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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0 19:56:56

오자키 나카가츠


오자키 나카가츠(尾崎中和 : 1919~1943)

1. 개요2. 생애
2.1. 엘리트 장교의 길을 걷다2.2. 육군 비행학교 교관2.3. 뒤늦은 실전 투입2.4. 최후

1. 개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육군 항공대의 에이스로, 일본 조종사 중에서 가장 많은 B-24를 격추했다고 일컬어진다.

2. 생애

2.1. 엘리트 장교의 길을 걷다

1919년 8월 9일에 사세보에서 태어난 그는 현재의 이바라키 현에 해당되는 미토 번(水戸藩)가 출신의 해군 중좌 오자키 다카노부(尾崎貴信)의 둘째 아들로 맏형인 오자키 다카카즈(尾崎貴和)[1]와 함께 어려서부터 사무라이의 예법에 대해 배우며 자라났다. 사세보에서 도쿄시 요쓰야구의 와카바쵸(若葉町)로 이사를 와서 그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이른바 엘리트들만 다니는 명문으로 일컬어지던 도쿄 부립 1중을 거쳐 군사학교인 도쿄 육군유년학교에서 예비장교 코스를 밟기 시작한 그는 일본육군사관학교 예과 과정[2]을 마치고 1940년 6월에 육군항공사관학교를 53기로 졸업했다. 전형적인 장군 진급을 노린 군사교육을 받은 오자키 나카가츠는 항공병과를 자신의 길로 정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2.2. 육군 비행학교 교관

아케노 비행학교에서 고등 비행훈련을 받은 나카가츠는 1940년 10월에 비행 제33전대(飛行第33戦隊)를 첫 자대로 배치받았고, 곧바로 Ki-43 하야부사 전투기를 몰며 편대장 보직을 받게 된다. 1941년 3월에는 타치아라이 비행학교에 교관으로 선발되어 8월까지 비행병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 오자키는 소위 시절부터 조종 솜씨도 좋았지만 특히나 공대공 사격에 관해서는 가히 최고라고 할만 했다.

1942년 10월부터 1943년 4월에 걸쳐 다시 아케노로 돌아갔던 그는 이 때부터서야 실전 부대의 초급 지휘관 보직을 맡게 된다.
교관 생활을 통해 비행에는 이골이 나도록 단련된 그가 육군 비행 제25전대의 2중대장이 되었을 때는 고참 중위가 되어 있었다.

2.3. 뒤늦은 실전 투입

보통 오랫동안 후방에서 교관 생활만 한 조종사는 실전에서 단련된 일선 조종사들에게 무시당하는 일이 흔했는데, 탁월한 실력을 보인 오자키 나카가츠 중위 같은 경우는 예외였다. 같은 해 12월에 대위로 승진한 오자키는 이미 수십 차례의 교전을 치른 중견 파일럿으로 성장했으며, 교관 시절 사격의 달인으로 알려진 그답게 중국 화남 지방에서 벌어진 항공전에서 19대를 격추시켰는데, 그 중에서 6대는 격추시키기 어려워 불사신이라고 불리던 중폭격기 B-24였다. 오자키 대위의 격추 기록에는 12~14대의 B-24가 포함되어 있어 일본군 사이에서는 B-24 격추왕이란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비행 제 25전대는 육군의 92개 비행전대 중에서도 눈에 띄는 높은 전과를 거둔 일본 육군항공대의 정예부대였다. 그때까지 15대를 떨군 초대 전대장이었던 사카가와 토시오(坂川敏雄 : 49대) 소좌를 비롯해 각각 26대로 타이 기록을 세운 가네이 모리요시(金井守吉) 중위, 호소노 이사무(細野勇) 대위에 더해 오자키 나카가츠가 그 뒤를 19대로 쫓고 있었다. 또한 나카가츠의 뒤로는 기요노 에이지(清野英治) 준위오오타케 시로(大竹四郎) 조장이 15대로 서로 막상막하의 무공을 겨루고 있었다.

2.4. 최후

1943년 12월 27일, 육군의 장시성 방면 쑤이촨 침공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휘하 전대원들을 이끌고 출격한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 날, 제공권을 빼앗기 위해 폭격기 부대를 엄호하여 쑤이촨 비행장을 공습한 25전대는 낮게 깔린 구름을 피해 저공으로 목표까지 비행했다. 그들이 비행장 상공에 당도했을 때는 중국군이 깔아놓은 지상의 경계초소를 통해 이들의 경로는 낱낱이 파악되어 있었고, 상공에는 미리 전투기들이 빙빙 돌며 매복해 있었던 것이다.

편대원들이 나카가츠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것은 그가 우군 폭격기를 요격하는 적기를 쫓아내려 할 때 한 대의 P-40이 엄청난 속도로 급강하해서 덮치는 모습이었다. 전사가 확실시된 오자키 나카가츠 대위는 1944년 2월 8일부로 사후 2계급 특진과 육군 감사장과 표창이 수여되었다. 그의 영결식에는 도조 히데키가 육군 최고 조종사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직접 찾아와 분향하며 예를 표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군은 격추수 집계에 관한 개념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았으나, 일단 40대 이상 격추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정도 전과만으로도 일본 육군에서는 6위에 해당되는 대기록이다.
[1] 마찬가지로일본 육군 장교가 되어 전선에서 전사했다.[2] 예비 과정을 가리키는 일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