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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0:44:51

양태용

1. 금산군 출신 독립운동가, 양태용2. 북구(부산) 출신 독립운동가, 양태용

1. 금산군 출신 독립운동가, 양태용

성명 양태용(梁太容)
생몰 1879년 2월 15일 ~ 1937년 11월 8일
출생지 전라북도 금산군 금산읍 하옥리[1]
사망지 전라북도 금산군[2]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양태용은 1879년 2월 15일 전라북도 금산군 금산읍 하옥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0년 9월 15일 한일병합에 개탄해하며 단검으로 할복 자결하려 했지만 문하생의 응급치료로 목숨을 구했다. 이후 1911년 9월 1일 올정부에 독립촉구선언문을, 이어 9월 9일 만국공사관에 독립청원서를 발송했으며, 이듬해 10월 일본정부에 침략에 대한 항의각서를 발송했다. 또한 1913년 1월 9일에는 조선 총독에게 일제를 비난하는 문서를 발송하는 한편 납세거부·불입적(不入籍)운동 등을 전개하여 동포들에게 배일사상을 고취했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금산군에서 시위에 참여했다가 헌병대에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귀가한 후 고문의 후유증으로 발광하곤 했다고 하며, 1937년 11월 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양태용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8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2. 북구(부산) 출신 독립운동가, 양태용

성명 양태용(梁太鎔)
이명 양대용(梁大溶),양태용(梁泰鎔)
생몰 1893년 2월 24일 ~ 1937년 11월 15일
출생지 경상남도 동래군 구포면 금곡리
(현재 부산광역시 북구 금곡동)
사망지 경상남도 동래군
추서 대통령표창

양태용은 1893년 2월 24일 경상남도 동래군 구포면 금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29일 양봉근(楊奉根), 임봉래(林鳳來), 윤경(尹涇), 유기호(柳基護), 박영초(朴永初), 이수연(李守連) 등이 주도한 구포면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해 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 경찰이 김옥겸(金玉兼) 등 12명을 현장에서 체포하여 구포경찰관주재소에 가두자, 그는 이들의 석방을 위해 임봉래, 윤정은(尹正殷), 변봉엽(邊奉燁) 등과 함께 1,200명의 군중을 이끌고 구포주재소를 공격하고 일본인 순사를 공격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7월 19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4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동래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37년 11월 1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양태용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1] 현재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2] 1963년 이전까지 전라북도 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