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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2-22 14:49:28

안영(1903)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북한의 정치인.

2. 생애

1903년 12월 15일에 태어났다.

1929년부터 중국에서 각종 혁명활동에 참가했으며 1934년 항일 빨치산에 입대하였고 1940년부터 일련의 게릴라전을 전개했다고 한다. 동료 빨치산 리영숙과 결혼하였다. 딸 안금선을 낳았으나 키울 형편이 도무지 되지 않아 소련으로 보냈고 나중에 해방 후에 찾아왔는데, 안금선이 김정은 시대에 한 인터뷰를 보면 한국어를 후에 배우긴 한 모양이지만 러시아어 억양이 아주 강한 한국어를 쓴다. 해방 이후 1945년 북조선공산당 평양시위원회 조직부장, 철도경비사령부 정치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47년 조선인민군이 창설되자 정치일군으로 배치, 1950년 2월 3사단 문화부장에 이르렀다.

1953년 9월, 주 헝가리 공사로 부임하여 1954년 3월에 대사로 승진하였고 1957년 5월 9일까지 재임하다가 홍동철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귀국했다. 남일은 소련 측에 안영이 박길룡과 함께 가장 우수한 외교관 중 한명이라고 설명했다. 귀국 후 1957년 당중앙위원회 부장에 임명, 이후 사법성 부상을 거쳐 최고검찰소 부소장이 되었다. 의외로 음악가 소질도 있었는지 1961년 <로농적위대행진곡>을 작사하였다. 1958년 3월, 1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958년 9월 전원회의에서 국제부가 신설되면서 국제부 부부장을 지내다가, 소련 측 기록에 따르면 1959년에 검사총장에 임명되었다고 하는데, 조선대백과사전에 기록된 최종 직위는 최고검찰소 부소장이다. 아마도 소련 측에 전달되면서 오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60년 5월, 조선로동당 행정부장 김경석이 평양시 당위원장으로 이동하면서 후임 행정부장에 임명되었다.

1961년 2월 16일, 김려중의 뒤를 이어 주 알바니아 대사로 부임, 행정부장 자리를 김중린에게 물려주었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66년 8월, 박찬제가 후임 대사로 임명되면서 귀국, 1966년 10월에 중앙당학교에 배치되어 공부했으며 1967년 내각품질감독국 국장에 임명되었다. 1967년 11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하지만 일을 못했는지 아님 고령이 문제였는지 1970년 10월에 중앙위원회 위원에서 소환되었고 조용히 있다가 1978년 4월 6일에 사망했다.

이후 애국렬사릉에 항일혁명렬사 직함으로 안치되었다가 나중에 다시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 직함으로 이장되었으며 반신상도 제막되었다. 아내 리영숙은 뒤로 한참 장수하다가 김정은 시대인 2021년 11월에야 사망했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