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범규의 역임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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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
대한민국의 축구 감독 | ||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이름 | 여범규 余範奎 | Yeo Bum-kyu | |
출생 | 1962년 6월 24일 ([age(1962-06-24)]세) | |
전라남도 여수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축구 선수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 |
학력 | 숭의실업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학사)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선수 | 대우 로얄즈 (1986~1992) |
감독 | 보인중학교 축구부 (1993~1994 / 코치) 전남 드래곤즈 (1995~2001 / 코치) 광양제철고등학교 축구부 (2003) 전남 드래곤즈 (2004~2005 / 코치) 광양제철고등학교 축구부 (2006) 현대고등학교 축구부 (2007~2010) 광주 FC (2011~2012 / 수석 코치) 광주 FC (2013) 한남대학교 축구부 (2014~2019) | |
국가대표 | 10경기 (대한민국 / 1987~19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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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출신 감독.2. 선수 경력
1985년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표팀에 선발되며 이른 나이부터 실력은 인정받은 여범규는 연세대를 재학하고 1986년 대우 로얄즈에 입단하며 프로무대에 입문하였으며, 1992년까지 7년동안 활약하였다.신인 시즌 팀내 도움 1위를 기록하기도 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대우 로얄즈의 황금시대를 함께하였으며, 실력을 인정받아 1988년 아시안컵과 올림픽 대표팀으로 선발되기도 하였었다.
1992년 부상으로 리그 11경기 출장에 그치고 팀의 성적도 급락하자 대우 측이 팀 리빌딩을 선언하며 1993년 이른 나이에 은퇴하였다.
3. 지도자 경력
3.1. 초기
선수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 보인중 코치로 활동하다 고향 구단 전남 드래곤즈가 창단하자 부름을 받아 전남 드래곤즈의 코치로 선임되었다. 이후 약 16년간 전남과 울산 현대 등지에서 유소년, 프로를 가리지 않고 지도자로 활약했다. 2011년에는 창단한 광주 FC의 수석 코치로 부임해 최만희 감독을 보좌했다.3.2. 광주 FC 감독
2012 시즌 종료 후 광주가 2부 리그로 강등 당하면서 최만희 감독이 사임하자 제2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으며 아기자기한 패싱 플레이 축구로 좋은 성적을 약속했다.
2013 시즌을 앞두고 많은 선수가 타 구단으로 유출된 것에 대한 경기력 문제도 크게 개선하지 못했을 뿐더러 구단 분위기도 뒤숭숭했던 탓에 시즌 초 언급한 패싱 플레이를 제대로 선보이지 못하며 초반에는 무기력했던 승부가 계속되면서 부진해 2부 리그 최하위까지 내려앉기도 했다.
하지만 여름을 기점으로 조직력을 새롭게 다지고 루시오를 중심으로 한 공격력이 무르익으면서 K리그 챌린지 3위로 뛰어오르는 등 나쁘지 않은 활약을 펼쳤다. 리그 1위만이 승격할 수 있으나 앞의 양 구단과 승점 차가 많이 났으며 승격이 어렵다고 판단해 8월 16일에 광주 감독직에서 자진해서 사퇴했다.
3.3. 한남대학교 축구부 감독
이후 2014년 1월, 한남대학교 축구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2014년에 카페베네 U리그 6권역에서 우승을 했다.2015년에 KBSN 제11회 1,2학년 대학축구대회에서 준우승을 했다.
2019년, 같은 축구부 박규선 코치에게 감독 지휘봉을 넘겨줬다.
4. 지도 스타일
과거 광주 감독 시절 아기자기한 패싱 플레이를 지향했지만 실제로 여범규가 펼쳤던 축구는 그러한 패싱 플레이와는 거리가 있었는데, 일단 너무 측면 공격에 매달렸었다.상대가 패널티 박스 안에 자리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측면으로 볼을 전개하며 볼을 연결 받은 풀백이나 미드필더들은 크로스를 통해 공격을 마무리하면서 득점이 필요한 시점에서 효율적이지 못한 공격이 계속되었으며, 이런 무분별한 측면공격을 고집하다보니 경기 후반이 갈수록 상대수비진에게 공격루트가 읽혔고, 더 많은 득점기회를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득점에 성공하지 못하면서 패배하는 경기가 잦았다.
또한 득점에 실패할 시, 침투한 선수들 때문에 생긴 빈자리를 통해 상대팀에게 역습을 허용하는 수비적인 문제점까지 가지고 있었으며, 시즌 초반 허용한 실점 중 대부분이 역습에 의한 실점으로, 측면에서 크로스를 올리기 위해 가담되어있던 풀백, 크로스 경합을 위해 패널티 박스안으로 침투한 미드필더들의 공백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한 상주나 안산 경찰청 같은 강팀과의 경기에는 쓰리백을 가동해 수비적으로 경기운영을 한 후 역습을 통해 득점을 노렸고, 실제로 상주같은 강팀와 대등한 경기를 펼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후에 상주같은 강팀과의 재대결에서도 똑같은 패턴의 축구를 구사했는데,[1] 쓰리백의 약점이기도 한 측면을 철저히 공략당하며 이른 시간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측면 수비수들이 윙백으로 기용될 때 기본적으로 미드필더 부근에 위치해서 경기를 치르는데 이점을 집중 공략 당했던 것이며, 이로 인해 측면 수비가 무력화되면서 경기초반 경기 주도권을 완전히 내주는 일이 태반이었으며, 측면에서 무의미한 크로스만 줄곧 날려대는 단조롭고 무기력한 패턴으로 경기에 임할 뿐이었다.
5. 여담
[1] 당시 상주의 감독이 쓰리백으로 대한민국의 코치로서 2002 FIFA 월드컵 4강 진출을 이끌었던 박항서라는 것을 간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