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대한민국 인천광역시에서 발생한 간첩 사건. 이 사건의 범인들은 북한 조선로동당 225국의 지령을 받고 20년 동안 간첩 활동을 해 왔다가 적발되어[1] 2011년에 체포됐다. 이는 1994년 구국전위(救國前衛) 사건과 1999년 민족민주혁명당 사건으로부터 12년 만에 발각된 반(反)국가단체 사건이다.관련자들은 북한에 기밀을 넘긴 혐의에 대해서는 유죄를 선고받았고 왕재산[2]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는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간첩행위는 분명한 사실이지만 왕재산이라는 북한의 지하당, 반국가단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선전가요를 연주한 북한의 경음악 단체(왕재산경음악단)는 존재한다.
"최초 보도"됐을 때는 일부 언론에서 간첩단 사건이 아닌 왕재산이라는 개인이 간첩 노릇을 하다가 체포되었고 2012년 대통령 선거와 관련해 야권 통합 운동을 벌인 것처럼 보도했기 때문에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심지어 "첩보역사상 가장 오지랖 넓은 간첩"[3]이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
하지만 이 사건은 개인이 아닌 엄연한 간첩"단" 사건이며 상세한 전말은 다음과 같다.
2. 사건의 전말
총책임자 김OO씨는 1980년대에 주사파로 활동하다가 1990년대 초 조선로동당 대외연락부(당시 사회문화부)에 포섭되었으며 1993년 8월 26일 김일성을 직접 면담하였다. 북한 간첩들은 이 '접견교시'는 목숨을 걸고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1993년 9월 '지원개발'을 설립하고 1994년 4월부터 2011년 6월까지 중국을 59회 출입하면서 북한 공작관들을 만나 지령을 받았다. 출입국 명목은 상담, 시장조사, 상용 등 평범한 기업활동이었다.
김씨가 포섭한 인물은 임OO씨(초등학교, 중학교 후배이자 80년대 주사파 지하조직 출신)과 이OO씨(대학 동창) 이었다. 참고로 이씨는 열린우리당(현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임채정 국회의장 정무비서관이었다.[4]
조선로동당 225국(옛 조선로동당 대외연락부)은 진두 지휘해서 남한 수도권 지역에 지하조직을 구축하기 위한 물밑작업을 전개하였다. 225국은 총책 김모씨에게 공작금을 주고 작업을 지시했다.
김모씨는 2001년 11월 북한 체제를 선전할 목적으로 벤처기업 '코리아콘텐츠랩'을 차렸으며 인천 남동공단에서 2002년 6월 IT업체 '지원넷'[5]을 차렸다.
북한에서 거액의 돈을 받았다기보다는 기술을 받고 팔아서 공작금을 마련했다. 2009년 중반경 북한 ‘225국’으로부터 ‘차량번호 인식시스템’ 핵심기술을 지원받아 ‘지원넷 LPR(License Plate Recognition System, 차량번호 영상인식) 주차관제 시스템’을 자체 개발한 것처럼 홍보하면서 2009년 11월경부터 이를 판매하였고 2010년 3월경부터 ‘지원넷 LPR 주차관제시스템’에 주차장 內 빈 공간을 인식할 수 있는 ‘인식엔진 프로그램’을 추가 장착한 보다 개선된 성능의 ‘LPR 주차관제시스템’ 기술 개발을 북한 ‘225국’과 협의 중이었다.
위장업체에서 만난 지인들도 포섭하여 자신의 편에 가담시켜 놓았는데 포섭 대상은 자기 밑으로 일하러 온 직원들, 협력업체 사람들 등 다양했다.
3. 사건 진행
2011년 7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공안 1부는 총책임자인 김모씨, 인천 책임자인 임모씨, 서울 책임자인 이 모씨 등 5명을 체포하여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결성, 이적표현물 소지, 북한공작원과의 통신·회합죄와 형법상 간첩죄로 기소하였다. 이 과정에서 초기에는 간첩단 이름을 '일진회'로 발표하였다가 기소단계에서 '왕재산'으로 변경하였다.3.1. 제1심
- 서울중앙지방법원 2012. 2. 23. 선고 2011고합1131,2011고합1143(병합),2011고합1144(병합),2011고합1145(병합),2011고합1146(병합) 판결
가. 피고인 1, 3, 5가 북한 225국의 지령을 받고 그 목적수행을 위하여 국가 기밀을 탐지·수집하고, 피고인 1, 5, 2가 반국가단체 구성원으로부터 지령을 받거나 목적수행을 협의하기 위하여 탈출하고, 반국가단체 구성원과 회합 후, 지령을 받거나 목적수행을 협의하고 대한민국으로 잠입한 사실은 판시 범죄사실에서 인정한 바와 같다. 나. 그러나 과연 피고인들이 위 공소사실과 같이 반국가단체인 지하당 「왕재산」을 구성하고, 위 수괴의 임무 또는 지도적 임무에 종사하였는지를 살피건대, 피고인들은 수사기관 이래 이 법정에 이르기까지 이 부분 공소사실 일체를 부인하면서 진술거부권을 행사하고 있는바, 이 부분 공소사실과 관련한 주된 증거는 ① 증인 공소외 4의 법정 증언, ② 피고인들로부터 압수한 디지털 저장매체로부터 출력된 문건 등이 있다. |
그런데 이 부분 공소사실 기재에 의하면 국가변란 목적의 반국가단체인 이른바 왕재산은 2005년 하반기에 그 구성이 완료되었다는 것인바, 증인 공소외 4의 증언은 위 시기로부터 8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간 과거의 사정에 불과한 것이고, 그 후 조직이 더 성장했을 것으로 생각한다거나 증인 공소외 4가 관여했던 조직이 이른바 왕재산 조직의 맹아로 생각된다는 등의 진술은 단순한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판시 범죄사실에서 본 바와 같이 피고인들이 북한과의 연계를 지속해온 점은 인정되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증인 공소외 4의 증언만으로는 피고인들이 2005년 하반기경까지 조직을 성장시켜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목적을 가지게 되어 반국가단체인 이른바 ‘왕재산’의 구성을 완료하기에 이르렀다는 점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 |
다음으로 ② 부분에서는 디지털 증거의 증거능력이 문제가 되었다.
라. 피고인들로부터 압수한 디지털 저장매체로부터 출력된 문건에 대하여 (1) 검사는 피고인들로부터 압수한 이 사건 디지털 저장매체에 이 사건 출력문건들이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문건들이 발견되었다는 점을 통하여 이 부분 공소사실이 입증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 사건 출력문건을 증거물로서 제출한다는 입증취지를 밝힌 바 있다(제28회 공판조서 참조). 이 사건 출력문건의 현존 자체를 증거로 함에 있어서는 형사소송법 제310조의2가 정하고 있는 전문법칙의 적용을 받지 아니함이 당연하다. 그러나 원진술자 또는 작성자의 환문을 통하여 그 신빙성이 담보되지 아니한 이 사건 출력문건이 현존한다는 사정만으로는 피고인들이 반국가단체를 구성하였다는 이 부분 공소사실을 인정하기에 현저히 부족하다고 할 것이다. (2) 나아가, 그 작성자에 의하여 성립의 진정이 인정된 바 없는 이 사건 출력문건들의 기재 내용이 이 부분 공소사실을 인정할 증거로 사용될 수 없음은 앞서 본 바와 같다. |
이외에 이적표현물 소지, 통신·회합 그리고 간첩 혐의에 대해서는 유죄로 판결하여 총책임자 김모씨에게 징역 9년을, 임모 씨 등 3명에게는 징역 5∼7년의 실형을 선고했으며 유모 씨에게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김모씨 등은 법정구속되었다. #
3.2. 항소심
2심인 서울고등법원에서도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결성에 대해선 무죄로 판결하였고 이적표현물 소지와 북한공작원과의 통신·회합 등 1심이 유죄로 판단한 일부 혐의도 무죄로 봤다. 이에 따라 총책임자 김모씨에게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을 선고하였다. 같은 혐의로 기소된 임모 씨 등 3명에게는 징역 4∼5년 및 자격정지를, 가담 정도가 가벼운 유모 씨에게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일부 혐의가 무죄가 되면서 전체적으로 형량이 줄었다.3.3. 상고심
3심 대법원에서는 상고를 기각하였다. 이에 따라 항소심 판결이 그대로 확정되었다. #4. 평가
왕재산 조직 결성에 대해선 무죄가 확정되었는데도 대부분의 언론이 일관되게 왕재산 간첩단 사건으로 보도했다. 북한225국 인천간첩단 사건 정도가 더 적당한 명칭인데도.재판 과정에서 피의자의 집과 사무실에서 검찰이 압수한 컴퓨터 하드디스크와 USB메모리 및 파일출력본 등 디지털 증거 수백점이 제출되었는데 이의 증거능력에 관해서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받기 위해선 법정에 제출된 증거가 바로 현장에서 압수한 진품이며 어떠한 수정, 조작이 가해지지 않은 원본 그 상태 그대로라는 것을 검찰이 증명해야 하는데 이 재판에선 그러한 절차들이 무시되었다는 것이다. 검찰은 대략 60여가지 디지털 증거품을 제출하였으나 해시(Hash)값 대조 등으로 확실하게 검증된 것은 하드디스크 하나와 USB 저장매체들뿐이라는 것이 재판에 자문교수로 참여한 오길영 신경대 경찰행정학과 교수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1, 2, 3심 재판부 모두 이런 주장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검찰이 제출한 디지털 증거품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였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왕재산 결성' 부분에서는 이러한 주장을 인정하였다. 이런 디지털 증거의 증거능력에 관한 이의제기는 2010년대 들어서 급증했고 이로부터 10년 가까이 지난 2022년의 2021도11170 사건에서도 큰 쟁점이 되었다.
5. 반응
- 한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중형 선고에 유감이라는 뜻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