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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7-07 20:45:15

오제현(발해)



烏濟顯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발해의 유민. 후발해의 관리로 추정되는 인물로 후당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1]

2. 생애

三年二月, 以入朝使南海府都督列周道爲檢校工部尙書, 政堂省工部卿烏濟顯試光祿卿.
청태(淸泰) 3년(936년) 2월, 입조한 남해부도독 열주도에게 검교공부상서를, 정당성 공부경 오제현에게 시광록경의 관직을 주었다.
- 『오대회요(五代會要)』 권30(卷三十) 발해(渤海) -

열주도가 935년 11월(혹은 12월) 후당에 입국한 기록으로 미뤄보아 보면 오제현도 같이 입국한 것으로 추정된다.[2]

936년 2월 후당으로부터 시광록경(試光祿卿)의 벼슬을 받았다. 오제현의 후발해 관직 정당성공부경(政堂省工部卿)은 후발해의 중앙관직이 발해의 제도를 답습한 것으로, 공부란 발해의 정당성 소속 신부(信部)를 공부로 명칭만 바꾼 것이다.

3. 기타

열주도와 오제현의 기록을 끝으로 954년 후주에 투항하는 최오사 사이에 중국 - 후발해 간 교류 기록이 아예 없는데 후당에 사신을 파견한 발해부흥운동세력의 약체화[3], 후당 멸망 후 후진을 세운 석경당이 친 거란 성향인 점, 흑수말갈이 교류를 방해한 정황 등이 영향을 줬던 것으로 보인다.
[1] 또는 동란국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2] 책부원구에서는 935년 11월에 열주도의 오기인 열주의(列周義)가 입조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오대회요에서는 열주도의 방문이 935년 12월로 기록되어 있다.[3] 발해가 멸망당한 후 일어난 발해 유민들의 저항을 거란이 진압하고 요동 지역으로 발해인 사민을 실시했으며, 926년 혹은 934년에 발해세자 대광현이 유민 수 만명을 거느리고 고려로 투항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