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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00:18:14

에우세비오 테헤라

에우세비오 테헤라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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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월드컵 우승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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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usebio Tejera.jpg
이름 에우세비오 라몬 테헤라 키르케루프
Eusebio Ramón Tejera Kirkerup
출생 1922년 1월 6일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사망 2002년 11월 9일 (향년 80세)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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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풀백
신체조건 180cm | 72kg
소속팀 CA 베야 비스타 (1940~1942)
CA 리버 플레이트 (1943~1944)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1945~1950)
쿠쿠타 데포르티보 (1951)
데펜소르 스포르팅 (1952~1958)
국가대표 27경기 (우루과이 / 1945~1954)

1. 개요2. 생애
2.1. 선수 생활2.2.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뒷이야기5. 수상
5.1. 선수
5.1.1. 클럽5.1.2.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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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루과이의 전 축구 선수.

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테헤라는 CA 베야 비스타에서 선수 커리어를 시작했다. CA 리버 플레이트를 거쳐 테헤라는 1945년, 나시오날로 이적했고 1946년에 처음 우루과이 1부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1946년 우승 이후 나시오날의 주장으로 선임된 테헤라는 1950년까지 나시오날에서 두 번 더 우승을 차지했지만 1951년, 콜롬비아쿠쿠타 데포르티보로 이적했다. 이는 우루과이 리그의 파업과 돈으로 다른 남미 국가의 선수들까지 끌어모으던 콜롬비아의 상황이 맞물려 생긴 일이었다.

그러나 테헤라는 쿠쿠타에서 단 1시즌만 머무르고 다시 우루과이에 복귀했다. 테헤라의 새 팀은 데펜소르 스포르팅이었고 그는 1958년에 은퇴할 때까지 이 곳에 머물렀다.

2.1.2. 국가대표

테헤라는 1945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참가함으로써 우루과이 대표팀에 데뷔했다.

그러나 우루과이는 1945년 대회에서 4위에 머물렀으며 1946년 대회1947년 대회에서도 각각 4위와 3위에 그쳤다.

테헤라는 1950년 월드컵 당시 부상으로 체중 조절에 실패해서 평소보다 8킬로 무거운 몸으로 월드컵에 출전했었다. 때문에 결선 리그 스페인전에서 테헤라는 자주 상대 공격수 에스타니슬라오 바소라를 놓쳤다.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고 이로 인해 테헤라는 우루과이에서 신나게 욕을 먹게 되었다. 스웨덴전에서 우루과이는 전술을 바꿨고 테헤라는 후방 수비를 도맡았고 우루과이는 고전했지만 스웨덴에 3대2 역전승에 성공했다.

이제 남은 것은 최종전. 거의 모든 축구팬들이 브라질의 우승을 예상했고 당시 마라카낭에 모여 있던 기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자들은 모두 브라질 대표팀쪽에만 모여 사진을 찍었는데 이때 테헤라가 기자들에게 외쳤다.
여기에 챔피언이 있다!

최종전에서 테헤라는 지지뉴의 마킹을 맡았고 때에 따라 마티아스 곤살레스를 도와 아데미르를 막는 것도 신경 썼다. 옵둘리오 바렐라를 축으로 우루과이 수비수들은 브라질의 파상 공세를 잘 막아냈고 결국 그들은 기적을 써냈다.

테헤라는 우루과이 대표팀으로 다음 월드컵에도 참가했지만 출전하진 못했다.

2.2. 이후

테헤라는 선수 은퇴 이후 공무원, 택시 운전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테헤라는 투지, 강인함, 예리함, 용기 등으로 빠르게 명성을 얻었다.

4. 뒷이야기

5. 수상

5.1. 선수

5.1.1. 클럽

5.1.2. 국가대표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