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4153e, #94153e 20%, #94153e 80%, #94153e); color: #FFF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FFFF> 초대 | 제2대 | 제3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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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여조 초대 황제 大行 | 대행 | ||
{{{#FFFFFF 묘호}}} | 없음 | |
{{{#FFFFFF 시호}}} | 대행황제(大行皇帝) | |
{{{#FFFFFF 존호}}} | 명건응운신무승평지인광효황제 (明乾應運神武昇平至仁廣孝皇帝) | |
{{{#FFFFFF 연호}}} | 티엔푹(天福/천복, 980년 ~ 988년) 흥통(興統, 989년 ~ 993년) 응티엔(應天/응천, 994년 ~ 1005년) | |
{{{#FFFFFF 성씨}}} | 레(Lê, 黎/여) | |
{{{#FFFFFF 휘}}} | 호안(Hoàn, 桓/환) | |
{{{#FFFFFF 부왕}}} | 장흥왕(長興王) | |
{{{#FFFFFF 모후}}} | 등씨(鄧氏) | |
{{{#FFFFFF 황후}}} | 대승명태후(大勝明太后) 봉건지리황후(奉乾至理皇后) 순성명도황후(順聖明道皇后) 정국황후(鄭國皇后) 범황후(范皇后) | |
{{{#FFFFFF 생몰기간}}} | 941년 ~ 1005년 | |
{{{#FFFFFF 재위기간}}} | 980년 ~ 100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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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 전 레(여)씨 왕조 대구월(전 레 왕조) 제국의 초대 황제이자, 창건자였다. 시호는 대행황제(大行皇帝, 다이하인황데), 휘는 여환(黎桓)[1]이었다. 후 레(여)씨 왕조 대월(후 레 왕조) 제국의 초대 황제인 태조 레러이(여리)와 구분하여, 시호를 딴 호칭인 여대행(黎大行, Lê Đại Hành)으로 많이 불려진다.2. 묘호와 시호
- 묘호: 없음
- 시호: 대행황제(大行皇帝)
시법에서 황제와 왕이 붕어하거나 승하한 후, 시호를 정하지 않을 때 임시로 대행황제, 대행대왕으로 호칭했다. 당시 베트남에서는 시법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고, 시조 여환이 붕어했을 당시 황자들의 반란 때문에 임시로 그를 '대행'이라 호칭했고, 정식으로 시호를 올리지 않았다. 종묘의 묘제 또한 정립되지 않아서 제대로 정식 절차를 밟아서 올려진 묘호가 없었다. 이후 첫번째 장기 왕조인 리 왕조 시대에 이르러 묘제와 시법이 완비되었다.
3. 생애
3.1. 초기와 출세
여환은 941년 8월 10일, 응오 왕조 안남 왕국 치하의 하남 성 애주의 청련현에서 여막(黎覔)과 등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환은 유년 시절 부모가 모두 죽고, 고아가 되어 쓸쓸한 삶을 보냈다. 그 모습을 본 애주의 어떤 사람이 어린 여환에게서 총명함을 느끼고 그를 데려다 양자로 삼아 친아들처럼 키웠다. 여환은 고아였지만 양부모의 교육과 열성적인 자기 연마 덕분에 십이 사군 시대의 사군 중 한 명인 만승왕 딘보린(정부령)의 밑으로 들어가서 고속 승진을 거듭하며 장군의 자리에 올랐다.여환은 이후 정연(丁璉, 딘리엔)[2]의 부하가 되었으며 큰 뜻을 가지고 있고, 지혜로워 딘보린으로부터 신임을 받아 군 통솔권을 하사받았다. 여환은 만승왕 딘보린을 따라 12사군을 제압하는 내란에 참전했고 정(딘)군은 12 사군의 난립을 평정했다. 이어 안남을 통일한 영웅 딘보린은 응오(오) 왕조의 마지막 왕 오창지로부터 양위받아 딘 왕조의 황제로 즉위했다. 물론 그 과정 동안 여환 역시 딘보린 휘하에서 수많은 공을 세웠다. 여환은 공을 인정받아 정선황 딘보린으로부터 전군의 최고 통수권자인 십도장군(十道將軍)에 임명되었다.
3.2. 도틱(두석)의 황제 시해 사건
979년 정선황과 그 아들 정연이 환관 두석(杜釋)에게 시해당하는 참담한 사건이 벌어졌다. 두석이 그들 부자를 시해한 이유는 헛된 꿈을 꾸고, 찬탈할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석 역시 이 소식을 들은 정국공 완복(阮匐)의 군대에 의해 허무하게 살해당했다. 문제는 비어진 제위였는데, 당시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여환은 완복과 정전(丁佃) 등과 함께 정선황의 생존한 유일한 아들 딘또안(정선)을 제위에 옹립시켰다. 하지만 딘또안은 나이가 어렸고 일하기엔 부족했으므로 여환이 섭정 자격으로 대구월의 국정을 주도했다.섭정을 맡은 여환은 제위를 손 안에 넣었고 정선황의 황후인 양씨와 사통했으며 자신을 '부왕'(副王)이라 칭했다. 여환의 횡포에 반발한 정국공 완복과 정전, 범합(范盍) 등의 충신들은 거병을 계획하고 여환을 공격했으나 정소는 패배하여 전사하고, 완복은 체포당했으며 범합은 북쪽의 길리향(吉利鄉)으로 도주했으나 여환의 군대에게 체포당했다.
3.3. 북송의 침입과 즉위
이 소식을 들은 북송의 박사(博社) 후인보(侯仁寶)는 송태종에게 이를 알려 안남을 평정하기엔 혼란기인 지금이 기회라고 조언하여 승낙을 받고 후인보, 손전흥 등을 중심으로 육군과 수군을 구성해 대구월, 즉 베트남을 침공했다. 북송의 양주 수군이 침공하자 양태후는 섭정 여환에게 군권을 이양했으며 구 딘(정) 왕조의 신하들도 위기를 막기 위해 여환에게 즉위를 건의해 황제의 옷을 입혔으며 980년 여환은 화려(華閭)에서 즉위식을 치르고 신 왕조의 황제가 되었다. 동시에 딘 왕조의 마지막 황제 딘또안은 위왕으로 강등했다.이듬해 북송군도 계속 남하하여 바익당(백등) 강까지 이르러 총공격을 퍼부었다. 처음엔 북송군이 이기는가 싶었지만 북송 역시 요나라의 침공 가능성, 여환의 뛰어난 군 통솔력과 주요 지휘관인 후인보의 전사로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철수했다. 이어서 여환은 북송에 정식 책봉을 요구했고, 송태종도 이 요구를 받아들여 993년 여환을 교지군왕, 997년 승격하여 남평왕에 책봉했다.
이와는 별개로 여환은 황제에 즉위하고 나서 이전부터 사통해온 양태후와 정식으로 혼인했는데 이는 후세 베트남 사관들에게 여환이 윤리에 어긋난 행동을 했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3.4. 참파 정벌과 외교 관계
북송의 침공을 막아낸 여대행은 이어서 남쪽의 참파에게도 눈을 돌렸다. 982년 군사를 보내 참파 국왕 파라메스바라바르만 1세[3]를 죽이고 수많은 포로들을 사로잡았다. 이 전쟁 이후 참파는 대구월 제국에 조공했고, 안남의 관리 유계종은 참파로 도망가 참파 왕을 참칭하고 북송에 조공을 보냈다. 여환은 자신의 양자를 보내 참파군을 제압하고 반역한 유계종을 잡아 죽였다. 여환은 정복 사업을 펼치는 한편, 편의에도 신경을 써 자주 건너는 길에는 항구를 개척했다.북송과는 이전에 정식으로 책봉받는 등 화의를 맺었으나 여전히 조정 내에선 북송에게 적대적이었다. 제후왕으로써 북송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고 무시했으며 자주 군대를 보내 북송의 국경과 남쪽 해안을 교란시켰으며, 북송은 요나라 및 서하의 침공을 방어하느라 급급했기에 여대행에게 노략질을 자제하라고 요청했으나 무시당했다.
3.5. 자국의 통치
여환은 북송의 재침공을 염려해 엄격한 법치 제도를 마련했으며 1002년 율령(형법과 행정법)을 제정하여 군사를 선발하고 전국 10도를 편리하게 나누어 중앙 통치의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서목(徐穆), 반거량(范巨倆), 오자안(吳子安) 등 유능한 대신을 임명해 제국을 통치했고 운하를 개통했다.하지만 엄격한 정책으로 인해 지방 호족들의 반발이 심해졌고 농민봉기나 소수민족의 봉기가 잦아졌다. 999년 소수민족 망인의 난과 하만동의 난, 1000년 호족인 진록(陳麓)이 난을 일으켰고 1003년 개인(蓋人)족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외에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수많은 땅을 사당을 짓는데 사용했으며 많은 승려들을 공양하여 승려 계층은 당시 대구월에서 높은 지위를 갖게 되었다. 여환은 사람을 고용하여 불경 번역에 힘썼고 이 시기 여러 불상과 사찰, 불탑이 세워졌다. 여대행의 이러한 불교 수용 정책은 불교를 이용해 지배체계를 확고히 하여 반란 진압과 민심을 장악하기 위함이었다.
3.6. 사망과 사후 반란
대행은 1005년 붕어했다. 향년 64세로 그가 묻힌 황릉은 덕릉(德陵)이었다.각지의 반란을 막기 위해 여대행은 자신의 아들들을 전국 각지에 왕으로 봉하여 제후로써 통치하게끔 했다. 반란을 막기 위해 혈연관계로 맺어진 황자들을 보내 세력을 나누어줬으나 이것이 반란의 빌미가 되어 1005년 중종이 즉위한 지 3일만에 와조제에게 살해당했으며 폭정을 일삼던 와조제 레롱딘 역시 붕어하자 유력한 군신들이 제위를 두고 다투어 혼란을 일으켰다. 마침내 최종적으로 승리한 이공온이 즉위하여 혼란을 평정했다.
여환이 붕어했을 당시 시호가 올려져야 했지만 사후 황자들이 제위를 두고 다투기 바뻐 미처 그에겐 묘호와 시호가 올려지지 못했다. 그래서 와조제가 붕어할 때까지 그저 '대행황제'(大行皇帝)로만 불리다가 후세에 후 레 왕조의 태조 레러이(여리)와 구분하기 위해 '여대행'(黎大行)이란 별칭이 붙여졌다.
4. 참고항목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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