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스를 하면 귀에 종이 울리진 않더라도, 최소한 개가 되어 도망치고 싶진 않다! 개데렐라 신세 청산하고 그냥 ‘인간 한해나’로 살고 싶은, 인(人)생과 견(犬)생 사이에 선 위태로운 영혼.
예쁘고 똑똑하고 성격 좋아 친구도 많고, 굴곡 없는 인생의 탄탄대로를 걷는 것처럼 보이는 여자. 그런데 그 탄탄대로가 어쩐지 고독하다. 그 어렵다는 임용고시도 한 번에 덜컥 합격하고, 인생 꽃길 걸을 일만 남았건만 왜 꽃길에 꽃이 없는가?!
10살에게 닥치는 큰일이란 주로 엄마 손에 질질 끌려서 치과에 가는 것이라든가, 운동회 달리기에서 처참하게 자빠지는 것, 뭐 그 정도이다.
그런데 그녀 나이 10살, 개가 되어버린 외삼촌을 목도했다. 사람이 개가 된 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충격인데, 이게 가문의 내력이란다. 아니, 가문의 저주란다! 사랑하는 사람과 키스를 하면 매일 밤 12시부터 아침 6시까지 개로 변하고, 100일 안에 다시 그 사람과 키스를 하지 못하면 평.생. 개로 살게 된단다!
당신은 들어본 적이 있는가. ‘키스’ 없는 연애를. 플라토닉 러브? 숭고하고 순수한 정신적 사랑? NO! 그냥 ‘키스’만 안 하면 됐다. 다른 건 다 OK! 키스만 스킵하자는데 도통 이해해주는 남자가 없었다. 그래서 내 인생에 평생 연애는 없겠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28년 인생 잘 절제하고 살았는데, 무슨 마법에 홀린 건지… 평소에도 서먹서먹하기 그지없는 진서원 선생님에게 키스를 해버렸다!
…개가 됐다. 작고, 털이 복슬복슬하고, 다리가 네 개, 꼬리가 하나, 발바닥에 꼬순내… 이름 석 자 내뱉지 못하고 멍멍!대고 왕왕! 대는, 아프면 아야!가 아닌 깨갱!이 나오는 강.아.지.
이 저주를 풀려면 진선생님과 다시 키스를 해야 한다. 그것도 강아지의 모습으로. 휴, 여러모로 과정은 좀 험난했지만 결국 그의 앞에 강아지의 모습으로 섰다.
‘어서 귀여운 나를 쓰담쓰담 오구오구 해줘! 그럼 그 기회에 점프해서 입술 도장 쪽! 게임 끝이다! 나는 싫어도, 강아지는 좋아하겠지!’
잠깐, 근데 진선생님 표정이 이상하다. 내 뒤에 귀신이라도 있나?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는데, 이런…! 그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쓰레기 수거함으로 올라간다!
뭐야, 지금 날 피하는 거야?! 시크한 회색고양이 그 자체인 그 진서원 선생님이?! 진정… 개를 무서워하는 거야?! 에이, 아닐 거야. 누가 제발 좀 아니라고 해줘!!
---- 처녀 귀신이 오면 천도 상담을 해주고 연쇄 살인마를 만나면 조용히 증거부터 챙길, 차분하고 이성적인, 그리고 무척 도도한 ‘회색 고양이’. 거기다 완벽에 가까운 외모까지 자랑하니, 가람고등학교 학생들은 ‘서원쌤’ 덕질하느라 아이돌 덕질도 안 한다.
하지만 슈퍼맨에겐 크립토나이트가, 아킬레우스에겐 발뒷꿈치가 있는 법. …그에게도 그런 게 있다. 유사 이래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귀염받는 생명체. ‘개’, 강.아.지. 그는 개를 무서워한다!
“나는 사실 개를 무서워합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이.” 이 한마디가 너무 어려워진 것은 아픈 기억들 때문이다. 그의 개 공포증을 알게 된 사람들의 조롱과 괴롭힘, 그래서 쌓인 스스로에 대한 수치스러움까지…
“선생님, 나 왜 싫어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한해나 선생님이 마음의 문을 콕콕 두드린다. 그녀와 있으면 불가피하게 자꾸 개와 조우하게 되는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피한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오해를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전 한선생님을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질문에 답하는 것을 언제나 좋아했다. 복잡하고 어려워 보이는 문제일수록 좋았다.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논리와 이성으로 찬찬히 풀어가는 일에서 기쁨을 느꼈다. 그런데 이 질문만큼은 대답이 쉽지 않다. 답을 명확히 알고 있음에도,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우린 둘 다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냥 그런 사람들인 거예요.” 개를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해나 선생님에게 내가 이상하지 않냐고 물었을 때, 그녀가 그렇게 대답했다. 너는 이상하지 않다고, 너는 너대로 괜찮다고.
쩌억- 쩍. 굳게 닫아왔던 마음에 틈이 생긴다.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어쩐지 자꾸 간지럽고 웃음이 난다.
---- 가람 고등학교에서 서원과 함께 인기 아이돌 포지션을 맡고 있다. 서원이 시크하고 도도한 냉미남이라면, 보겸은 다정한 분위기 메이커다. 누구에게나 친절하지만 또 선을 그을 땐 확실하고 자기 사람 유독 잘 챙겨서, 정말 꼭 내 남자친구 삼고 싶은 그런 사람.
그러다 가끔씩은 우수에 빠진 눈빛을 보일 때가 있다. 보겸을 흠모하는 사람들이라면 아마 그 눈빛에 마음이 더욱 일렁이겠지만, 사실 그에게는 깊숙이 감춘 비밀이 있다…
기억도 나지 않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산신으로 살아왔다. 옛날엔 그도 인간에 대한 애정과 호기심이 왕성했다. 힘들게 고개를 넘는 나그네를 위해 산길을 닦아주고, 없는 세간에 고생하는 집안에는 남몰래 먹을 것을 넣어 주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랑으로 뿌린 씨앗이 칼날이 되어 돌아와, 일순간에 푸르른 산신에게서 모든 빛을 앗아갔다. 고통에 울음을 쏟던 그와 함께 숲도 조용히 숨을 죽였다. 이후 보겸은 그때의 그 칼날을 닮아갔다. 서늘하고 날카롭지만, 햇볕 아래선 아름답게 반짝이며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그렇게 눈 마주치면 싱긋 웃고 무슨 말을 들어도 서글서글 눙치고 넘어가며 사람 좋은 가람고 선생님 ‘이보겸’으로 살아가는 요즘이지만…
이곳에 있을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수백 년 전의 악연이 돌고 돌아 기어이 그의 앞에 다시 나타났다. 이제는 그가 직접 칼날을 집어들 차례다.
---- 전학하자마자 가람고 학생과 선생님들의 과거, 현재, 미래를 꿰뚫어 보는 능력을 보여주며 단번에 ‘지아님’으로 자리매김한 신기 충만 여고생.
약 3년 전 신병을 앓다가 결국 신내림을 받았다. 상당히 어색했지만 뭐든 하면 제대로 해야지. 기왕에 신 받은 거, 한 시대를 풍미할 정도로 세상 용한 무당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전학 온 이 학교 뭔가 심상치 않다. 신령님이 가라고 해서 왔더니 국어쌤, 수학쌤, 한국사 쌤... 각각의 전생의 사연이 깊고 진하다. 구체적으로 보이는 건 아니지만, 느낌이 그렇다.
특히 한국사 보겸 쌤이 제일 이상하다. 능글맞게 웃는 얼굴 뒤로 뭔가 숨기고 있다. 궁금해서 주변을 좀 기웃거려 봤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점사를 볼 때도 넌지시 말로만 일러주던 신령님이 직접 내 입을 빌려 보겸쌤에게 말을 건넨 것이다. “돌아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 말에 보겸쌤의 얼굴에 서늘함이 스쳤다. 저게 숨기고 있던 진짜 얼굴일까?
---- 18년 전, 저주를 풀지 못해 영원히 개로 변해버린 해나의 외삼촌. 기타와 오토바이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는 낭만가이였지만, 사랑에 실패해 개가 되어버렸다. 그 퍼석하던 사료가 어째 점점 입맛에 맞아가더니, 산책의 짜릿함에 네 다리가 먼저 반응하게 된 견생 18년차. 연애와 음악 같은 인간 시절의 즐거움은 자꾸 잊혀져가 어쩐지 조금은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