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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5 13:48:35

아사덕돈욕곡

阿史德暾欲谷
645년 ~ 725년

1. 개요2. 생애3. 비문4. 성을 쌓는 자 몰락하리라5. 드라마 <대조영>

1. 개요

돌궐 제2제국의 명재상.

튀르크어 본명은 '아시테 투뉴쿠크'(Tonyukuk). 한자로는 '아사덕 원진'(阿史德元珍)이라고 한다. 장열로부터 당나라의 명장들인 이정서적[1]과 같다는 평가를 받았다.

2. 생애

682년에 쿠틀룩이 흑사성에서 돌궐부흥운동을 일으키자 동조했으며, 이전 당의 관리로 근무한 적이 있었기에 당나라의 허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후에도 힐질리시가한을 따라서 당나라의 군사와 여러 차례 싸웠다. 691년에 묵철가한이 즉위하자 그를 따라서 여러 차례 싸웠다.

697년에 당나라에서 파견된 사신 전귀도를 협박했지만 전귀도가 절하지 않고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하기만 했는데, 이로 인해 묵철가한이 전귀도를 죽이려고 했다.

특히 묵철가한이 당나라의 수도 장안과 여러 지역을 유린할 때 뛰어난 전술을 많이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716년에 비가가한퀼테긴부구가한을 죽이고 찬탈했지만 돈욕곡은 모주로 임명되었으며, 지혜와 방략이 많아 사람들이 그를 믿고 복종했다. 비가가한이 즉위 직후에 당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자 이를 중지하도록 진언했으며, 720년에 당나라의 왕준이 발실밀과 함께 삭방군의 군사, 해족, 거란족의 군대를 이용해 돌궐을 공격한다고 해서 비가가한이 두려워하자 아장을 북쪽으로 옮기기만 해도 당나라는 도착하기 전에 식량이 떨어져 못 올 것이라 하면서 발실밀만 혼자 도착하면 공격하기 쉬울 것이라 했다.

발실밀만 혼자 도착해서 비가가한이 공격하려고 하자 집을 떠나 멀리 있어서 죽을 힘을 다해 싸울 것이라고 하며, 병사들을 시켜 뒤를 밟게 해야 한다고 했다. 아사덕돈욕곡은 그들의 뒤를 밟은 뒤에 군대를 나누어 샛길을 통해 포위한 후 공격해 격파했다. 또한 적정으로 나아가 양주의 양, 말 등을 약탈하고 양경술이 파견한 노공리, 원징 등을 격파했다.

3. 비문

궐특근, 비가가한과 함께 비문이 남아있다. 카라코룸 인근 후슈차이담(Khöshöö Tsaidam)에서 출토되었다.

원문과 영역본. 톤유쿠크의 비문은 2개의 석비로 되어있으며 동서남북 네 면에 다음과 같이 쓰여져있다. 영문 위키피디아

해당 비석에 중국은 '타브가츠'(Tabgach)라고 나오는데 북위를 세운 '탁발'(拓拔)선비부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왜냐하면 북위 이후 선비족이 한족들을 정복하고, 선비족 가문이 계속 지배계층으로 당나라까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과거에 굳어진 표현인 모양이다.

4. 성을 쌓는 자 몰락하리라

"성을 쌓는 자, 기필코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라는 말이 남아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말은 비문이 아니라 《구당서》와 《신당서》에 있다. 같은 내용이지만 《신당서》에서 말이 조금 더 간략해졌다. 물론 《구당서》와《신당서》는 당나라 찬양 일색이라 많이 각색되어 있다.
「不可. 突厥人戶寡少, 不敵唐家百分之一, 所以常能抗拒者, 正以隨逐水草, 居處無常, 射獵為業, 又皆習武. 強則進兵抄掠, 弱則竄伏山林, 唐兵雖多, 無所施用. 若築城而居, 改變舊俗, 一朝失利, 必將為唐所並. 且寺觀之法, 教人仁弱, 本非用武爭強之道, 不可置也. 」
안 됩니다. 돌궐은 인구가 적어서 당나라의 백분의 일에도 대적할 수 없고, 그런 까닭에 늘 대항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물과 풀을 쫓아다녀 사는 곳이 일정하지 않으며 사냥을 업으로 삼고 또한 모두가 무예를 익히는 것에 있습니다. 강하면 병사들을 진군시켜 노략질하면 되고, 약하면 산림에 숨고 엎드리면 당나라 병사들이 비록 많더라도 어찌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성채를 쌓고 산다면 옛 풍속을 바꾸는 것이라 하루아침에 이점을 잃으니 반드시 장차 당나라에 병합되고 말 것입니다. 또한 불교와 도교의 법은 사람의 성품을 어질고 약하게 만들어 본래 무력을 사용해 강함을 다투는 방책이 아니니 사찰과 도관을 설치해서는 안 됩니다.
─ 《구당서》<돌궐 열전> 상(194上) 위키문헌
「突厥眾不敵唐百分一,所能與抗者,隨水草射獵,居處無常,習於武事,強則進取,弱則遁伏,唐兵雖多,無所用也。若城而居,戰一敗,必為彼禽。且佛、老教人仁弱,非武強術。」
돌궐의 무리는 당나라의 백분의 일에도 대적할 수 없고, 대항할 수 있는 것은 물과 풀을 쫓아다녀 사냥하여 사는 곳이 일정하지 않고 무예를 익는 것입니다. 강하면 나아가 취하고 약하면 물러나 엎드리면 당나라 병사들이 비록 많더라도 어찌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성을 쌓고 살아가 싸움에 한 번 패하면 반드시 저들에게 잡히고 말 것입니다. 또한 불교와 도교는 사람을 어질고 약하게 만들어 무력을 강화하는 술책이 아닙니다.
─ 《신당서》<돌궐 열전> 하(215下) 위키문헌

파일:attachment/2011110416553915832_4.jpg
손주은이 이 명언을 사무실 화이트보드에 인용했다.

자크 아탈리의 책 《호모 노마드》(L'homme nomade)의 서문 인용구로 나오기도 했다.

5. 드라마 <대조영>

파일:톤유쿡.jpg

돌궐의 장군. 배우 김성훈이 연기했다.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 설인귀가 대조영과 손을 잡고 돌궐을 공격하겠다고 협박하면서 설인귀가 장안으로 돌아간다고 하자 묵철가한에게 이대로 돌려보내도 되냐고 물었고 묵철가한이 설인귀를 다시 데려오게 했다.

실제 역사에서는 일테리시 카간(힐질리시가한) 아시나 쿠틀룩의 돌궐 제2제국 건국 뒤 빌게 카간 대까지 활약하는 돌궐의 명재상이다.


[1] 본래는 '이적'이었으나, 측천무후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손자 서경업으로 인해 국성을 빼앗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