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명나라의 장수
吳惟忠생몰년도 미상
1.1. 개요
자는 여성(汝誠), 호는 운봉(雲峰). 절강성 의오현 출신.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견되어 활약해 조선왕조실록, 징비록에서 언급되며, 명사보다는 의오현지에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1.2. 생애
무거에 합격해 파총에 임명되고 1561년에 척계광 휘하에서 왜구를 공격해 태주, 재화가, 백수양, 소등령에서 승리했으며, 척계광을 따라 복건을 구원하는 것에 공을 세웠다. 1568년에는 계진으로 옮겨 북방의 몽골인들을 막는 임무를 맡았고 1571년에는 만리장성 건설에 기여한 공로로 표하우영 유격장군이 되었다가 표하좌영 유격이 되었으며, 1571년에는 산해참장이 되었다.1592년에 조선이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여송 휘하의 참장이 되어 조선의 원군으로 출정했으며, 남병을 이끌고 제4차 평양성 전투에 참가해 평양성을 공격했다. 사대수, 조선의 사명대사와 함께 평양성의 모란봉을 공격하다가 탄환을 맞아 가슴을 다쳤는데도 힘써 독려했다.
1593년 11월에는 낙상지, 마우경과 함께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과 안강에서 싸우다가 패했고 이 패배를 남병의 죄로 돌리면서 오유충은 파직되자 조선 조정에서 그를 변호했으며,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조선으로 출병해 충주를 지켰다.
1599년 3월에는 도독첨사로 승진했다가 1600년에 노령으로 사임하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응천군문표장이 되었지만 사양하고 은거했다.
사졸들과 함께 동고동락했고 진군할 때는 길가의 풀 한 포기도 꺾지 않았으며, 채소라도 밟으면 반드시 대가를 지불했다고 한다. 전선에 나온 어사가 그의 도독 승진을 위해 금 3백량을 부하에게 요구하자 크게 책망했다고 한다.
인품이 좋고 청렴해 조선 조정이나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는데, 이덕형, 이원익, 선조 등이 높이 평가했다. 죽산, 충주, 단양, 충기, 영주, 안동, 신녕 등에 오유충의 덕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2. 오늘의 유머 사용자들을 비하하는 표현
유행적으로 쓰이는 혐오접미사 충을 붙인 말로, 자세한 것은 오늘의유머/비판 문서 참조. 다만 위의 명나라 장수 이름과 겹치는 점을 제외하면 다른 ~충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별로 많이 쓰이는 편은 아니다. 오유가 비판받는 경우가 적어서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다른 표현도 있고 해서 잘 안 쓰이는 듯하다.[1]보통 디시 등지에서 오유를 깔 때는 '오유 선비', 혹은 '씹선비'등을 더 많이 쓴다. 자세한 건 문서 참고.[2] 참고로 오유 부분은 로류, 오윾 등으로 쓰는 경우가 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