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테 삼걸 | ||
카타쿠라 카게츠나 | 다테 시게자네 | 오니니와 츠나모토 |
1. 개요
鬼庭綱元1549 ~ 1640년 7월 13일
센고쿠 시대에서 에도 시대 초의 무장. 다테 가신. 특히 다테 마사무네 시절의 정치적 활약으로 다테 삼걸의 일각으로 불리운다. 카타쿠라 키타와는 이복남매이다.[1]
2. 생애
1573년, 아버지 오니니와 요시나오로부터 가독을 상속받아 가와이 성주가 되어 다테 테루무네를 섬긴다. 그 무렵 아직 어렸던 다테 마사무네에게 매사냥을 지도했다.1581년, 마사무네가 첫출전을 맞이했을 때, 그 후견인으로서 출진한다. 1585년, 아버지와 함께 히토토리바시 전투에서 분전하였으나, 후퇴중 후군을 자청해서 맡았던 아버지가 전사했다. 히토토리바시 전투가 끝난 뒤, 아버지를 죽인 이와키 가문의 가신 구보타 주로가 사로잡혔는데, 포로를 베는 것은 무사도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말하며 놓아주라했다고 한다.
다테 시게자네, 카타쿠라 카게츠나와 함께 다테 마사무네로부터의 신임이 두터웠다. 특히 행정수완이 뛰어났기 때문에 다음해에 쓰나모토는 38세의 어린 나이에 노신들을 제치고부교가 되어 가로의 반열에 든다. 1588년에는 요충지였던 무쓰 도메키의 수비를 맡는다.
임진왜란 당시 출발지였던 히젠 국 나고야(名護屋)에 체제하던 중,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귀신(鬼)이 뜰(庭)에 있는 것은 재수가 없다」는 이유로 성을 오니니와(鬼庭)에서 모니와(茂庭)로 고치게 했다고 한다. 이름인 츠나모토(綱元)도, 그가 에도막부 4대 쇼군·도쿠가와 이에츠나(德川家綱)의 치세까지 장수했기 때문에 같은 자(綱)를 사용할 수 없었던 일문의 무장 가타쿠라 시게츠나(片倉重綱)가 가타쿠라 시게나가(片倉重長)로 바꾼것과 같이 만년에 茂庭延元으로 개명한다.
히데요시의 눈에 들어 애첩, 고노마에를 하사받은 일 때문에 마사무네에게 의심을 사, 한때 출분하였다가 나중에 용서받고 복귀하였다.[2][3]
1600년, 마사무네의 명으로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지배하에 있던 무츠 국, 유하라 성을 공략한 후 루스 마사카게와 함께 하세도성 전투에 출진했다. 다음해 마츠카와 전투에서는 다테군의 선봉으로 출진하였다.
지금 기준으로도 매우 장수하여 92세에 사망했다.
여담으로 오니니와 가문은 대대로 장수하는 사람이 많았던 지라 히데요시가 츠나모토에게 그 비결을 묻기도 했다. 이에 츠나모토가 쌀가루를 물에 푼 것을 복용한다고 답하자 히데요시가 이것을 '이와미탕'라고 이름 붙여 복용하게 되었다고 한다.[4]
3. 대중 매체에서
신장의 야망 등의 게임에서 이상하게 대우가 좋지 않다. 다테 삼걸의 한명으로 평가받았고 히데요시에게도 인정받은걸 보면 분명 뛰어난 인물인데 정치력이 70대 초반에 머무른다. 비슷하게 행정관료로 높게 평가받은 카와무라 시게요시, 스즈키 모토노부가 80대 중후반 정도를 받는걸 보면...[5] 이었다가 최신작인 신생에서 드디어 다테 삼걸의 명성에 걸맞은 대우를 받게 됐다. 통무지정 순으로 80-68-87-73이다. 지력과 정치력이 반대가 되어야 하는게 아닌가 싶지만 일단 넘어가자.[1] 삼걸 중 다테 시게자네는 무를 담당했고, 카타쿠라 카케츠나를 지를 담당했고, 츠나모토는 리(吏)를 담당했으며 정치에 능했다고 한다. .[2] 출분한 이유가 마사무네의 푸대접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일단 츠나모토의 후계자였던 오니니와 요시츠나에게 5천석을 상속해주긴 했지만, 이를 인질 삼아 츠나모토에겐 고작 100석의 은거료만 주었고, 여기서 다른 방법으로 수입을 취할 시 요시츠나에게 상속된 5천석을 몰수하겠다고 협박한 것 .[3] 둘의 화해한 이유도 츠나모토가 고노마에를 결국 마사무네에게 바치기로 합의봤다는 설도 있다.[4] 아버지였던 오니니와 요시나오도 73세까지 장수했는데, 이마저도 전투 중 전사인지라 천수를 누린게 아니었고, 배다른 누이였던 카타쿠라 키타도 73세로 장수한 편 .[5] 카와무라 시게요시는 이시마키항을 개설하여 이후 센다이 번이 에도로 쌀을 수출하여 부를 쌓는데 큰 공헌을 했으며, 스즈키 모토노부는 다테 막부를 대비해 법령을 만드는등 눈에 띄는 활약이 있었지만 츠나모토는 두루두루 잘하는 스타일이라 오히려 손해를 본것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