이프였다. 이렇게 바르사에 온 크루이프의 기량은 그라나다와의 데뷔전 멀티골로 시작하여, 1974년 2월 17일 프랑코가 지켜보는 엘 클라시코 원정 경기에서 5:0 승리를 거두며 즉각적으로 드러났다. 크루이프가 없던 1973년 10월 7일 엘 클라시코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한 바르사는 1945년 이후 근 30년 만의 5:0 승리이자 마드리드 원정 사상 최초의 5:0 승리, 가장 큰 점수차를 기록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1961년 이후 14년 동안 라리가 타이틀을 들지 못한 바르셀로나는 오랜 숙원인 리그 우승을 달성하면서 이에 따라 크루이프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가 이 시즌에서 보인 성적은 16골을 기록해 득점 랭킹 4위였다. 리그 후반에 득점이 줄었지만 여전한 활약을 보였다.

1974년 6월 29일 바르셀로나는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열린 엘 클라시코에서 레알 마드리드가 4:0으로 털어 설욕했으나 이때까지 코파 델 레이에서는 외국인 선수가 출전할 수 없어서 크루이프와 당시 공격의 축이었던 1호 외국인 선수 우고 소틸이 뛰지 못한 경기였다.
파일:크라위프 AT전 득점.jpg
{{{#fff 1973년 12월 22일.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전 득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보여준 환상적인 공중 발리 슈팅으로 '플라잉 더치맨'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대회 경기 선발 교체 출전 시간 (분) 득점 도움
라리가 26 2296 16 -
합계 26 2296 16 -

2.2. 1974-75 시즌

파일:1974년 크라위프 발롱도르.jpg
전 시즌과 월드컵에서의 활약상으로 1974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크루이프는 바르사의 주장 완장까지 꿰찼다. 그러나 그에게도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74-75 시즌 엘 클라시코에서 레알 마드리드 원정 0:1 패배, 안방 0:0 무승부로 우승 타이틀을 라이벌에게 내주고 말았다. UEFA컵에서는 4강에서 리즈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종합 스코어 3 대 2로 아쉽게 탈락한다. 1차전에서 크루이프의 활약상은 엄청났다. 위협적인 장면들을 많이 보였고, 놀라운 스루 패스를 넣어 프리킥을 획득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이 프리킥을 가볍게 옆으로 넘겼고 이게 골로 이어지며 어시스트도 기록했다.
대회 경기 선발 교체 출전 시간 (분) 득점 도움
라리가 30 2618 7 -
유러피언 컵 8 720 0 4
합계 38 3338 7 -

2.3. 1975-76 시즌

1975년에 이르러 은사인 미헬스가 감독 자리에서 사임한 뒤 크루이프에게 위기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11년 동안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지휘하면서 3번의 리그 우승과 1975년 UEFA컵 우승을 이끈 명장 헤네스 바이스바일러 감독이 취임했다. 바이스바일러 감독은 전술적으로 많은 변화를 시도했는데, 이 과정에서 크루이프를 측면에 기용하려 한 지시 때문에 마찰이 생겼다. 세비야와의 경기 도중 교체된 크루이프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바이스바일러 감독과 충돌했다. 그러나 엘 클라시코에선 안방 2:1, 원정 2:0으로 이기면서 자존심을 세웠다. 이때 동료인 카를레스 렉사흐도 탁월한 기량을 과시했으나 1975-76 시즌 라리가 우승은 레알 마드리드에게 또 뺏기면서 준우승에 그쳤고, 바이스바일러 감독 역시 시즌이 끝나갈 즈음인 1976년 4월에 경질되었다. UEFA컵 4강에서 리버풀 상대로 종합 스코어 2 대 1로 패배하며 지난 시즌에 이어 유럽 대항전 4강에서 탈락한다.
파일:Cruyff against Franco.jpg
{{{#fff 프랑코 치하의 경찰에 의해 퇴장당하는 크루이프}}}
1975년에는 또 다른 위기도 있었다. 2월 9일 말라가전 당시 말라가의 오프사이드 골을 주심이 취소하지 않자 크루이프가 항의했는데 레드카드를 받은 것. 부심까지 오프사이드로 판단하고 깃발을 흔든 상황이었으나 판정은 유지됐고, 크루이프가 퇴장을 거부하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치하의 무장 경찰들이 강제로 크루이프를 연행했다. 결국 해당 골로 인해 바르셀로나는 3-2로 패배했다.
대회 경기 선발 교체 출전 시간 (분) 득점 도움
라리가 29 2590 6 -
UEFA컵 9 792 2 1
합계 38 3382 8 -

2.4. 1976-77 시즌

이후 라우레아노 루이스 감독대행을 거쳐 친정인 아약스에서 감독을 하던 미헬스 감독이 돌아왔다. 비록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게 승점 1점이 뒤져 라리가 타이틀 탈환은 실패했지만 1976-77 시즌 동안 크루이프는 엘 클라시코에서 두 번 다 득점하여 1승 1무로 우위 전적을 만들었다. UEFA컵 8강에서 아틀레틱 빌바오 상대로 2골을 넣었으나 종합 스코어 4 대 3으로 탈락했다.
대회 경기 선발 교체 출전 시간 (분) 득점 도움
라리가 29 2456 13 -
UEFA컵 7 630 5 -
합계 36 3086 18 -

2.5. 1977-78 시즌

1977-78 시즌에 코파 델 레이 우승컵은 들었지만 엘 클라시코에서 2연패를 당해 라리가 우승을 날려먹으면서 용납될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에 따라 미헬스 감독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또 다시 사임 수순을 밟았고, 애제자인 크루이프 역시 계약이 만료되자 바르사를 떠났다. UEFA컵 4강에서 PSV 에인트호번 상대로 종합 스코어 4 대 3으로 탈락하며 유럽 대항전 결승 코앞에서 내내 좌절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4강 2차전에서 2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고 맹활약했었다.
대회 경기 선발 교체 출전 시간 (분) 득점 도움
라리가 25 2121 5 -
UEFA컵 10 952 5 3
코파 델 레이 7 576 1 -
합계 42 3649 11 -

3. 평가

4. 기타

5. 둘러보기


[1] 유로화 이전의 네덜란드 화폐. 환산하면 약 200만 달러, 92만 파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