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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01 18:26:05

알도 올리비에리

알도 올리비에리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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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파일: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로고.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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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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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도 올리비에리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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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ldo Olivieri.jpg
이름 알도 올리비에리
(Aldo Olivieri)
생년월일 1910년 10월 2일
사망년월일 2001년 4월 5일 (향년 90세)
국적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이탈리아
출신지 이탈리아 왕국 베로나 산미켈레 엑스트라
포지션 골키퍼
신체조건 178cm | 75kg
소속팀 엘라스 베로나 FC (1929-1933)
칼초 파도바 (1933-1934)
루케세 1905 (1934-1938)
토리노 FC (1938-1942)
브레시아 칼초 (1942-1943)
국가대표 24경기 (1936-1940)
감독 비아레조 칼초 (1945-1946)
루케세 1905 (1946-1947)
비아레조 칼초 (1947-1948)
우디네세 칼초 (1948-1950)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950-1952)
우디네세 칼초 (1952-1953)
유벤투스 FC (1953-1955)
루케세 1905 (1955-1956)
US 피스토이제 1921 (1956-1957)
US 트리에스티나 칼초 1918 (1957-1959)
엘라스 베로나 FC (1959-1960)
카제르타나 FC (1963-1966)
카제르타나 FC (1967-1968)



1. 개요2. 생애
2.1. 선수 생활2.2. 감독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뒷이야기5. 수상
5.1. 선수
5.1.1. 클럽5.1.2. 국가대표
5.2. 감독

[clearfix]

1. 개요

이탈리아의 전 축구 감독.

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올리비에리는 세리에 B 소속이던 엘라스 베로나 FC에서 데뷔했다. 1933-34 시즌에 칼초 파도바로 이적, 세리에 A에 데뷔했지만 그는 공격수와 충돌하는 바람에 두개골이 골절되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2] 때문에 올리비에리는 해당 시즌에 8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고 1년을 쉬었으며 파도바도 18개 팀 중 16위에 그쳐 세리에 B로 강등당했다. 더욱 큰 문제는 올리비에리는 이 사고로 인해 평생 편두통으로 고생해야 했다는 것이다.

올리비에리는 부상 치료 후 루케세 1905로 이적했고 이곳에서 4시즌을 머물렀다. 그리고 1936년에 루케세가 세리에 A에 복귀하면서 아주리 군단에도 선발되었다.

올리비에리는 1938년 월드컵에서 우승한 후 토리노 FC 소속이 되었다. 이곳에서도 4시즌을 치른 후, 세리에 B의 브레시아 칼초에서 골키퍼 장갑을 벗었다.

2.1.2. 국가대표

올리비에리는 1936년 11월 15일, 독일을 상대로 처음 이탈리아의 골문을 지켰고 두 팀은 2대2로 비겼다. 사실 올리비에리는 대표팀에 더 일찍 데뷔할 수도 있었지만 1933년에 입은 두개골 골절상으로 인해 1934년 월드컵 출전은 일찍부터 무산되었다.[3]

1938년 월드컵을 앞두고 이탈리아 대표팀 주전 골키퍼는 귀도 마제티, 카를로 체레졸리, 알도 올리비에리의 3파전 구도였다. 이 중에선 체레졸리와 올리비에리가 더 앞선 상황이었다. 포초 감독의 선택[4]은 올리비에리였고, 올리비에리는 엄청난 선방들을 해나가며 이탈리아의 월드컵 2연패에 큰 지분을 차지했다.

올리비에리는 총 24경기에 출전했다.

2.2. 감독

1945년 비아레조 칼초에서 감독으로 데뷔한 올리비에리는 이듬해 루케세 1905에 복귀해서 팀을 세리에 A로 승격시켰다.

우디네세 칼초 시절에도 그는 뛰어난 지휘력을 선보이며 세리에 A 승격을 다시 이뤄냈고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유벤투스 FC에서는 각각 세리에 A 준우승을 이끌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올리비에리는 용감하고 화려하며 운동 능력이 뛰어난 골키퍼였다. 빠른 반사 신경과 점프력, 상대 공격수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능력도 준수해서 마법의 고양이(Il Gatto Magico)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또한 공을 멀리 펀칭하는 데에도 능했다.

4. 뒷이야기

5. 수상

5.1. 선수

5.1.1. 클럽

5.1.2. 국가대표

5.2. 감독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먼 훗날 페트르 체흐도 비슷한 사유로 같은 두개골 골절상을 입었고 헤드기어를 착용하며 남은 커리어를 보냈다.[3] 1934년 월드컵 당시 이탈리아 대표팀의 주전 골키퍼를 정하는 과정은 복잡했다. 올리비에리는 아예 계산에서 배제되었고 잔피에로 콤비의 은퇴 선언 이후 카를로 체레졸리가 주전으로 낙점받았지만 체레졸리도 훈련 중에 팔이 부러지면서 월드컵 직전에 출전이 좌절되었다. 결국 포초 감독의 간곡한 설득으로 은퇴 선언을 했던 콤비가 은퇴 무대를 월드컵으로 바꿔 콤비가 주전 골키퍼가 되었다.[4] 일부 기록에 의하면 체레졸리가 원래 월드컵 본선의 주전 골키퍼였지만 또 부상을 입는 바람에 올리비에리가 주전이 되었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