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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7-30 22:46:17

엄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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嚴思晩 | 寡悔
출생 1729년
사망 미상
본관 영월 엄씨 (寧越 嚴氏)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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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748년(영조 24년)에 진사시 2등 24위로 합격하였고, 1774년(영조 50년) 증광시에서 병과 1위로 문과늘 급제하였다.
1776년(영조 52년)에는 정조 즉위년에 홍문관수찬으로 지제교를 겸직하여 의정부의 진향문을 지었는데, ‘문장과 뜻이 제대로 표현되지 못하였다’하여 벼슬이 갈렸다. 1778년(정조 2년)엔 홍문관부교리와 교리에 올랐고, 1779년(정조 3년)엔 홍문관수찬이 되었다. 1783년(정조 7년)에는 제주목사가 되었다. 1784년(정조 8년)에는 제주에 기근이 들자 임피의 나리포 창고에 있는 곡식 8천 석을 진휼곡으로 보내줄 것을 청하는 장계를 올려 허락을 받았으며, 진휼에 전념하기 위해 다음해 보릿가을 즉 음력 5월까지 임기가 연장이 되었다. 1785년(정조 9년)엔 제주의 기근을 구호한 공로로 종2품 가선대부로 승진하였으며, 사간원대사간이 되었다가, 그해 7월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 1787년(정조 11년) 4월에는 옥사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죄로 황해도 관찰사에서 파직되었으며[1] 같은 해 10월에 재차 사간원대사간이 되었다. 1788년(정조 12년)에는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이 되었으며, 이후 대사간과 대사헌을 번갈아 지냈다.

[1] 자세한 내용은 박여인 살인사건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