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07:45:47

루이나이웨이

예내위에서 넘어옴
루이나이웨이
芮迺偉[1] / Rui Naiwei
파일:루이나이웨이.jpg
출생 1963년 12월 28일 ([age(1963-12-28)]세)
중국 상하이시
국적
[[중국|]][[틀:국기|]][[틀:국기|]]
직업 바둑기사
소속 중국기원
한국기원(망명)
입단 1985년
단급 九단

파일:external/farm1.static.flickr.com/20859063_fe2fa5b4a6.jpg

파일:attachment/doubleplusgood.jpg
왼쪽에 있는 사람은 남편장주주 九단.

1. 개요2. 경력3. 평가4. 어록5. 수상 경력6. 여담

[clearfix]

1. 개요

중국의 여자 바둑 기사.

2. 경력

중국 상하이기원 소속. 원래 1985년 입단하고 중국기원 소속이었으나, 당시 중국 바둑계 1인자였던 녜웨이핑과의 트러블[2] 등으로 결국 중국을 떠나 일본과 미국 등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다. 연인인 장주주 九단이 1989년 천안문 6.4 항쟁에 참가했다 수배령이 떨어져 망명하게 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다가 1999년 한국으로 옮겨 한국기원 소속이 되었고, 2012년에는 중국으로 돌아가 상하이기원 소속이 되었다.[3] 중국기원으로 복귀하게 되면서 한국기원에 사직서를 제출하여 한국기원 은퇴 기사가 되었다.

현대 바둑의 창시자로 알려진 우칭위안(吳淸源) 九단의 제자이다. 우칭위안의 사제인 조훈현 사범은 루이 九단의 사숙이 되는 셈.

1980년도부터 중국 국가대표로 활약했을 정도로(참고로 프로 입단 전이다.) 그 실력은 어렸을 때부터 세계구급 수준이었으며, 1988년 여성 최초로 九단으로 승단했다. 그러다가 연인인 장주주 九단이 1989년 천안문 6.4 항쟁이 벌어지자 베이징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에 참가하였고, 장주주 九단과 루이나이웨이 九단 둘 모두에게 체포령이 떨어졌다. 장주주 九단과 루이나이웨이 九단은 베이징에서 홍콩, 대만, 일본을 거쳐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4] 1993년 제2회 응씨배에서 주최자 잉창치가 이들의 출전을 허용하면서 중국 측 기사들이 전원 불참하여 흥행이 우려되었으나 루이나이웨이 九단이 이창호(당시 五단)를 꺾으면서 바둑계의 일대 충격을 안겼고, 승승장구해서 4강까지 진출, '반상의 마녀'[5]란 별명을 얻게 된다.[6] 당시 2년 동안 프로 레벨의 바둑을 두지 못한 그녀는 4강에서 지고 나자 울었다고 한다. 패한 게 분해서 운게 아니고 2년 동안 바둑에 굶주려 있다가 원없이 둔 후에 더 이상 바둑을 둘 수 없다는 게 서러워서 울었다고. 그리고 제2회 응씨배가 열렸던 도쿄에서 장주주 九단과 결혼을 했고, 그때부터 망명생활은 미국에서 일본으로 옮기게 되고 중국 이외의 기원에서 객원 기사로서의 길을 본격적으로 모색하게 된다.

처음에는 일본기원 소속으로 활동하기를 원했지만 일본기원은 거절했다. 중국과의 관계를 생각한 일본의 소극적인 태도였다는 이유도 있다고는 하지만, 일본기원 소속 여류 기사들의 반대가 심한 게 가장 큰 이유었다고 한다. 이런 경우에는 기원 차원에서 기사들을 불러모아 기사회 투표를 해서 결정되는 게 일반적인데 여류 기사들의 반대로 무산된 셈. 대조적으로 적극적인 러브콜을 보낸 한국기원으로 장주주 九단과 함께 오게 되었다.[7] 러브콜한 이유는 루이나이웨이라는 거물이 오면 한국 여자 기사들의 실력이 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고. 암튼 10년 만에 떠돌이 생활을 마치고서 한국기원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들어올 때 기사회 투표가 있었는데 일본 여류 기사들은 다수가 오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하였으므로 안 받았는데 한국 여자 기사들은 와도 좋다라고 동의해서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것은 한국 여자 기사들의 대담함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결국 루이나이웨이에게 단련된 한국 여자 기사들은 이후 세계 여자 바둑 대회에서 10회의 우승을 기록하게 된다. 당시 한국 여자 바둑계의 에이스였던 윤영선 五단과 박지은 九단(당시 二단)이 적극적으로 루이나이웨이 한국행 찬성을 밀어붙였다는 후문이다.

전 세계에서 여자 기사로서는 당시 적수가 없었다. 2000년 국수전에서는 여자 기사로서 최초로 타이틀을 따내 큰 충격을 안겼다. 그것도 2진급 기사를 상대한 게 아니라, 예선에서 유창혁 九단, 도전자 결정전에서 이창호 九단을, 도전기(결승전)에서는 국수 조훈현 九단을 연파하며 따낸 것이다. 특히 전신(戰神)이라고 불리는 조훈현 九단을 난전에서 제압했다는 점 때문에 더욱 화제가 되었다. 그야말로 당시 세계최강 바둑국가인 한국의 가장 권위있는 타이틀을, 여자기사가 이창호와 조훈현이라는 거대 산[8]을 넘어서 우승한 불후의 업적. 1992년 응씨배 4강과 함께 루이나이웨이 바둑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금자탑이며 바둑 역사에 영원히 남을 기록이다.[9] 게다가 3전 2선승제에서 첫 판을 패한 뒤 두 판 연속 불계로 역전승을 이뤄냈다. 도전1국에서 163수만에 돌을 던진 터라 엄청난 부담감이 있었을 텐데도 그 다음 2국에서는 155수만에 불계승, 그 다음 마지막 3국에서는 199수만에 불계승으로 국수위를 쟁취했다. 말하자면 3.3혁명과도 같은 사건인 셈.[10] 사실 루이 九단의 말로는 조훈현을 이겼을 때보다 이 九단을 꺾고 도전기에 진출했던 순간이 더욱 기뻤다고. 실제 이창호 九단과의 대결에서는 155수보다 더 빠른 147수만에 불계승을 거뒀다.

기풍은 화끈한 전투바둑이다. 바로 위 문단에서 알 수 있듯 200수 이내의 불계가 많았다. 정상급 남자 기사들에 비해 끝내기는 약한 편이었지만,[11] 압도적 전투 능력으로 상대를 몰아붙이는 스타일이었다. 정밀한 수읽기를 기반으로 한 난전 유도에 강하고, 상대를 쉴새 없이 몰아치며 이득을 취하는 독한 바둑이다.[12] 전신이라 불리던 조훈현을 국수위에서 화끈한 전투 바둑으로 제압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홍렬 바둑 전문 기자는 '지독하게 싸운다'라는 평을 내렸으며, 본인 스스로도 '이창호나 젊은 기사들과 미세한 승부로 가면 이길 자신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파일:021228-ruja.jpg파일:021228-ruja1.jpg

재미있는 기록으로, 2003년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13] 준우승이 있다. 이 기록이 재미있는 이유는, 이 대회 우승자가 남편인 장주주 九단이었기 때문. 세계 바둑을 통틀어 유례가 없는 부부 결승전이었다. 이거 때문에 기자가 집에서 부부간에 바둑 두냐고 질문을 했는데, 서로 스트레스 받으니까 집에서는 바둑 두지 말자고 했다고. 비슷한 사례가 나오기는 앞으로도 무척이나 힘들 듯 한데, 부인이 남자 기사들과 싸워 우승을 다툴 수준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이 경지에 오른 게 루이나이웨이 밖에 없다.

또한 다음 대회인 2004년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에서 우승한 것 역시 바둑 역사에 영원히 남을 기록으로 꼽히는데 여성 기사가 남성 기사를 꺾고 우승한 또 하나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당시 결승전 상대는 유창혁 九단.[14]

다만 그 후 한국에 온 지 3년 만에 조혜연 九단에게 무너지며, 하락세를 타는 것 아니냐는 평을 받기도 했으나, 바로 타이틀을 되찾는 등 여제의 위상을 맘껏 과시했으며, 이 외에도 각종 여성 기전을 휩쓸며 여자 바둑의 최강자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다졌다. 여전히 세계 최고의 여제이자 한국 여자 기사들이 넘어야 할 거대한 산. 놀라운 것은 바둑이 발전함에 따라 신예 기사들의 기본기가 탄탄해지면서 과거와는 달리 20대~30대 초반까지를 바둑 기사의 전성기로 보는데, 루이나이웨이는 2016년 기준 우리 나이로 무려 54세임에도 아직도 정상권에서 경쟁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 이상 루이나이웨이가 세계 최고의 여자 바둑 기사라고 볼 수는 없으나, 루이나이웨이를 기력으로 압도한다고 볼 수 있는 여자 기사도 아직은 나오지 않고 있다. 다만 나이는 속일 수 없는지 매년 조금씩 후배들에게 밀려나는 모습은 안타깝게 여겨진다. goratings 랭킹에서는 50대가 되어서야 여자 기사 1위를 내줬다. 루이와 띠동갑인 이창호가 더 이상은 정상급 기사라 불릴 수 없음을 생각해보면 루이나이웨이의 위대함을 새삼 느낄 수 있다.[15]

안타까운 것은, 루이나이웨이는 최전성기를 누려야 할 20대 후반부터 30대 중반까지를 제대로 바둑을 두지 못하며 보냈다는 것이다. 후반부터 40대 초반까지 루이나이웨이가 보여준 퍼포먼스를 생각하면, 저 시기에 공백 없이 대회에 지속적으로 참가하면서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면 훨씬 더 위대한 기록을 쌓아올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예상도 가능하다. 단지 여자 기사 중에서 최고인 수준을 넘어, 정말로 역대급 남자 기사들에 비교될 만한 커리어를 쌓았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전성기 시절 루이나이웨이는 이창호에게 유난히 강한 기사로, 상대 전적이 5:2인 시절도 있었다.[16]

루이나이웨이의 압도적인 실력과 훌륭한 인성 덕에 한국 바둑팬들도 그녀를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만, 원체 압도적인 실력이다보니 한국 여자 기사들을 압살하는 것에 대한 약간의 툴툴거림도 있었다. 덕분에 묶여서 많이 까이는 기사가 바로 위에 언급한 조혜연 九단이었는데, 어린 나이에 루이나이웨이를 몇 번 이기며 그야말로 미래의 대항마로 꼽히던 조혜연 九단이었건만, 대학생이 되어 바둑에 올인하는 대신 인문학을 공부하고, 종교 활동 하면서 종교상의 이유로 일요일에는 절대 대회를 안 나갔기 때문에 바둑에 올인 안 한다고 까이기도 했다.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도 종교상의 이유로 일요일에 하는 페어전은 안 나가겠다고 해서 엄청 까였다. 오죽하면 새로운 취미로 클래식 감상이 생기자 그것마저 까이기도.

중국 대표로 정관장배에서 중국을 두 차례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루이나이웨이 九단의 재미있는 점은 리즈 시절 '강한 자에게는 강하고 약한 자에게는 약하다'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는 것이다. 전성기 시절에는 앞서 말했듯이 이창호, 조훈현 등 당대의 강자들도 이기고 다녔지만 정작 세계 대회 예선전 같은 곳에서는 인지도 없는 기사들에게 져서 광탈을 당하는 경우가 빈번했다.[17]

2010년 아시안 게임 중국 대표이기도 했다. 당연히 이번에도 보스겠지 했는데, 예상과 달리 결승전에서 맞붙은 한국의 이민진에게 시종일관 앞서다 끝내기에서 1집반 역전패를 당해서, 금메달을 한국 여자 대표팀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2011년 중국 정부는 남편 장주주 九단과 루이나이웨이 九단의 특별 사면을 결정했고, 부부는 협의 끝에 한국을 떠나 중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50세가 되는 2012년부터는 13년간 활동해 온 한국 기원을 떠나 중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아쉽게도 도전기인 여류명인전 2011년 타이틀은 반납하게 됐다. 한국 여자 기사들의 실력을 진일보 시켜준 최대 공신이자, 한 시대의 상징. 중국으로 떠나긴 했지만 국제 기전엔 꾸준히 참가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에 LG배나 삼성화재배 기전 땐 한국에 방문할 예정이라고 한다.

파일:Honeycam 2016-09-10 21-41-19.gif

2016년 한국여자바둑리그 승리 세리머니.

중국 생활이 안정된 2016년부턴 다시 한국여자바둑리그에 참가 중이다.(경기 SG골프팀) 그리고 나이가 쉰을 넘어서 이제 환갑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대만 출신 셰이민 六단(경기 호반건설), 중국 출신 위즈잉 五단(서울 부광탁스) 등과 함께 여전히 여자 기사들의 보스를 하고 있다.

2019년 11월 30일 오청원배 준결승전에서 왕천싱에게 막판 역전패를 당하며 탈락했다. 그리고 1년 뒤 같은 날, 해당 대회에서 또 준결승에 올랐지만 저우홍위에게 패했다. 2021년 7월 19일 해당 대회에도 다시 나섰지만, 16강전에서 팡뤄시에게 졌다. 2022년 7월 30일 해당 대회에서는 24강전에서 헤이자자에게 패했다.

2021년 중국 여자갑조리그 18라운드에서 잔잉 2단을 상대로 7시간 혈투 끝에 패배했다. 해당 리그에서 잔잉은 전체적으로 2승16패의 전적으로 최하위권 성적을 기록하고 있던터라 해당 경기로 인하여 팬들 사이에서 노인학대 밈이 생겼다.

남자 기사들 같으면 시니어리그에서 활동할 나이임에도 젊은 여자 기사들과 상위권 다툼을 할 정도의 기력을 보여 주고 있다.

2024년 4월 24일 제2회 취저우 난가배 세계 바둑 오픈 48강전에서 린쥔옌에게 패했다. 11월 25일 오청원배 16강전에서 탕자원을 만나 패했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여자갑조리그에서 주전 선수로 활약하며 거의 손녀뻘 되는 기사들 상대로 연승까지 하고있다.

3. 평가

세계 정상급 남자 기사들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었던 바둑 역사상 유일한 여자 기사다. 당연히 이론의 여지가 없는 여자 바둑기사 GOAT. 별명은 철녀.[18] 다만 성격 자체는 정이 많고 잘 웃는 편이고, 좋아하는 건 바둑뿐이라고 한다. 1985년 입단하고 그 해 연말에 七단에 올랐으며 1988년에 九단이 됐다. 참고로 전세계 여자 바둑 기사 중 최초로 九단에 오른 기사이다.

이창호 九단이 16년 동안 1위를 한 것으로 유명한 Go ratings에서 루이나이웨이는 1983년부터 2013년까지 무려 30년간 여자 기사 1위였으며, 전성기라 볼 수 있는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남녀 기사를 모두 포함한 전체 랭킹에서 20위 이내에 들었다. 루이나이웨이의 뒤를 이은 위즈잉은 100위권에 겨우 머물렀고, 최정도 2022년 들어 아주 좋은 페이스를 보였지만 50위 안에 들어가지 못한 점을 감안하면 루이나이웨이가 얼마나 대단한 족적을 남긴 여자 기사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당대엔 장쉔, 조혜연 정도가 루이나이웨이의 경쟁 상대로 꼽혔으나 냉정하게 따지면 큰 격차가 있었다. 심지어 만 56, 57세인 2019년과 2020년에도 연속으로 오청원배 4강에 오르며 현역으로 한중일의 여자 기사들에게 결코 밀리지 않는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

쉽게 말해서, 역대 최고의 바둑 기사가 누구냐를 묻는다면 도사쿠, 오청원, 이창호의 삼파전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두어 명의 기사가 더 언급되는 수준이다. 하지만 여자 바둑은 이론의 여지 없이 루이나이웨이가 역대 최고이며, 그나마 비교 대상으로 거론되는 최정 정도를 제외하면 다른 여자 기사들은 아득한 격차를 가지고 있다. 그나마 2022년 최정이 한중일의 정상급 기사들을 차례로 꺾으며[19] 삼성화재배 결승에 진출하면서 루이나이웨이의 메이저 세계 대회 최고 기록[20]은 경신, 장장 30년 만에 여자 바둑의 새로운 시대를 열면서 루이나이웨이의 후계자로 거론되는 수준이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평이다.[21]

4. 어록

Q : 바둑은 힘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공부도 여자가 더 잘하는데 바둑에선 왜 여자가 남자보다 약할까요.
A : “(여자가 남자보다) 일반적으로는 감성적이고 이성적 힘이 부족하고 시야가 좁은 것 같아요. 두뇌가 다른 부분이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여자가 남자를 이기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있어요. 여자가 남자를 이기면 “여자 아니다”고 말하는 거죠. 또 여자 스스로 남자한테는 안 된다는 자격지심도 있고요.”
- 전 여류 최강자 루이나이웨이 九단(2011년) 인터뷰 기사.

5. 수상 경력

1988년 : 九단.
1986, 87, 88, 89년 : 전국개인전 여자부 우승.
1992년 : 제2회 응씨배 4강.
1994년 : 제1회 보해배 우승.
1996년 : 제3회 보해배 우승.
1997년 : 제4회 보해배 우승.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2011년

* 02.18 제11기 STX배 여류명인전 우승.(대 조혜연 八단 2:1)

* 03.08 제16기 가그린배 여류국수전 우승.(대 김윤영 三단 2:0)

* 10.02 제5기 부안 여류기성전 우승.(대 최정 初단 1:0)

2012년

* 제3회 궁륭산병성배 준우승 (대 리허 三단 0:1)

2014년

* 제5회 궁륭산병성배 준우승 (대 최정 四단 0:1)

2019년

* 제2회 오청원배 준결승 (대 왕천싱 패)

2020년

* 제3회 오청원배 준결승 (대 저우홍위 패)


기타

*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바둑 여자 단체전 은메달.(대 한국)

6. 여담



[1] 한국어 독음은 예내위.[2] 녜웨이핑과의 바둑에서 루이나이웨이가 이긴 적이 있었는데, 녜웨이핑이 '내가 새로운 수를 시험 삼아 두다 졌다' 식으로 언론플레이를 했는데 기자에게서 그 질문을 들은 루이가 '신수 같은 거 없었는데요?' 라고 대답을 해서 녜웨이핑이 개망신을 당했고, 이후 중국 바둑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녜웨이핑에게 밉보이게 되었단 평이 많다.[3] 소속 기원을 기준으로 하는 국제 기전에서는 일본기원 소속 조치훈 九단이 일본 대표로 나오는 것처럼, 루이나이웨이 九단도 한국기원 소속일 때는 한국 대표로 출전하였다. 반대로 정관장배 같은 국가 대항전에서는 중국 대표로 나온다.[4] 당시 영국령이던 홍콩을 거쳐가는 상황에서 장주주 9단이 중국 당국에게 잡힐 뻔 하기도 했다.[5] 이후 철녀로 유래된 별명이었다. 바뀌게 된 계기는 후술하겠지만 루이나이웨이가 마녀로 불리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6] 당시 우승은 서봉수 九단이 했다.[7] 이때 루이나이웨이 九단과 장 九단을 한국기원에 소개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드라마 올인의 모델이었던 차민수 四단(당시)이었으며, 사숙인 조훈현 九단의 도움도 컸다고.[8] 2016년 집계된 레이팅 순위를 보면, 1999년 후반~2000년 2월 기준 세계 1위(이창호), 세계 3위(조훈현), 세계 5위(유창혁)을 모두 이기고 우승한 것이다.[9]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아내 이희호가 여성으로서의 업적을 치하하며 축전까지 보냈다. 조훈현 九단도 루이나이웨이한테 패배해서 타이틀을 뺏긴 순간을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치욕적인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 정부는 장주주와 루이나이웨이가 같이 귀국했을 때도 수배가 해제되지 않은 장주주를 체포하지 않았다.[10] 그런데 루이나이웨이는 3.3 혁명 이전의 김택용과는 다르게 응씨배 4강도 가본 인물이다. 1992년 2회 응씨배 16강에서 이창호를 꺾었다. 최정이 2022년 삼성화재배에서 결승 진출에 성공하기 전, 세계 대회에서 여자 기사가 8강 이상 가본 사례는 루이나이웨이가 유일했다. 김택용은 2006년까지만 하더라도 주목받는 신인 정도 느낌이었다. 어찌되었든 3.3혁명이나 루이나이웨이의 통합기전 우승은 임팩트가 크다.[11] 어디까지나 '정상급' 남자 기사들과의 비교다. 여자 기사들 및 2진급 기사들과 비교하면 그냥 완전체 괴물.[12] 이런 스타일은 박지은, 최정도 똑같다. 박지은의 별명이 여자 유창혁이라고 할정도로 공격적인 바둑이다. 오유진 정도가 여자 기사 가운데서는 계가 바둑 스타일이다.[13] 프로 九단들만 참여할 수 있는 제한 기전. 제한 기전이기는 하지만 나이 제한이나 성별 제한과는 달리 단수 제한, 그것도 저단자 대회가 아닌 고단자 대회이므로 사실상 종합 기전 우승과 동급으로 봐도 무리가 없다. 역대 우승자가 유창혁, 이세돌, 최철한, 박영훈, 박정환, 신진서 등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14] 2021년 현재까지 루이웨이나이를 제외하면 남성 기사를 꺾고 기원 주관 대회에서 우승한 여자 기사는 루이나이웨이 九단이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한 위즈잉이 유일. 하지만 제한 기전이었기 때문에 임팩트가 좀 떨어진다. 위즈잉이 우승한 대회는 신인왕전으로 이름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입신최강전보다는 확실히 격이 떨어지는 대회이다.[15] 이창호같은 경우는 나이도 있지만 그만큼 실력 있는 젊은 기사들이 많다는 점이 크다. 사실 어느 종목이든 이창호, 루이나이웨이 나이대면 감독이나 코치를 할 나이다. 바둑이 그나마 몸을 크게 쓰는 스포츠가 아니라서 그렇지... 루이나이웨이같은 경우는 여전히 여자 바둑에서 성적을 내는 편인데 아직까지는 여자 기사들의 인재풀이 적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 자체가 남자 기사>>>>>>여자 기사다.[16] 2022년 현재 상대 전적은 공식전 기준 5승 5패. 루이나이웨이의 불계승으로 끝난 KBS 창사 27주년 특집 생방송 특별 대국까지 포함하면 루이나이웨이 기준 6승 5패.[17] 실제로 저 당시 국내 바둑 잡지에서 이런 점을 아예 대놓고 만화로 그려서 내놓기도 했다.[18] 원래 별명은 '반상(盤上, 바둑판 위)의 마녀'였으나 한국 생활 당시 당사자가 '마녀'란 표현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이 알려진 후로 한국기자들도 이 표현을 자제하고 철녀로 바꿔줬다.[19] 이치리키 료, 양딩신, 변상일. 각 국가의 정상급 기사들을 차례대로 하나씩 도장깨기 했다.[20] 1992년 응씨배 4강.[21] 세계 대회 최고점 자체는 최정이 경신하긴 했으나, 꾸준함의 측면에서는 아직 루이나이웨이가 월등하다. 루이나이웨이의 대표적인 기록으로는 국수전 우승+맥심배 우승 및 응씨배 4강 진출이 있지만, 그 외에도 국제 기전 LG배 8강 진출 1회+삼성화재배 8강 진출 2회, 국내 기전 LG정유배 준우승+맥심배 준우승 등 통합 기전 무대에서의 활약이 꾸준했다는 점 역시 높이 살 요소이기 때문.[22] 우승은 최명훈.[23] 우승은 남편이 했다. 부부가 결승에서 맞붙은 진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