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19:49:36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

<colbgcolor=#847a4d><colcolor=#fff> 그랜드 프린스 호텔 아카사카
グランドプリンスホテル赤坂.
파일:PrinceHotels_logo.png
국가
[[일본|]][[틀:국기|]][[틀:국기|]]
개관 1955년 10월 1일
폐관 2011년 3월 31일
운영사 프린스 호텔
규모 67,750㎡
지하 2층 / 지상 39층
총 761실
식당수 15개
위치 도쿄도 지요다구 기오이마치 1-2
東京都千代田区紀尾井町1-2
<bgcolor=#847a4d> 파일:external/www.eonet.ne.jp/to-138pri.jpg

1. 개요2. 상세3. 매각4. 철거5. 현재6. 창작물에서의 등장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일본 도쿄 치요다구에 있던 호텔.

2. 상세

1955년 개장하고 2011년 폐장하였다. 실제 소재지는 미나토구 아카사카(赤坂)가 아닌 치요다구 키오이초(紀尾井町)이다.

원래는 영친왕이 일본에서 살 당시에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거주하던 저택이었다. 영친왕은 본래 메이지 덴노가 직접 하사한 도리사카 저택에서 살았으나, 1929년에 이 저택을 반환하고 그 대신 궁내성으로부터 아카사카 별궁에 인접한 토지를 증여받아 저택을 지었다. 도쿄 시내를 내려다보는 전망 좋은 장소였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경제적으로 생활이 어려워진 영친왕이 1954년 세이부 철도의 모기업인 '국토계획흥업'(国土計画興業)에 매각했고, 세이부 철도는 이 저택을 호텔로 개조한 뒤 1955년에 영업을 시작했다.[1]

옛 영친왕 저택인 구관 이외에 1983년에는 바로 옆 부지에 40층짜리 신관이 추가되었다. 신관 신축 이후 호텔 객실은 모두 이쪽으로 옮겨갔으며, 구관은 레스토랑과 결혼식장으로만 사용되었다. 영친왕의 아들 이구가 2005년에 이곳의 신관 객실에서 사망해 다시 한 번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전후 일본 정치사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곳으로 세이부 그룹의 오너였던 쓰쓰미가와 후쿠다 다케오 전 내각총리대신의 인연이 깊었던 관계로[2] 후쿠다의 사무실이 있었으며, 후쿠다파를 기원으로 하는 세이와 정책연구회의 본부격이었던 호텔이기도 하다.

3. 매각

대한민국 정부는 이곳을 한국대사관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이승만 정부는 덕수궁, 창덕궁처럼 이곳 역시 대한제국 황실의 재산이니 국고에 속한다며 영친왕 측에게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1950년 주일공사로 부임한 김용주 공사는 이 저택은 영친왕 개인 소유의 재산이므로 국고에 환수할 의무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김용주가 제안한 타협책은 재일 한국인들에게 성금을 걷어 영친왕에게 새 저택을 마련해 주고 건물을 양도받는 것이었다. 다만 영친왕과 이방자 모두 자택을 내놓기 꺼렸고, 이 문제는 일본국 정부와도 협의가 필요했던 사항이라 결국 합의에 실패하여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런데 1952년에 연합군 군정에서 벗어난 일본 정부가 그동안 징발해서 쓰던 각국 대표부 건물을 회수하자 김용주의 후임으로 온 다른 공사가 다시 영친왕에게 여기를 한국 대표부로 써야겠으니 저택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영친왕은 기가 막혔지만 딱 잘라 거절하지는 못하고, 공짜는 안 되지만 시가보다 싸게 넘기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하지만 한국 측에서는 들은 척도 않고 억지만 부리다가 나중에는 한 달에 과장급 회사원 월급(10만엔)도 안 되는 200달러(7만 2천엔)를 주겠으니 집을 비우라고 요구했다.

당시 이 저택은 1947년부터 참의원 의장 공관으로 월 30만엔[3]에 세를 주고 있었고, 영친왕 부부는 본래 하녀가 쓰던 방에 살고 있었다. 일본 정부가 아예 매입하려는 의사도 보였으나 한국 정부가 저렇게 버티고 있던 상황에서 영친왕이 팔지 않았다. 결국 협상 끝에 영친왕이 보기에도 어처구니없는 헐값인 40만 달러, 그중 선수금 20만 달러를 받기로 하고 협상이 끝났으나 한국 정부는 주기로 했던 돈을 한 푼도 주지 않고 시간을 끌면서 계속 집을 비울 것만 종용했다. 한국 정부에게 넘기려고 세입자(참의원 의장)도 내보낸 영친왕 일가는 수입이 아예 끊긴 상태에서 버티다 못해 일본인에게 4천만엔(11만 1천 달러)에 저택을 매각하게 된다.

당시 일본 정부가 메이지 덴노가 하사한 땅을 한국 정부에 넘기는 것은 곤란하다며 나섰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으나, 일본 측이 거래 자체를 방해한 흔적은 없을뿐더러, 이 땅은 궁내성이 증여한 땅이지 메이지 덴노가 직접 준 땅도 아니다. 따라서 굳이 한국 정부에 양도하려던 것은 영친왕의 호의였지만 한국 정부는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했고 매매는 성사되지 않았다. 한국 정부가 제시한 금액이 액수가 많은 편이 아니었던 것에 대해선, 당시 대한민국전쟁 중이라서 재정적으로 여유가 없던 상태라는 점, 무엇보다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 정부가 대한제국의 구 황실에 대해서 대단히 적대적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4]

4. 철거

1980년대까지는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들의 결혼식장으로 인기를 끌었으나 2000년대에 들어서는 새 초특급 호텔들의 등장으로 인기를 잃었다. 2011년에 결국 문을 닫았으며, 구관은 역사적 가치가 있어 보존되었지만 신관은 2012년 가을부터 2013년 6월에 걸쳐 철거되었다. 주변에 폐를 끼치지 않는 테코랩(Tecorep)이라는 신공법으로 철거한다고 해서 매스컴에 보도되기도 했다.[5] 동일본 대지진 때는 피난민 수용시설로 사용되기도 했다.
<rowcolor=#fff> 해체 당시 영상

5. 현재

파일:東京ガーデンテラス紀尾井町.png파일:도쿄가든 테라스 기오이초.jpg
<rowcolor=#fff> 더 프린스 갤러리 도쿄 기오이초 전경

철거 이후 그 자리는 '더 프린스 갤러리 도쿄 기오이초'라는 5성급 호텔로 재건축되어 2016년에 개장하였다.[6][7] 영친왕 저택이었던 구관은 호텔 재건축 과정에서 남동쪽으로 45m 이설하여 2016년에 연회장인 '아카사카 프린스 클래식 하우스'로 재개업하여 현재도 운영 중이다.[8]

6. 창작물에서의 등장

야쿠시지 료코의 괴기 사건부 제2권인 "도쿄 나이트메어" 편에서 사건의 시발점으로 등장하는 미나토 구 소재의 호텔 엠프레스가 이 호텔을 모델로 한다. 이름은 약간 다르지만 유명한 호화 결혼식장이고 "무슨 공작의 저택이 있던 곳"이라는 이 호텔의 연원에 대한 화자인 이즈미다 준이치로의 언급이 있는 것을 보면 이 곳이 맞다.

7. 관련 문서


[1] 세이부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주머니 사정이 궁핍해진 황족의 저택을 여럿 매입해서 호텔 사업을 시작했다. 이름을 프린스 호텔로 지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실제 저택을 구입한 것 외에도 황족 출신들을 고용하는 등 경제적인 원조를 많이 하였다. 이후 프린스 호텔이 국토계획흥산의 사업부에서 별도의 기업으로 독립한 것은 1971년.[2] 후쿠다는 쓰쓰미 그룹의 2대 총수인 쓰쓰미 요시아키가 결혼할 때 중매인을 맡기도 했다.[3] 여기서 세금으로 15만 엔을 제해야 했다. 이것도 당시 참의원 의장이 영친왕을 도와주고 싶어 평소에는 쓰지도 않는 집을 공관으로 빌린 것이었다.[4]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시절부터 대한제국의 구 황실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황실을 을사오적과 같은 급으로 보았으며, 나라를 일본에 팔아 넘기고 일가족이 일본으로 도망가 막대한 재산으로 호의호식을 했던 친일파와 다르지 않다고 봤다.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에는 구 황실의 재산을 모조리 몰수하고 해외에 있던 왕족들의 귀국도 막아버리는 등 푸대접으로 일관했다. 영친왕도 귀국을 시도했으나, 이승만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결국 영친왕은 이승만이 떠난 뒤 박정희 정권 시기인 1963년이 되어서야 한국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5] 기사[6] 기사[7] 메리어트 럭셔리 컬렉션으로 운영중이다.[8] 구글 지도에서 '아카사카 프린스 클래식 하우스'를 검색하면 일본어 이름에 괄호로 '旧李王東京邸'(구 이왕 도쿄 저택)이라고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