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그레고리 펙이 연기한 애티커스.
Atticus Finch
1. 개요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와 파수꾼의 등장인물.미국 앨라배마 주 메이콤에 거주하는 백인 변호사로, 제레미 핀치와 진 루이스 핀치의 아버지이다. 이 소설의 작가인 하퍼 리의 아버지 Amasa Coleman Lee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캐릭터라고 한다. 하퍼 리의 아버지 역시 변호사였다고.
2. 앵무새 죽이기에서의 애티커스
앨라배마주의 소도시 메이콤의 베테랑 변호사로, 앨라배마 주의회 의원이기도 하다. 나이는 약 50세 정도로, 자신보다 꽤 어렸던 아내와 사별한 뒤 두 남매를 홀로 키운다. 살인 혐의로 구속된 흑인 톰 로빈슨의 국선변호인으로 지명되어 피고인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
한마디로 정의로운 인간의 귀감이다. 인종차별이 만연한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메이콤의 백인들이 톰을 린치하려고 몰려왔을때 홀로 그들을 막아서며, 재판에서는 끝까지 흑인인 톰 로빈슨을 변호하고 로빈슨이 무죄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한다. 딸인 스카웃(진 루이스 핀치)에게 비춰지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영웅. 영화 앵무새 죽이기에서 그레고리 펙의 열연으로 애티커스의 정의로운 영웅의 이미지가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다.
아이들에게 직접 글을 가르치고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른 경우에도 체벌하지 않으며 언제나 설득하고 이해시키려 하는 이상적인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보인다. 어린 시절 메이콤 최고의 체스 선수이자 명사수였던 등 다방면에서 유능하지만, 겉으로 이를 내색하지 않는 조용한 성격이다. 가난한 의뢰인에게도 거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그들의 자존심을 세워 주며, 돈 대신 농산물 등 현물로 값을 치르기도 한다. 법정에서 진범으로 지적되자 애티커스에게 원한을 품은 밥 유얼이 멱살을 잡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상황에서도 전혀 평정심을 잃지 않으며 오히려 유얼을 물러나게 만들기도 했다.
결국 애티커스는 무죄 판결을 받아내는 데 실패하고 로빈슨은 교도소에서 사망하고 만다. 밥 유얼은 애티커스와 판사, 톰의 미망인 헬렌까지 주변 사람들을 위협하고 다니다가 칼을 들고 애티커스의 자녀들을 습격하기에 이르고, 결국 핀치 남매를 보호하러 달려온 이웃집의 은둔자 부 래들리에게 칼을 맞고 사망한다. 애티커스는 정당방위라지만 사람이 사망한 상황에서 아들 젬이나 부 래들리를 법정에 세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뇌한다. 하지만 사람을 만나기를 극도로 꺼리고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부를 법정에 세우고 사람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도록 하는 것이 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고, 결국 밥 유얼이 '사고로 자기 칼에 찔려 죽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3. 파수꾼에서의 애티커스
정의로움이 희석되고 그는 인종차별주의적 면모를 보여주었으며 이 작품의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이번 작에서 노인의 모습으로 나오는 애티커스는 사실 스카웃의 믿음과는 달리 인종차별에 반대해 싸우는 영웅이 아니었으며 사실은 그 정도야 어찌되었든 간에 인종 차별주의적인 행동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하지만 애티커스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관점을 잊으면 안된다. 그는 아들딸에게 상습적인 폭행을 가하고 딸 메이엘라에게 성폭행을 했을지도 모르는 밥 유울을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여왔다. 이는 애티커스의 모토에서부터 나오는데
"You never really know a man until you stand in his shoes and walk around in them"
"그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돌아다녀 보는 수밖에 없단다."[1]
"그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돌아다녀 보는 수밖에 없단다."[1]
사람은 직접 그 사람 레벨에 다다르기 전까진 모르는 것이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의 고통을 모르고 가난한 사람은 부자들의 고통을 모르는 것처럼 애티커스의 '이해'적인 행동은 이례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그에게는 '옳은 것'이다.
파수꾼을 번역한 번역가 공진호는 애티커스 핀치가 변절한 것이 아니며 앵무새 죽이기에 이미 그의 모순적인 모습들이 드러나 있었지만 독자들이 그들이 보고 싶은 대로만 보았기 때문에 착각한 것이라고 말했다. . 앵무새 죽이기가 어린 스카웃의 관점으로 서술되었기에 그의 모습은 많이 왜곡되었으며, 어린 아이의 순수한 관점이라는 것은 때로는 어린 아이가 보지 못하는 어른들의 사정이 생략되어 있다는 점을 의미하기도 한다. 독자들은 어린 스카웃의 관점에서밖에 그를 접할 수 없었고 스카웃의 왜곡된 시선이 그대로 독자들에게로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애티커스 핀치가 입체적인 캐릭터이고 앵무새 죽이기의 시점이 어린 아이라 이런 캐릭터 변화가 일어난 것이라고 하는 번역가와 출판사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책을 많이 팔아야 하는 입장에서 그들이 과연 중립적인 위치에서 해석을 내놓을 수 있을까? 캐터릭와 주제가 겹치지만 사실 별개나 다름없는 소설이라는 것을 독자들이 알면 책 판매량이 당연히 감소할 수밖에 없다. 인터뷰에서도 파수꾼이 저술된 과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 것도 그러한 정황을 뒷받침한다.
사실 파수꾼은 앵무새 죽이기의 속편이 아니라, 당시 작가와 편집자가 나눈 교신에서 드러나듯 앵무새 죽이기의 초고이다. 초고가 완성본과 얼마나 달라지는지는 작가의 성향이나 편집과정에 따라 제각각이지만, 작품이 다루는 시간대까지 달라질 정도로 크게 달라졌다면 사실상 다른작품으로 봐도 될 정도로 달라진것이다. 파수꾼에서 핀치가 앵무새 죽이기의 결말과 다르게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점은 이 차이를 더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렇게 본다면 파수꾼의 애티커스와 앵무새 죽이기의 애티커스는 서로 동기와 생각이 다른 타인이다.
[1] 여담으로 영어에서 '타인의 신발을 신는다'는 말은 '그 사람의 입장에 처해 보는 것'을 상징하는 관용어로 쓰이기도 한다. 신발이란 걸을 때 꼭 필요한 물건이지만 발 치수는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