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 사건 사고 요약표 | |
발생일 | 1963년 8월 21일 |
유형 | 기체 결함[1], 연료 부족 |
발생 위치 | [[소련| ]][[틀:국기| ]][[틀:국기| ]] 러시아 SFSR 레닌그라드 네바 강 |
탑승인원 | 승객: 45명 |
승무원: 7명 | |
생존자 | 탑승객 52명 전원 생존 |
기종 | 투폴레프 Tu-124 |
항공사 | 아에로플로트 |
기체 등록번호 | СССР-45021 |
출발지 | [[소련| ]][[틀:국기| ]][[틀:국기| ]] 에스토니아 SSR 탈린 국제공항 |
도착지 | [[소련| ]][[틀:국기| ]][[틀:국기| ]] 러시아 SFSR 모스크바 브누코보 국제공항 |
사고기와 동일 기종 |
인양 당시 기록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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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Посадка Ту-124 на НевуЧудо на Неве (네바 강의 기적)
1963년 8월 21일에 소련 소속 아에로플로트 사의 민항기가 네바 강에 불시착한 사건.
노즈기어가 제대로 접히지 않아 회항하려다 연료가 다 떨어진 비행기를 네바 강에 착륙시켜 승객들을 구한 사건이다. 항공사상 최초로 수면에 불시착한 제트 여객기이고 사망자 제로인 사건이기도 하다.[2]
노즈기어가 제대로 접히지 않은 채 이륙했다는 사실을 안 파일럿이 분투하였고 결국 레닌그라드(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회항한다는 판단을 내렸으나 하필 연료가 고갈 직전이었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네바 강에 무사히 수면착수하는 기적을 일으켰다.
기록상으로 보면 US 에어웨이즈 1549편 불시착 사고의 선행격 사건이라고 볼 수 있으나 당시 철의 장막으로 덮여 있었던 공산권의 일화라 많이 알려지지 않아 묻혔다. 얼마나 존재감이 없었는지 46년 후에 발생한 US 에어웨이즈 사고가 최초로 수면에 불시착한 제트 여객기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을 정도였지만 US 에어웨이즈 사고가 보도되면서 이 사건도 재조명되었다.
2. 사고 진행
2.1. 뒤늦게 안 실수
승무원 7명과 승객 45명을 태우고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탈린 국제공항에서 이륙한 아에로플로트 항공 소속의 Tu-124 여객기(기체 등록번호: СССР-45021, 편명: 아에로플로트 366편(Рейс 366 Аэрофлота))는 모스크바를 향해 비행하던 중이었는데 당시 이 비행기는 소련에서도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새 비행기라 의미가 컸다.
그러나 이륙 직후 당연히 접혀야 할 노즈 기어가 제대로 접히지 않은 것을 빅토르 야코블레비치 모스토보이(Виктор Яковлевич Мостовой) 기장[3]이 뒤늦게 알아차렸다. 결국 탈린으로 회항해야 했으나 당시 탈린 상공은 짙은 안개로 뒤덮여 있어 시계확보가 어려워 착륙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항공 관제관은 기체를 근처의 레닌그라드의 풀코보 공항(Аэропо́рт Пу́лково)으로 회항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한 바퀴를 도는 데는 약 15분이 소요되었는데 그동안 풀코보 국제공항에서는 비상착륙을 준비하기 위해 근처 허허벌판을 활주로로 사용하기로 결정하고[4] 구조팀을 준비했다.
Tu-124기에서도 기장과 바실리 그리고리예비치 체체네프(Василий Григорьевич Чеченев) 부기장, 그리고 빅토르 차료프(Виктор Царёв) 항법사가 힘을 합쳐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어떻게든 노즈기어를 완전히 펼치기 위해서 이반 베레민(Иван Беремин) 무전기사, V. 스미르노프(В. Смирнов) 항공기관사, 알렉산드라 알렉산드로바(Александра Александрова)와 빅토르 하르첸코(Виктор Харченко) CA 등 승무원들이 전부 달려들어 노즈기어를 밀어대느라 콕피트 안은 난장판이 되었는데[5] 얼마나 뻑뻑했는지 옷걸이 봉을 떼어내 와서[6] 있는 힘껏 노즈기어를 밀어 봤을 정도였다.
그러나 기장과 부기장, 승무원들은 노즈기어를 펴는 데 집중한 나머지 연료 계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실제로 랜딩기어가 밖에 나와 있으면 공기저항이 늘어나 연료소모가 더 늘어나게 된다. 결국 12시 10분 여덟번째 선회 기동을 개시하자마자 양쪽 엔진이 전부 멈춰 버렸다.
하필 엔진이 멈춰 버린 상공은 성 이삭 대성당(собор преподобного Исаакия Далматского / Исаакиевский собор)과 옛 러시아 해군성 건물(Здание Главного адмиралтейство) 위였다. 자칫하다간 유형문화재[7]와 중요 국가 기관 위에 떨어지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고 소련 제2의 대도시 중심부에서 화재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결국 기장이 생각해낸 건 시내를 유유히 흐르는 너비 300m의 네바 강을 착륙 활주로로 삼는 것이었다.
기장으로서는 추락으로 인해 제2의 수도이자 대도시까지 파괴된다면 자신들도 순직함과 동시에 국가기관들이 즐비한 중심지가 아수라장이 되어 소련이라는 국가도 휘청일 수 있었다.
2.2. 목숨을 건 착륙
겨우겨우 착수한 Tu-124. [8] |
모스토보이 기장은 Tu-124기를 서서히 글라이더처럼 하강시키기 시작했으며 네바 강에 있던 리테이니 대교(Лите́йный мост) 300ft(91.44m) 위로 아슬아슬하게 지나간 다음 Tu-124기를 구부러진 네바 강을 따라 이리저리 선회시켰다. 볼셰오흐틴스키스키 대교의 거대한 철제 트러스 구조물을 겨우 100ft(30.48m) 차이로 스쳐 지나가면서 물 위에 안전하게 내려앉는 데 성공했다. 당시 착륙 계획 지점에는 큰 교각이 둘이나 있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실수해서 다리에 부딪혔다면 착륙은 커녕 승객과 승무원 모두가 사망할 수도 있었다.
불시착한 바로 그 자리에 예인선이 있었는데 거의 충돌할 뻔했지만 다행히 가까스로 충돌을 피했는데 이 예인선이 재빠르게 대처하여 불시착한 Tu-124기를 안전하게 강가까지 예인하였다.
불시착 후 객실 안에 서서히 물이 차고 있었는데 승객들은 기장과 부기장, 승무원의 지시에 따라 콕피트 창문을 통해 보트에 옮겨 탔고 기적적으로 단 1명의 사망자도 없이 모두 구조되었다.
3. 사고 원인
이륙 후 노즈 기어가 제대로 접히지 않아 회항을 시도하였고 착륙을 위해 노즈 기어를 펼치려 시도하였으나 시간이 지체되어 연료가 다 소모되어 버린 것이 원인이다.4. 사고 이후
기장과 부기장은 비행기 불시착 사고에서 사람들을 모두 살린 덕분에 별다른 일 없이 다른 보직으로 가서 일하다가 은퇴한 뒤 편안하게 여생을 살았다. 비행기도 마찬가지로 예인 후 정비를 받고 계속해서 운행하다가 은퇴 후 박물관에 잠들었다.이후 몇몇 민항기들이 비상착륙 또는 여러 이유로 강이나 바다 등에 착륙하는 일이 있긴 했으나 대부분 사상자만 발생했다. 20년이 채 못 되어 미국에서도 에어플로리다 90편이 워싱턴 D.C. 포토맥 강에 추락하는 사고가 일어나 8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33년 이후 코모로 제도에선 하이재킹당한 에티오피아 항공 961편이 바다에 비상착수했으나 175명 중 50명만이 목숨을 건졌는데 그 중 60~80명이 구명조끼를 먼저 부풀려 익사로 사망했다.
그러다 46년이 지난 2009년에는 미국 US 에어웨이즈 1549편에게 원인은 달랐지만 이 사례와 거의 똑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서도 승객들이 모두 무사히 구출되었다.
5. 그 외
5.1. 참고 자료
5.2. 유사 사고
[1] 조종사들이 노즈 기어의 결함을 해결하느라 남은 연료 계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유형에도 들어갈 수 있다. 노즈 기어가 조종사들의 바람대로 제대로 접혔다면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2] 최초로 수면에 불시착한 여객기는 팬 아메리칸 항공 6편이다. 이 사고도 사망자가 없었다.[3] 당시 27세밖에 되지 않은 신참 기장이었다.[4] 제대로 포장된 도로가 아닌 곳에 비행기가 착륙하면 동체 손상으로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5] 지금도 많이 달라지진 않았지만 소련 시절의 러시아의 항공기 조종간은 미국이나 유럽 항공기에 비해 꽤 뻑뻑했다고 한다. 게다가 조종석 장비나 객실의 장비들은 전부 기능 위주였지 편의 위주가 아니었다. 더욱이 당시에는 비행기 조종을 위한 오토파일럿이나 전자화 장비 같은 것도 없이 전부 수동이었다. Il-62 같은 당시 기준으로 중대형기조차 초기형은 오토파일럿도 없고 조종면 조작방식은 유압이 아니라 경비행기에나 쓰이는 와이어를 이용하는 조작방식을 사용했다. 몇 년 뒤 개량형이 나오고 나서야 유압장치와 오토 파일럿을 갖추게 되었다.[6] 러시아는 겨울옷 무게가 엄청나기 때문에 옷걸이를 아주 튼튼하게 만든다.[7] 국가 무신론을 내세운 소련이 종교에 대해 강도 높은 탄압과 제한을 하고 있었다지만 주요 랜드마크거나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대성당은 보존시켰다. 박물관이나 기념관으로 바꾸는 한이 있어도 이런 대성당들을 부수거나 폐쇄하진 않았다고 한다.[8] 저 멀리 커다란 볼셰오흐틴스키스키 대교(Большео́хтинский мост)가 보인다. 자칫했으면 저 다리에 부딪힐 뻔했다고. 게다가 착수 위치는 사고 2년 뒤 알렉산드르 넵스키 대교(Мост Александра Невского)가 있는 장소인지라 만약 그 대교가 이미 세워져 있었다면 대형 참사가 일어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