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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9 03:25:27

예로님 우보레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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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공화국 혁명군사위원회 구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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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e400> 위원장 (1918-1934)
<rowcolor=#ffe400> 초대 제2대 제3대
레프 트로츠키 미하일 프룬제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rowcolor=#ffe400> 부위원장 (1918-1934)
<rowcolor=#ffe400>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에프라임 스클랸스키 미하일 프룬제 이오시프 운실리흐트 미하일 라셰비치
<rowcolor=#ffe400>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세르게이 카메네프 얀 가마르니크 예로님 우보레비치 미하일 투하쳅스키
<rowcolor=#ffe400> 총사령관 (1918-1924)
<rowcolor=#ffe400> 초대 제2대
요아힘 바체티스 세르게이 카메네프 }}}}}}}}}
<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소비에트 공화국 제7대 혁명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예로님 우보레비치
Иерони́м Уборе́вич | Ieronim Uborevich
파일:예로님 우보레비치.jpg
성명 예로님 페트로비치 우보레비치
Иерони́м Петро́вич Уборе́вич
Ieronim Petrovich Uborevich
출생 1896년 1월 14일[1]
러시아 제국 안탄드리야 마을
(現 리투아니아 카우나스 주 카우나스 안탄드리야 마을)
사망 1937년 6월 12일 (향년 41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재임기간 제8대 극동 공화국 총사령관
1922년 8월 16일 ~ 11월 22일
제7대 혁명군사위원회 부위원장
1930년 6월 2일 ~ 1931년 6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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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아명 예로니마스 우보레비추스
Jeronimas Uborevičius
부모 아버지 페테르 우보레비치[2]
배우자 니나 블라디미로브나 우보레비치[3]
자녀 딸 미라[4]
복무 러시아 제국 육군
1915년 ~ 1917년
노농적군
1918년 ~ 1937년
최종 계급 중위 (러시아 제국 육군)
제1사령관 (노농적군)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주요 서훈 적기훈장 (3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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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군인정치인.

2. 생애

가난한 리투아니아인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목동으로 일했다. 3년제 시골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아버지의 농장일을 도왔다.

2.1. 제1차 세계 대전

1915년 11월 러시아 제국 육군에 자원입대해 1916년 봄 콘스탄티놉스키 포병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후 우보레비치 소위는 제15중포병사단 소속으로 루마니아 전선에서 전투를 치렀다. 1918년 2월 독일 제국 육군을 상대하다 포로로 붙잡힌 뒤 7월에 탈출했다.

2.2. 러시아 내전

1918년 9월 4일부터 코틀라스곡사포대장, 23일부터 드비나소총여단장을 역임하며 마을을 점령한 백군을 궤멸시켰다. 사령관들이 방어선 구축에 불만을 품자 우보레비치는 모스크바로 돌아가 훌륭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능력을 증명해낸 덕에 소비에트 공화국 혁명군사위원회 위원들의 추천으로 제18보병사단장으로 임명됐다. 이후 아르한겔스크로 접근하는 영국군, 백군을 성공적으로 무찔렀다.

2.2.1. 전후

1927년부터 13개월 간 여러 사령관들과 함께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파견돼 국가방위군 장교들을 만나며 기동훈련에도 참석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의 눈에 띄기 위해서였는지 우보레비치의 출장 기간은 유독 더 길었는데, 이를 눈치 챈 클리멘트 보로실로프가 우보레비치에게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오되 사회주의 신념을 잃지 마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귀국한 우보레비치는 국방인민위원회 위원들에게 소련군의 전술 교리를 대폭 개선할 것을 건의했다. 1930년 6월부터 보로실로프의 업무를 대신하기도 했으며, 스탈린의 힘을 빌려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도 진출하게 됐다.

2.3. 대숙청

보로실로프를 무능한 인물로 폄하하며 다녔다는 누명을 쓰고 미하일 투하쳅스키, 얀 가마르니크와 함께 스탈린의 눈엣가시로 등극해버렸다. 한창 대숙청을 진행하던 스탈린은 당연히 오랜 친구 보로실로프의 편을 들었다. 1937년 5월 20일, 중앙아시아 군관구 사령관으로 임명된 지 9일 만에 체포돼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목록에서 제명됐다. 우보레비치는 혐의를 부인하다 결국 유죄를 인정했다.

사실 보로실로프를 폄하했다는 건 핑계고 실제로는 함께 체포된 이오나 야키르와 함께 스탈린의 명령에 불응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 것이었다.[5]

2.4. 총살

결국 우보레비치는 투하쳅스키, 야키르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아 총살됐다. 시신은 돈스코이 수도원에서 화장 처리됐다.

1957년 1월 31일 군사대학 대법원에 의해 복권되었다.

3. 평가

3.1. 게오르기 주코프

전술을 제대로 이해하는 소련의 진정한 군인이었다. 외모, 행동, 언변을 비롯한 모든 게 뛰어난 자라는 걸 증명하는 것 같았다.
군인으로서 까다롭고 엄격했으며, 실수를 잡아내는 데에 능력이 뛰어나 주변 인물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3.2. 이반 코네프

러시아 내전 당시 우보레비치의 활약을 높이 평가한다. 훈련부터 지휘까지 능숙했다.
대숙청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우보레비치로 인해 전력 손실이 컸다며 유감을 표했다.

3.3. 키릴 메레츠코프

5년 동안 우보레비치와 함께했는데, 이 5년은 내게 있어 완전히 특별한 때였다. 그에 의해 신념이 바뀐 건 나 혼자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유능한 군인 중 하나로 극찬했다. 스탈린도 우보레비치의 군사적 재능은 높이 평가했는지, 우보레비치의 체포 이후에도 메레츠코프를 불러 '우보레비치가 가르친 대로 부대를 지휘하라'고 했다고 한다.


[1] 구력 기준 2일[2] 리투아니아어: Pyatras Uborevičius (퍄트라스 우보레비추스)[3] 1941년 10월 총살, 1957년 사후복권[4] 1944년 수용소에서 5년형을 선고받고 1947년 조기 석방[5] 우보레비치와 야키르가 각자의 군관구에서 지역 영주처럼 행세한다는 정황을 포착한 스탈린은 처음에는 이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모스크바 중앙군을 맡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우보레비치와 야키르는 명령에 지속적으로 불응하였고, 이로 인해 체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