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세븐 Chicago Seven | |||
애비 호프먼 (Abbie Hoffman) | 제리 루빈 (Jerry Rubin) | 데이비드 델린저 (David Dellinger) | 존 프로인스 (John Froines) |
톰 헤이든 (Tom Hayden) | 레니 데이비스 (Rennie Davis) | 리 와이너 (Lee Weiner) | 바비 실* (Bobby Seale) |
* 재판 도중 기소 무효, 이후 후속 재판으로 회부 |
<colbgcolor=#5f5f5f><colcolor=#fff,#fff> 애비 호프먼 Abbie Hoffman | |
본명 | 애비 하워드 호프먼 Abbot Howard Hoffman |
출생 | 1936년 11월 30일 |
미국 매사추세츠 우스터 | |
사망 | 1989년 4월 12일 (향년 52세) |
미국 펜실베이니아 솔버리 타운십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UC 버클리 (심리학 / M.A.) |
배우자 | 애니타 쿠슈너 (1967년 결혼, 1980년 이혼) |
자녀 | 3명 |
종교 | 무종교(무신론) |
소속 | 청년국제당 |
[clearfix]
1. 개요
미국의 사회운동가.2. 생애
매사추세츠주에서 중산층 유대인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부터 무척 폭력적인데다 무신론적인 성향이 있어서 유대인 학교에서 거의 퇴학당하다시피 했으며, 고등학교에서 기물 파손 및 무면허 운전 혐의 등으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성적이 우수하여 UC 버클리로 진학했고 그곳에서 교수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를 만나 마르크스주의에 심취, 사회주의 사회운동가가 되었다. 그는 1959년 심리학과 과정을 석사로 졸업했다.마르쿠제의 영향으로 대학교 졸업 전부터 여러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며, 1964년 경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이었던 제리 루빈과 함께 최초의 베트남전 반대 단체인 "베트남의 날 위원회"를 창립했다. 그는 루빈과 함께 활동했으며 그와 함께 유명한 퍼포먼스였던 월스트리트 뉴욕증권거래소에서 돈뿌리기[1], 펜타곤 행진 등에 참여했다. 또 청년국제당(YIP)을 창당해 히피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비틀즈 멤버들과도 교류하였다.
1968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 당시, "아무도 없음을 대통령 후보로" 및 "돼지를 대통령으로" 등의 조롱성 풍자 행사를 기획했다. 그러나 시위가 급진화되면서 그도 폭력에 휘말렸고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구속되기에 이른다. 호프먼은 주의 경계를 넘어 폭력을 사주했다는 혐의로 "시카고 세븐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미있게도 당시 판사를 맡았던 줄리어스 호프먼 검사가 그와 성이 같았다.[2] 애비 호프먼은 판사를 향해 "이러지 말아요, 아버지!"라는 등 이 점을 놀리며 법정 전체를 조롱거리로 만들었고, 판사에게 LSD를 권하기도 했다. 분노한 줄리어스 호프먼 판사는 그에게 법정모독죄를 적용해 5년형의 징역에 처했다.[3] 그러나 본래 기소된 내용은 모두 혐의 없음으로 판정되었고 항소심에서도 법정모독죄가 무죄판결 되면서 그는 석방되었다.
1969년 우드스톡 패스티벌에서 그는 즉흥 연설을 하기 위해 더 후의 공연을 방해했다. 분노한 피트 타운젠드[4]는 기타로 그의 얼굴을 때렸는데, 타운젠트는 정작 후일 자신이 때린 일이 없다고 술회했다. 당시 테이프를 갈던 중이었기 때문에 이 장면은 필름에 실리지 않았으므로 당사자들만이 진실을 알 것이다. 1971년에는 "이 책을 훔쳐라"라는 책을 썼는데,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정작 독자들이 이 책의 제목을 너무 잘 실천한 나머지 인세는 얼마 받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호프먼도 독자들의 실천(?)에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1972년 미국 대선에서 조지 맥거번을 지원했으나 그가 패배하자 상심했고, 이듬해에는 마약을 밀매한 혐의로 다시 체포되었다. FBI의 표적수사였던 것이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충격을 받은 호프먼은 성형수술을 한 후, 고향으로 도피해 몇년간 은둔 생활을 했다. 말년에 이란 콘트라 사건에 대항하는 시위를 조직하기도 하였으나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사실상 우파로 전향한 동료 제리 루빈과 토론을 하는 등 일부 공개활동을 빼면 70-80년대 내내 은둔 생활을 했다.
1989년 펜실베이니아에 위치한 자신의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사인은 마약 과다 복용으로 인한 자살. 일부는 그가 사고사 하였거나, 혹은 CIA가 그를 암살했다고도 주장하지만 근거는 없다. 주변인들은 그가 레이건 시대 이후 미국의 우경화와 청년층의 보수화, 그리고 그의 옛 동료들의 정치적 전향 혹은 무관심에 상심해 자살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3. 어록
You are talking to a leftist. I believe in the redistribution of wealth and power in the world. I believe in universal hospital care for everyone. I believe that we should not have a single homeless person in the richest country in the world. And I believe that we should not have a CIA that goes around overwhelming governments and assassinating political leaders, working for tight oligarchies around the world to protect the tight oligarchy here at home.
저는 좌파로서 세계적인 부와 권력의 재분배를 믿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보편적 의료를 믿습니다. 저는 가장 부유한 나라에는 단 한명의 노숙자도 없어야한다고 미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전 세계의 정부를 지배하고, 정치 지도자들을 암살하며, 국내외의 엄격한 과두정체를 유지하기 위해 일하는 CIA가 없어져야한다고도 믿습니다.
저는 좌파로서 세계적인 부와 권력의 재분배를 믿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보편적 의료를 믿습니다. 저는 가장 부유한 나라에는 단 한명의 노숙자도 없어야한다고 미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전 세계의 정부를 지배하고, 정치 지도자들을 암살하며, 국내외의 엄격한 과두정체를 유지하기 위해 일하는 CIA가 없어져야한다고도 믿습니다.
4. 여담
-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에서는 사샤 바론 코헨이 분했다. 진짜 호프먼이 광기 넘치는 행실을 보인 사람이었지만 정작 코헨의 평소 연기 스타일이 더 똘기 넘치는지라(...) 오히려 코헨은 진지한 연기에서 성공을 보였다는 호평을 받았으며[5], 여러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으로 후보에 올랐다.
[1] 한국으로 치면 씨앗은행 같은 가짜 돈이었는데 정작 금융가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돈을 줍기 위해 뛰어다녔다. 이들은 엄청난 놀림거리가 되었고 부끄러워진 금융가들은 이런 일이 두번 다시 없도록 2만 달러를 들여 방탄 유리를 천장에 설치했다.[2]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같은 가족이 아니면 성이 같은 경우가 드물다. 단 호프먼의 경우 유대인 커뮤니티에서는 꽤 흔한 성이긴 하다.[3] 법정모독죄로 5년 형은 당시 미국 사회에서도 분노를 일으켰는데 미국 변호사 협회는 이 재판을 가장 불공정한던 재판으로 규정하기도 하였다.[4] 호프먼 못지 않게 거친 성격으로 유명하다.[5] 뉴욕타임스에서 그의 인터뷰 제목이 사샤 바론 코헨: 이제는 진지하다일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