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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미리 마을
1930년대 일제가 식민지 조선 농촌을 통제하기 위해 추진한 농촌진흥운동이 바로 이곳에서 펼쳐졌다. 또한, 1970년대 박정희 전대통령 정부에서 실시한 새마을 운동당시 자립마을로 2 차례나 선정되었다.1970년대 아미리 인구는 약 600명이었으나, 2007년대 말에는 약 38,00세대, 약 7,900명이다.
1930년대 농촌진흥운동과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흔적과 현대 사회의 흔적이 모두 공존하는 마을이다.
1.1. 위치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아미리에 위치한다. 1983년 하이닉스 반도체(구 현대전자) 이천 공장이 건설된 곳과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1]
1.2. 구조 및 조직
하이닉스가 들어선 곳을 제외한 옛 마을은 나중에 형성된 새말과 먼저 형성된 큰말의 두 개의 자연촌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등 혹은 꼴딱고개라고 불리는 완만한 언덕이 두 촌락사이를 연결한다.초기의 아미리는 큰말만을 포함하였으며 큰말이라는 명칭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후 새말이 등장함에 다라 촌락의 명칭도 생겨나게 되고 국가 행정 제도에서 큰말과 새말을 아미리로 포함시키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일제시기 농촌진흥운동 당시 공회당이 세워진 자리에는 1999년 신축 공사를 통해 현 마을회관이 들어섰다. 현 마을회관으로 부터 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는 1978년 당시 새마을운동 시기에 건설된 구 마을회관이 위치한다.
아미리에는 3개의 대성씨가 존재하며 큰말에는 그중 2개의 대성씨, 새말에는 1개의 대성씨인 완산 이씨만 일가를 이루고 있다.
아미리 마을의 조직은 크게 마을 주민 전체를 아우르는 공식 조직과 마을 씨족 집단들이 운영하는 비공식 조직으로 구분된다.
1.2.1. 공식 조직
1.2.1.1. 대동계
마을 주민 전체를 아우르는 아미리 마을의 공식 조직.각 가호의 세대주들의 모임으로서 평등한 개인들의 결집체로 보기 힘들며 가부장권을 매개로 한 대표성의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천 지역에 위치하는 대부분의 마을에서 이러한 조직이 개최되고 있었다.
마을공동체의 운영을 위해 예결산과 같은 주요 안건이 논의 및 결정되는 곳이며 이장을 선출하는 곳이기도 하다. 대동제 구성원들은 이장 선출 권리를 가질 수 있으며 이에따라 이장세를 낼 의무도 함께 가지게 된다. 바비큐 파티와 함께 일종의 이장에게 주어지는 수고비인 이세를 납부한다.
공유재산에 뒷받팀되고 있으며 수억원에 해당하는 금전적 가치를 지니는 마을회관 2개, 정미소터, 구판장 등 이 존재한다. 이런 공유재산은 1930년대 농촌진흥운동, 1970년대 새마을운동 시기에 집중적으로 형성되었다.
일제시기에 대동계 하위 조직이 구성되었으며 부녀회, 청년회, 노인회(성별, 세대별 조직과 반상회), 개발위원회가 있다. 다만, 항상 활발한 활동을 진행한것은 아니며 시기에 따라 이름만 존재한 조직 이었던 경우도 있다.
1.2.1.2. 이장
농촌 지역 마을에는 이장이라는 지위를 통해 국가의 공식적인 행정기관을 벗어나 자치적인 행정보조를 하도록 한다. 이를 통해 행정 비용의 절감과 말단 행정의 효율성을 증대할 수 있다.아미리 마을에서 이장이 마을 최고 권력자가 된 것은 농촌진흥운동 시기 이후 이다.
이장의 급여는 자발적인 기금인 이세이다. 과거에는 벼 서 말씩 거두었지만 현재에는 이에 해당하는 액수인 3만 4천원을 이세로 거두고 있다.
1.2.1.3. 부녀회
오랜시간 이름만 존재하는 조직으로 여겨지다가 박정희 정부의 새마을운동을 통해 부활하여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부녀회 명의의 목화밭을 공동으로 경작하는 활동을 하였다.
또한 새마을운동시기에 국가가 이정을 거치지 않고 여성을 포섭 및 동원하는 것을 쉽게 만들 수 있었다.
1.2.1.4. 청년회
부녀회와 마찬가지로 오래전부터 조직되었지만 박정희 정부의 새마을운동 시기 이전에는 유명무실한 상태로 존재하였다. 박정희 정부의 새마을운동을 통해 부활하였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또한 새마을운동시기에 국가가 이정을 거치지 않고 청년을 포섭 및 동원하는 것을 쉽게 만들 수 있었다.
1.2.1.5. 개발위원회
다른 조직과 다르게 새마을운동 시기에 조직되었다. 마을 개발과 관련된 안건을 결정하는 기구이다. 도농 복합 마을인 아미이의 경우 개발위원회의 힘이 상당히 강하였다고 한다. 마을 이권과 관련된 대부분의 사안들이 개발위원회에서 결정되었다.1.2.2. 비공식 조직
씨족(경주 최씨, 영원 신씨, 평택 임씨)여러 성씨의 사람들이 아미리 마을에 살고 있다. 그 중에서 경주 최씨, 영원 신씨, 평택 임씨가 대성씨를 이루고 있다. 최씨에 비해 신, 임씨의 경우 훨씬 오래전부터 아미리 마을에 정착하였다. 그런지 최씨 보다 결속력이 떨어지고 씨족간 가까움도 적었다. 반면 최씨의 경우 입향한지 얼마 되지 않아 직계로 구성되며 숫자는 적지만 결속력은 높았다.
공식 조직은 사실 씨족이 탄탄하게 존재하고 뒷받침하고 있다. 이는 마을의 이장이 대성씨에서 선출 되었다는 사실이 증명한다.[2] 하지만 씨족의 갈등이 마을의 결속력을 약화 시켰던 경우도 있다. 일제시기 강력한 구장권을 중심으로 단합되어있었지만, 한국전쟁이 끝난 시기에 이장권을 둘러싸고 씨족 갈등이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1.3. 이장
1.3.1. 노구장
아미리 마을의 마을회관에는 2개의 비석이 존재한다. 그 중 하나는 기존의 근적비를 새롬게 만든 것 이다. 이 근적비의 주인공이 마을 내에서 노구장이라고도 불리는 최장환 구장의 근적비이다. 이 근적비는 공회당의 설립 시점에 그의 공적을 기려 제작된 것이다. 근적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적은 농사이시면서 근검저축하시여 계를 하시고, 한 마을을 어여삐 여기여 내 집같이 친히 하시고, 학업에 근면하심이 이웃마을에까지 성풍을 일으키시다. 오호, 이 공적 영원토록 빛나리다.”[3]
노구장의 당대 지도자로서의 생활 태도, 마을 사업, 학업 등을 기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업적을 모르는 아미리 마을 주민은 없다고 한다.1.3.2. 노구장 이후
이장은 대성씨에서 선출하여 대성씨의 권력을 기반으로 마을 지도에 뒷받침을 하던 구조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시대가 변할 수록 마을 외지에서 온 사람이 이장이 되는 경우도 있었으며 점차 이장의 나이도 젊어지기 시작하였다.대수 | 이름 | 초임나이 |
1대 | 최장환 | 60대 후반 |
7대 | 안봉학 | 33세 |
8대 | 신기영 | 31세 |
하지만 외지인 이장과 마을공동체는 긴장관계가 있었기에 6개월 만에 주민들의 반발 때문에 이장직에서 물러난 경우도 존재했다.
2. 아미리의 농촌진흥운동
2.1. 농촌진흥운동
농촌진흥운동(農村振興運動)은 조선총독부의 지휘아래 1932년부터 1940년까지 8년에 걸쳐 진행된 관제 농민운동이다. 자세한 내용은 농촌진흥운동에서 확인.2.2. 아미리의 농촌진흥운동
아미리 마을에서 농촌진흥운동은 최장환 구장이 주도하여 진행되었다. 그는 마을에서 노름을 금지하고 금주, 금연 운동을 벌였으며, 절미운동과 가마니 짜기등을 독려했다. 또한 마을 창고를 마련하고 벼 300석을 비축하여 가난한 농민들을 구하였다. 한마디로 근면, 성실, 협동과 같은 정신적인 가치들을 주민들에게 심어주고 마을 내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했다고 한다. 노름이나 낭비, 게으름 등 농촌 내 ‘폐풍’을 일소하고 근검절약의 ‘미풍’을 조성하려 하였다.노인네들한테 들었는데, 신하이 들어오는 쪽에 도갓집(술집)이 있어. 거기 가는 길 옆에 우물이 있었는데, 애들 시켜서 대병으로 술 받으러 가면 노구장님이 숲속에 숨어 있다가 술병이랑 돈 뺏고 대신 물을 한 병 담아서 보냈대.[4]
노구장이 주도한 마을 내 금주운동에 대한 일화이다. 위 사건은 많은 아미리 주민들로 부터 기억되고 전수되고 있다. 위 같은 이야기를 통해 노구장의 행동방식에 대해 잘 알 수 있다. 노구장이 수용한 근대화는 물질적인 욕망과 결부되어 있다. 그는 자신과 마을 대성씨들과 마을 사람들 속에 내재된 잘 살고 싶다는 마음을 욕구를 표출하도록 하여 마을 근대화 사업에 이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 개인적인 이득이 아닌 공적인 이득, 마을 구성원들과 마을의 발전이라는 공통된 목표였기에 어쩌면 독재라고 불릴 수 있는 그의 행동들이 마을 주민들에게 수용될 수 있었다.노구장의 주도하에 아미리 마을에서 진행된 운동은 아미리 마을이 처음 경험하는 농촌근대화 운동이었다. 하지만 아미리의 노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그 당시 조선의 많은 지역에서 아미리와 유사한 형태의 마을 근대화 움직임이 진행 중이었다. 당시 일제는 근검절약과 근면 성실을 강조하는 ‘농촌진흥운동’을 벌여나갔다. 기존의 역사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이 운동의 가장 큰 효과는 농민들의 경제적 빈곤을 식민지 지배 정책 문제가 아닌 농민 개개인의 개으름과 낭비적 생활태도에 기인한 것으로 책임을 돌린 점이다. 아미리에서 노구장이 주도한 운동도 일제가 주도한 농촌진흥운동의 주요한 운동과 비슷하게 금주, 금연, 절주, 절연, 부녀활동 권장, 마을 공동경작지 운영, 부패 퇴지와 거의 유사하다. 하지만, 아미리에서 벌어진 운동의 경우 책인 전가 보다는 ‘상호부조’, ‘자력갱생’ 등의 정신개조가 보다 강조되었다.
[1] http://www.kyeongin.com/main/print.php?key=386476[2] 현재는 대성씨가 아닌 다른 성씨에서도 이장이 나온다.[3] 최씨 중손가에서 직접 변역한 내용.[4] 마을 주민 방인봉, 200년 2월 12일자 구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