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본 배경
“비명에 휩싸인 나의 군도여....” 오래 전 잊혀진 종교 교단의 마지막 생존자 요릭은 망자를 거느리는, 축복이자 저주인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에게로 몰려드는 썩은 시체와 울부짖는 영혼은 그림자 군도에 발이 묶인 그의 유일한 동반자다. 대몰락의 저주로부터 조국을 구원하겠다는 신성한 뜻을 품고 있지만 그의 행동은 괴이하기만 하다. 요릭은 유년기에도 평범하지 않았다. 축복의 빛 군도 해안가 어촌에서 보낸 어린 시절, 타인의 인정을 받는 일은 요릭에게 하늘의 별 따기였다. 또래 아이들이 숨바꼭질을 할 때 요릭은 이제 막 눈을 감은 망자의 영혼들을 친구로 삼았다. 요릭은 영혼을 보고 영혼의 소리를 듣는 자신의 능력이 처음엔 두려웠다. 그래서 마을에 초상이 날 때마다 밤새 뒤척이곤 했다. 섬뜩한 비명을 지르며 찾아올 새로운 영혼을 기다리면서… 요릭은 영혼들이 왜 하고많은 사람 중에 자신을 찾아오는지, 부모님은 왜 영혼과의 조우를 한낱 악몽으로 치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요릭은 영혼들이 자신을 해칠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혼들은 단지 길을 잃어, 다음 세상으로 가려면 도움이 필요한 것뿐이었다. 영혼을 볼 수 있는 인간은 자신 밖에 없었기에 요릭은 인도자를 자청하여 영겁의 세계로 그들을 인도했다. 인도자로서의 일은 달콤하고도 씁쓸했다. 유령 무리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즐거웠지만 하나씩 잠재울 때마다 친구를 떠나보내는 듯 가슴이 먹먹했다. 요릭은 죽은 자에겐 구원이었지만 산 자에겐 골칫덩이였다. 마을 사람들 눈에 요릭은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하는 정신 나간 소년일 뿐이었다. 요릭이 귀신을 본다는 소문은 마을 밖으로도 퍼져 나가 축복의 빛 군도 중심부에 있는 종교 교단의 귀에 들어갔다. ‘황혼의 수도단’이라는 이 교단은 요릭의 재능이 교단에 도움이 될 거라 판단하고 요릭이 사는 마을로 사절을 보냈다. 요릭은 사절단의 요청에 따라 교단의 수도원을 방문했고, 그곳에서 교단의 교리와 단원들이 몸에 지닌 무기의 진짜 의미에 대해 알게 되었다. 황혼의 수도단에 소속된 수도승은 모두 삽을 소지하고 있었다. 영혼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장례 의식을 치르는 수도단의 책임을 상징하는 표시였다. 수도승들은 또한 축복의 빛 군도의 신성한 샘물에서 채취한 성수를 유리병에 담아 항시 목에 걸고 생활했다. ‘생명의 눈물’이라 불리는 이 성수는 산 자를 치유하는 수도승의 의무를 의미했다. 그런데 요릭은 아무리 노력해도 다른 수도승의 인정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요릭은 신앙을 통해서만 습득할 수 있다고 여겼던 모든 능력을 천부적으로 지닌 산 증인이었다. 단원들이 평생을 바쳐 겨우 이해하게 된 것들을 너무도 쉽게 인지하는 요릭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요릭은 그렇게 배척당하며 다시금 혼자가 되었다. 어느 날 아침 묘지에서 일을 하던 중 요릭은 새까만 안개가 피어올라 축복의 빛 군도 전역을 삼켜 버리는 광경을 목격했다. 요릭은 몸을 피하기 위해 내달렸지만 안개에 금세 따라잡혀 암담한 그림자 속으로 빠져 버렸다. 검은 안개가 악한 마법을 일으키자 주변의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몸부림치듯 뒤틀리기 시작했다. 인간, 동물, 심지어 식물까지도 추한 귀신의 형태로 변하고 있었다. 대기가 요동치는 가운데 온 사방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고, 다른 수도승들은 성수가 담긴 유리병을 괴롭다는 듯이 목에서 뜯어내었다. 그러자 그들의 몸에서 영혼이 빠져 나와 차갑고 창백한 시체만이 남았고, 요릭은 그 광경을 지켜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고막을 찢는 듯한 단원들의 비명 속에서 안개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오직 요릭뿐이었다. “그건 없애 버려. 우리와 함께 하나가 되자.” 요릭은 목에 건 유리병을 한 손으로 꼭 감싸 쥐었다. 그리고 마음을 굳게 먹고 목에서 손을 뗀 뒤 영혼들에게 울음을 그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검은 안개가 격하게 굽이치더니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요릭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바람은 잠잠해져 있었고 한 때 비옥했던 토지는 지옥처럼 처참하게 변해 그림자 군도가 되어 있었다. 검은 안개 몇 가닥이 남아 요릭에게 붙어 있었다. 아직 부패되지 않은 유일한 생명체를 덮치려는 것이었다. 요릭은 안개가 몸을 감싸다가 목에 걸린 유리병에 닿자 순간 움츠러드는 것을 보았다. 성수만이 자신의 목숨을 보전해 준다는 사실을 깨닫고 요릭은 유리병을 손에 꼭 쥐었다. 그 후 요릭은 며칠 동안이나 군도를 헤집고 다니며 생존자를 찾았지만 남아 있는 건 한 때 살아 있던 생명체의 뒤틀린 허물뿐이었다. 비탄하는 영혼이 망자의 육신에서 빠져 나오는 모습이 어디를 가든 눈에 띄었다. 생존자를 찾으면서 요릭은 대몰락이 일어난 정황을 머릿속에서 천천히 꿰맞추었다. 죽은 왕비를 부활시키기 위해 축복의 빛 군도에 왕이 도착했고, 왕비가 살아나는 대신 군도와 군도 위의 모든 것이 파멸된 것이었다. 요릭은 ‘몰락한 왕’을 찾아 왕이 초래한 저주를 풀고 싶었다. 하지만 온 사방을 둘러싼 죽음 앞에서 힘이 빠졌다. 슬픔에 잠긴 요릭은 위안을 찾기 위해 어릴 적처럼 주변의 영혼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런데 안개와 대화를 시작하자 무덤 속에 묻혀 있던 시체들이 일어나 요릭의 말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릭은 한 때 자신이 묻어줬던 육신들이 일어나 명령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절망뿐이었던 심장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내리쬐었다. 그림자 군도에서 망자를 구원하려면 망자의 위력과 힘을 이용해야 했다. 저주를 끝내려면 저주를 내려야만 하는 것처럼… |
2. 최후의 의식
"도…도와 주세요.” 남자가 애원했다. 뼈가 부러지고 피를 흘리고 있는 이 남자가 얼마나 오랫동안 난파선 위에 쓰러져 있었는지 요릭은 알 길이 없었다. 남자의 신음은 절규에 가까웠지만 군도에 들끓는 유령의 비명 소리에 가려 희미하게 들렸다. 꺼져가는 촛불처럼 깜빡이는 그의 생명력 주위로 유령 무리가 소용돌이처럼 몰려들었다. 신선한 영혼을 수확하려는 굶주린 유령들이었다. 공포에 질린 남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서울 만도 했다. 망자의 영혼이 검은 안개에 휩싸이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요릭은 수도 없이 보아 왔고, 아직 피부에 온기가 남아 있는 이 남자는 그림자 군도에서 보기 힘든 생명체였다. 마지막으로 살아 있는 생명체를 본 지가 언제였던가… 100년 전이었던가? 요릭은 등에 매달린 검은 안개가 남자를 차가운 품 속에 안으려고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남자의 모습을 보고 나니 오랫동안 잊고 지낸 무언가가 마음 속에서 피어 올랐고, 남자의 생명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졌다. 건장한 수도승 요릭은 부상 당한 남자를 어깨 위에 짊어지고 그 옛날의 수도원을 향해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요릭이 발을 내딛을 때마다 남자는 고통스러워하며 저항했고, 요릭은 그렇게 신음하는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산 자여, 이 곳에 온 연유가 무엇인가?’ 목적지에 다다른 요릭은 남자를 업은 채로 수도원의 복도를 지나 낡은 의무실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커다란 돌상 위에 남자를 눕히고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갈비뼈는 대부분 산산조각이 났고 한 쪽 폐는 못쓸 지경이 되어 있었다. “왜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 요릭의 등에 매달린 검은 안개 속에서 수많은 목소리가 합창하듯 물었다. 요릭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남자를 돌상 위에 놔둔 채 의무실 뒤쪽의 육중한 나무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으로 밀어 보았지만 두껍게 쌓인 먼지 위에 지문만 남을 뿐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어깨에 온 체중을 실어 문에 힘껏 기대 보았다. “애써 봤자 소용 없어.” 검은 안개가 조롱했다. “그 인간은 우리에게 넘겨.” 요릭은 경멸어린 침묵으로 일관했고, 마침내 문을 열었다. 떡갈나무 재질의 묵직한 문이 수도원의 돌바닥을 긁으며 열리자 두루마리와 약초, 치료제가 가득한 방이 나타났다. 요릭은 과거 자신의 삶이 남긴 유물들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사용법을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그는 세월 속에 헤지고 변색된 붕대와 딱딱하게 굳어진 지 오래된 연고 등 눈에 익은 물건 몇 가지를 집어 들고 돌상 위의 남자에게 돌아갔다. “그냥 놔둬.” 검은 안개가 말했다. “군도에 온 그 순간부터 녀석은 우리 것이었어.” “입 다물어!” 요릭이 소리쳤다. 돌상 위의 남자는 이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요릭은 남자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상처를 봉합하려 했지만 낡은 붕대는 감자 마자 끊어져 버렸다. 남자는 숨소리가 더욱 거칠어지더니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통스러워하며 요릭의 팔을 절박하게 붙잡았다. 남자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란 사실을 요릭은 잘 알고 있었다. 목에 건 유리병을 열어 안에 담긴 생명의 눈물을 들여다보았다. 소중한 성수가 아주 조금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남자의 목숨을 구하기에 충분한 양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설사 목숨을 구한다 해도… 요릭은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그는 저주 받은 이 땅이 축복의 빛 군도라 불리던 옛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검은 안개 속 유령들이 했던 조롱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남자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고, 생명의 눈물을 써 버리면 요릭도 죽은 목숨이 될 터였다. 요릭은 유리병을 닫아 다시 목에 건 채로 두었다. 돌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며 요릭은 남자의 숨이 끊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검은 안개가 방 안을 가득 메우고 기대에 찬 유령들이 허둥지둥 팔을 뻗었다. 안개는 격렬하게 요동치더니 눈 깜짝할 새에 남자의 영혼을 육신으로부터 분리해냈다. 남자의 영혼은 맥없는 비명을 희미하게 지른 후 새로운 숙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요릭은 미동도 없이 서 있다가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도문을 중얼거렸다. 돌상 위에 올려진 영혼 없는 껍질을 바라보고 있자니 아직 완수하지 못한 임무가 씁쓸하게 떠올랐다. 대몰락의 저주가 남아 있는 한 군도를 찾는 이는 모두 같은 운명을 겪게 될 터였다. 저주 받은 이곳엔 평화가 필요했지만 수년을 헤매 찾은 거라곤 몰락한 왕에 대한 수근거림뿐이었다. 이젠 답이 필요했다. 요릭이 손을 휙 휘두르자 검은 안개 한 줄기가 남자의 시체 속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잠시 후, 시체가 돌상 위에서 일어났다. 아무것도 지각하지 못하는 듯 했지만 볼 수도, 들을 수도, 걸을 수도 있는 망령이었다. “날 도와 줘.” 요릭이 말했다. 망령은 의무실 문 밖을 나서 수도원 복도를 쿵쿵 울리며 성큼성큼 나아갔다. 그리고 악취 나는 묘지로 나가, 비어 버린 무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요릭은 망령이 군도 중앙의 검은 안개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잠자코 지켜 보았다. 그가 답을 가져오길 바라며… |
3. 구 배경
무덤지기는 산 자들에게 꼭 필요한 직업이다. 그러나 그림자 군도에서는 그 필요성이 더 절실한 것 같다. 이곳에는 다양한 형태의 죽음이 존재하지만 그 어떤 죽음도 두려움이나 경계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요릭 모리가 무덤지기로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첫 번째 룬 전쟁이 끝날 무렵이었다. 그의 가족은 발로란에서 가장 오래된 묘지 중 하나인 '마지막 안식 묘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그가 쓰는 삽은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전해오던 것이었다. 무덤지기들은 자식들에게 손수 가르쳤다. 삽에는 선조들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 무덤들 틈에서 길고 외로운 밤을 보내게 된다면 삽 속에 영혼들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들이 너를 지켜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요릭은 자식을 얻지 못하고 사망했고 모리 가문의 대는 끊기고 말았다. 그의 몸은 삽과 함께 가족묘에 묻혔고 마지막 안식 묘지는 폐허로 변했다. 그러나 요릭의 예상과 달리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요릭은 그림자 군도의 어느 해안가에서 다시 눈을 떴다. 귀신들린 해안가에서 한 손에 삽을 꼭 쥔 채로 깨어난 요릭은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는 곧 자신의 삽을 이용하여 이곳에 있는 언데드들을 '다음 단계'로 이동할 수 있도록 도와줄 뱃사공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가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서는 정해진 '할당'을 채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정해진 할당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저주였다. 요릭은 쉬지 않고 땅을 파며 이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몇십 년이 몇백 년이 되면서 좌절이 견딜 수 없이 커졌다. 그는 자기 시신에 구원의 열쇠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발로란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도착했을 무렵에는 묘지도 가족묘도 사라지고 없었다. 모든 희망을 잃었다고 생각한 그때 리그 오브 레전드를 발견했고, 몇백 년이나 전에 잊혀 버린 가문의 이름을 널리 알릴 기회를 찾았다. |
3.1. 리그의 심판
원문 링크후보: 요릭
날짜: CLE 21년 6월 17일
관찰
요릭은 쉴새없이 노력한 끝에 산의 입구를 발견했다. 그는 리그 오브 레전드에 대해서는 주워들은 바가 있었고, 정의의 전장에서는 죽음의 개념이 다르다는 것이 그의 흥미를 돋구었다. 요릭은 유희나 정치에는 일체 관심이 없었지만, 뭔가 알 수 없는 욕심이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요릭의 자세는 구부정했고, 그의 육체는 임무에 걸맞게 강력했다. 그는 항상 삽 한 자루를 두 손에 쥐고 있었다. 어쩌면 그 움켜쥠이 그를 이 세상에 머물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공포와 동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쉴 수 없는 오래된 시체다. 요릭은 산기슭에 위치하여 자신을 심판할 방의 거대한 돌 관문 앞에 섰다. 그가 들어서자 어둠이 그를 감싸는데, 어둠의 색은 요릭과 잘 어울린다.
회고
요릭에게 어둠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어둠 속에서 보냈었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죽은 후 몇 생애를 걸쳐 어둠 속에서 지내왔었으니까.
생애......라. 흥. 살아있는 자들의 시야란 참으로 좁다고 요릭은 생각했다.
요릭은 그림자 군도에서 지낸 처음 몇 해를 희미하게 기억했다. 그때 당시 그는 지나가는 하루하루를 꾸준히 표시했고, 그것은 나중에 몇 달, 그리고 몇 년으로 이어졌다. 그의 동굴벽이 휘어진 선으로 뒤덮일 무렵이 되자 요릭은 시간을 세는 것을 그만뒀다. 죽은 자가 날짜를 세는 것은 살아있는 자가 숨쉬는 것을 세는 것처럼 쓸모없는 짓이었다. 비록 쓸데없는 생각이었지만, 요릭은 잠시 그가 몇 생애 동안 그렇게 시간을 기록했는지 궁금해했다.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가 요릭을 일깨웠다. 깊은 생각에 잠겨있을 때에는 부드러운 배경음악이 되지만, 그것에 집중하면 고통스러워지는 그런 소리였다. 또 하나의 삶이 자신의 시간을 한탄하면서 뭔가의 목표를 위해 바둥거리는, 난로 속 꺼져가는 불빛과도 같은 소리였다.
축축한 흙냄새가 그를 옛 친구처럼 반겼다. 요릭은 잠시 자신의 주변을 살폈다.
그는 전 방향으로 끝없이 펼쳐진 묘비 사이에 있었다. 삶과 죽음을 잇는 곳이 늘 그렇듯이, 이곳의 공기는 뭔가 묵직한 고요가 팽배했다. 삶이 존재하지 않는 곳, 그림자 군도를 둘러싸는 공기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한때 요릭은 이런 갓 생성된 죽음이 만연한 곳을 존재의 목구멍에 걸린 덩어리라고 여겼다. 어느 방향으로 갈지를 모르는 자들의 불안감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가 궁금한 건 오직 하나였다. 도대체 왜 여기에 시체가 있는 것일까?
수레에 실린 이 시체는 새로 세워지고 아무 것도 쓰여지지 않은 묘비 옆에 있었다. 요릭은 시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니, 갓 죽은 영혼에게 죽음의 여러 단계를 소개하는 것은 그림자 군도의 묘지기에게 허용된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 아니, 요릭을 불편하게 만드는 건 시체란 이런 곳에 간편하게 존재하는 물건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한때는 요릭도 이런 시체의 이름을 묻고, 죽은 자의 가족과 대화해 적어도 묘비에 이름 정도는 적혀있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었다. 하지만 호기심과 작별한지 오래인 요릭은 단지 묵묵히 땅 속에 삽을 박아넣을 뿐이었다.
삽을 한 번씩 풀 때마다 요릭은 뭔가 알 수 없는 회한을 느꼈다. 어떻게 보면 그 느낌에 매료되었던 건지도 모른다. 감정은 산 자의 음료다. 언데드가 된지 3, 4백년 정도가 지나면 감정의 기억이 너무나도 옅어지는 바람에 도대체 그걸 왜 기억하는지를 질문하게 될 정도다. 이것이 바로 산 자와 언데드의 본질적인 차이다. 묘지기에게는 지켜야 할 일정이 있는 법. 그리고 살아있는 자들은 몇 십년 동안 준비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이라는 것에 지극히 집착했다. 다들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말이다.
요릭도 한 두 번 정도 나름대로 손을 써본 적이 있었다. 산 자로 하여금 삶의 소중함을 마지막 순간까지 느낄 수 있도록 생매장을 감행한 적도 있었지만, 그것은 지극히 귀찮은 일이었을뿐더러 그 누구도 그런 요릭의 수고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무덤을 다 팠을 때 요릭은 근엄한 기대감에 가득차있었다.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이 시체는 그에게 뭔가 의미가 있었다. 그는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하는 감정과 이 작업이 가능한한 빨리 끝났으면 하는 모순되는 두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후자를 선택한 요릭은 시체를 무덤 안으로 집어던진 후, 시체가 안식할 수 있도록 무덤 안으로 들어가 시체의 팔을 가슴 위로 접었다. 요릭은 이 시체에서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얼굴을 묻어온 그에게 얼굴이란 더이상 구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얼굴을 보면 왜 특별하다는 느낌이 드는 걸까?
무덤에서 기어올라온 요릭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시체에게 관심을 끊은지는 몇 백년째였지만, 이 시체로부터는 뭔가 이루어지지 않은 꿈과도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무덤에 흙을 덮으려고 하던 순간, 요릭은 미끄러졌고 그의 삽은 무덤 안으로 떨어졌다.
죽은 후로 요릭은 삽을 놓아본 적이 없었다. 당황한 요릭은 그것을 쫓으려고 했지만 다시 미끄러졌고, 그가 파낸 흙더미는 자의적으로 무덤 안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요릭은 안간힘을 다해 흙을 막으려고 애썼지만, 그 흙은 그를 지나쳐 무덤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리고 그 무덤 안을 다시 쳐다본 순간, 요릭은 왜 이 시체가 특별한지를 깨달았다.
그의 삽은 그 시체의 손 안에 쥐어져 있었다. 그가 이상하게 익숙하다고 여겼던 시체의 얼굴은 바로 자신의 얼굴이었다. 순수함, 희망, 슬픔이 뒤섞인 얼굴. 일정을 갓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일정의 끝을 봤다고 생각한 자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요릭은 그 얼굴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제 흙은 산사태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흘러내린 흙은 시체의 몸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고 얼굴 역시 흙 밑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요릭은 무덤을 가득 채운 흙을 손으로 긁어내기 시작했다. 그는 그의 삽 없이는 길을 잃은 셈이었다.
흙이 쏟아져내리기를 그만했을 때에 요릭은 팔꿈치까지 흙으로 뒤덮여있었다.
이런 슬픔은 커녕, 뭔가를 이렇게 느껴본 적이 도대체 얼마만이었단 말인가.
"요릭, 왜 리그에 합류하고 싶어하는가?"
요릭은 고개를 들었다. 옷으로 몸과 얼굴을 가린 한 마법사가 그의 앞에 서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요릭이 물었다.
"난 리그 오브 레전드를 위해 일하는 자다. 그것만 알면 된다."
"난 당신의 리그 따위는 아무래도 좋소. 단지 저 시체만을 원할뿐이오."
"저 시체는 허구야. 자네의 기억에서 만들어낸 신기루, 허상이지. 평소대로라면 난 자네가 기억하는 사람의 얼굴을 가진 채로 자네 앞에 서있겠지만, 아무래도 모두를 잊어버린 것 같군."
요릭은 이 말을 곱씹었고, 생각해볼수록 사실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릭, 왜 리그에 합류하고 싶어하는가?"
"난 뭔가......해야 할 것이 있소. 난 기억하고 싶고, 기억되고 싶소." 요릭은 누군가가 자신의 혀를 조종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얼굴은 젖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마법사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요릭, 자네에게 그 기회를 줄 수 있지만, 우리 역시 자네로부터 알아야 할 것이 있네."
"뭐에 대해서 말이오?"
"자네가 있었던 곳."
"기억나지 않소."
"태어난 곳을 묻는 게 아냐. 그림자 군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요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좋을대로 하시오."
"속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니 기분이 어떤가?"
요릭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 마법사는 사라져있었다. 요릭은 다시 혼자임을 한탄해하면서도 가슴속 한 구석에서 흥분을 느꼈다. 이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곳은 곧 죽음의 맛을 알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