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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3-02 00:45:06

안치구

파일:안치구.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순흥 안씨[1]
출생 1914년 4월 4일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서촌리
사망 1939년 4월 24일[2] (향년 25세)
묘소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장암리 종중묘원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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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0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914년 4월 4일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서촌리의 평민 가정에서 아버지 안사열(安士烈, 1890.4.7 ~ 1950.8.19)과 어머니 이종주(李鍾朱, 1888~1921.7.15)(李容立의 딸)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 가회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에 거주했다.

그는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33년 2월 6일 새벽 경성부 관내 곳곳에 권우성(權又成)·이재남(李載南)·홍영우(洪永祐) 등과 함께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촉구하는 격문을 배포했다.
파일:안치구2.jpg
(左, 中) 1933년 2월 26일, 경기도경찰부 형사과에서 촬영된 사진.
(右) 1933년 4월 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이 일로 인해 경기도경찰부 소속 일본 경찰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었고, 2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3년 4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에 대해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고향에 서촌간이학교(西村簡易學校)[3]를 설립하고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옥고의 후유증으로 인해 1939년 4월 24일 요절했다.

사후 그의 유해는 함안군 칠원읍 장암리에 있는 취암공(就巖公)[4] 종중 묘원에 안장되었다. 2003년 8월 15일 광복절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2007년 2월 6일에는 함안군 가야읍 도항리에 있는 충의공원(忠義公園)에 애국지사 위패가 봉안되었다.

[1] 직장공파(直長公派) 25세 치(致) 재(在) 항렬.[2] 음력 3월 5일. 순흥안씨대동보 19권 100쪽에는 양력 4월 24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3] 서촌국민학교의 전신이다.[4] 안치구의 7대조 안성징(安聖澄, 1696 ~ 1775. 8. 29)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