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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6 18:08:27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의 수상 이력
{{{#!folding ▼
1919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MVP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
}}} ||
브라질의 前 축구선수
파일:external/blog.futbologia.org/friedenreich1.jpg
이름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
Arthur Friedenreich
출생 1892년 7월 18일
상파울루
사망 1969년 9월 6일 (향년 77세)
국적
[[브라질|]][[틀:국기|]][[틀:국기|]]
신체 178cm | 체중 62kg[1]
포지션 스트라이커
소속팀[2] SC 제르마니아[3] (1909)
이피랑가 FC (1910)
SC 제르마니아 (1911)
맥켄지대학교 (1912)
이피랑가 FC (1913)
아메리카누 FC (1913)
CA 파울리스타누 (1913~1914)
아틀라스 (1914)
이피랑가 FC (1914~1915)
파이산두 SC (1915~1916)
CA 파울리스타누 (1916)
이피랑가 FC (1917)
CR 플라멩구 (1917)
CA 파울리스타누 (1917~1929)
SC 인테르나시오나우 (1929)
아틀레치쿠 산치스타 (1929)
산투스 FC (1929)
상파울루 FC (1930~1935)

산투스 FC (1935)
CR 플라멩구 (1935)
국가대표 23경기 10골 (브라질 / 1914~1925)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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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번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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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출생 및 초기 선수 생활2.2. 남아메리카 챔피언십2.3. 이후
3. 기록4. 플레이 스타일 & 평가5. 뒷이야기6. 수상
6.1. 클럽6.2. 국가대표6.3.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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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질의 前 축구선수.

축구 역사상 최초의 흑인 스타 중 한 명으로 1910-20년대를 풍미하고 1919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 득점왕, MVP를 독차지한 레전드이다. 축구 역사상 비공식 최다골 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 게다가 바나나 킥을 창시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2. 생애

2.1. 출생 및 초기 선수 생활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의 아버지 오스카르는 독일 출신의 부유한 상인이었고, 어머니 마치우지(Matilde)는 흑인[5]이었다. 그것 때문에 그는 흑인 사회로 편입되었다. 20세기 초 브라질에서 축구는 백인상류계층의 전유물이었다. 아르투르는 혼혈이었지만 아버지가 독일 출신의 백인 상인이었기 때문에 축구 클럽에 입단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르투르가 축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는 대천재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러니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아르투르의 아버지 오스카르가 아들 아르투르를 제르마니아 클럽에 입단시켜 축구를 시킴으로써 축구의 역사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는 최초의 축구 천재였죠.
알레샨드리 다코스타 박사, <축구의 역사>

아르투르가 17살에 제르마니아 클럽에 입단했을 당시 브라질 역시 인종차별이 극심했다. 백인 동료들과 같이 테니스 코트와 수영장 같은 편의 시설을 이용할 수 없었음은 물론 피치 내에서도 흑인 선수에 대한 파울에는 제대로 휘슬을 불어주지 않았다. 머리에 포마드 기름을 발라 흑인 특유의 곱슬머리를 감추고 망으로 눌러써서 머리를 가렸지만 피부색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그는 매번 상대선수들에게 거센 공격을 당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심한 파울로 쓰러진 아르투르는 문득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길거리에서 축구를 하다가 너무 축구에 몰두한 나머지 차에 치일 뻔한 적이 있었는데 다행히 마지막 순간에 몸을 돌려 사고를 피할 수 있었던 기억이다. 그 날 이후 아르투르는 자신만의 독특한 몸동작을 개발해 백인 선수들의 거친 수비가 아니라 공격을 피했다. 이런 플레이가 팬들을 열광시켰다. 안타까운 것은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이런 아르투르의 플레이를 기억하는 생존자도 그리고 그의 플레이가 기록된 영상도 거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는 브라질 대표팀의 최초 멤버 중 한 명이다. 공식적으로 인정되진 않지만[6] 7월에 펼쳐진 잉글랜드팀 엑스터 시티와의 경기에 선발 출전했지만 수비수들의 거친 플레이로 인해 치아 2개를 잃었다 전해진다.

2.2.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이런 특이한 몸동작과 폭발적인 득점력을 바탕으로 그는 초기의 브라질 대표팀에서 단연 돋보이는 선수로 성장했다. 하지만 초기 남미 축구의 양강이었던 아르헨티나우루과이의 장벽은 높았다. 그는 초대 대회에서의 실패를 딛고 1919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나가서 브라질 대표팀 역사상 최초로 국제 대회에서 우승을 맛보는데 성공했다.

그는 그 대회 최종 플레이오프에서 2차 연장까지 가는 접전[7] 끝에 2차 연장 2분 만에 아르투르의 결승골로 1대0 신승을 거두었다. 아르투르는 팀 동료 네쿠와 함께 4골로 대회 공동 득점왕에 올랐고 MVP는 그의 차지였다. 그것은 브라질 전국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이것이 영원한 축구의 나라 브라질의 전설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또한 브라질 신문 1면에 축구에 대한 기사가 실린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아르투르는 엘 치그리(El tigre)라는 애칭으로 불렸다[8]
그 때 당시를 돌아보면 아르투르가 축구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 때까지만 해도 브라질 언론은 경마에 대한 기사만 주로 다뤘습니다. 그런데 아르투르가 골을 넣고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까지 우승을 하자 구석에 몇 줄 실리던 게 고작이었던 축구기사가 신문에 대서특필되었죠! 아르투르는 축구를 인기 종목으로 만들었습니다.
알레샨드리 다코스타 박사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는 그 시대의 우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축구를 새로운 지위로 끌어올렸습니다. 아르투르의 이름은 라디오 중계를 통해 브라질 전역에 울려퍼졌고, 덕분에 브라질 사람이면 누구나 그를 알았습니다. 상류층부터 하층민까지 전부요! 아르투르의 성공을 보면서 국민들은 평범한 사람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브라질 축구는 획기적인 돌파구를 맞이했죠.
니콜라우 투마(언론인)

또한 그는 같은 대회에 참가했던 우루과이이사벨리노 그라딘과 함께 빼어난 활약으로 남미 대륙에서 인종차별에 대해 자성을 갖게 하기도 했다.

2.3. 이후

아르투르의 전성기는 소속팀 CA 파울리스타누가 1925년, 최초로 유럽원정 경기를 가졌을 때라고 할 수 있다. 열 경기에서 단 한 번도 패배를 허용치 않았고 특히 파리에서 열린 이 첫 경기에서 파울리스타누는 프랑스를 상대로 7:2 압승을 거뒀다. 유럽의 축구팬들은 CA 파울리스타누의 높은 수준에 놀랐고 그에게 황금발이라는 칭호를 선사했다. 그 중에서도 아르투르의 플레이는 신기에 가까웠다.
아르투르의 축구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단 한경기를 보고서도 말이죠. 아르투르는 이로써 왕 중의 왕이 되었습니다. 세계 축구의 왕 중의 왕이 된거죠!
알레샨드리 다코스타 박사

아르투르가 38살이 되던 1930년. 우루과이에서 제1회 월드컵이 개최되었고 아르투르도 당연히 선발 대상으로 거론되었다. 하지만 당시 상파울루 주 리그간의 분쟁으로 인해 아르투르의 참가는 무산되고 말았다.[9] 아르투르는 26년 동안 수많은 팀에서 현역 선수로 활동했다. 그가 43살까지 선보인 최고의 축구에 많은 팬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계 여러 나라의 기자들은 그의 플레이에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아르투르는 축구로 큰 돈을 벌지는 못했다. 다만 그의 전 소속 클럽 상파울루에서 감사의 표시로 집을 한 채 마련해 줬다. 1969년 9월 아르투르는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0] 브라질 축구역사상 최초의 슈퍼스타였던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는 그가 처음 축구 인생을 시작했던 도시 이곳 상파울루의 운동선수 묘지에 고이 잠들어 있다.

3. 기록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는 통산 1329골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이 기록은 우리가 잘 아는 펠레나 독일의 게르트 뮐러의 골 수보다 훨씬 많은 숫자입니다. 또한 아르투르는 처음으로 1000골 이상을 넣은 선수이기도 합니다.
롤랜드 로이(스포츠 통계 전문가)

아르투르의 1329골은 FIFA에 의해 인정받은 기록이다. 하지만 그 시절의 기록의 신빙성 그리고 공식 경기의 인정범위[11]가 다소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또한 그 시절의 레전드들이 골을 경기당 한 골씩 넣는 사람들이 뒤져보면 지금보다 더 많은 관계로 어쩌면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르투르는 그 시절의 축구 선수 중 골로 이름을 남긴 몇 안 되는 사람이며 그와 비슷한 기록을 가진 선수조차도 역대 축구역사를 뒤져봐도 펠레요제프 비찬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4. 플레이 스타일 & 평가

파란 눈을 지닌 이 물라토는 브라질식 축구 스타일을 정립했다. 그 자신이었는지, 아니면 발바닥을 파고든 귀신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는 영국식 축구의 교본을 파괴하고 말았던 것이다. 프리덴라이히는, 교외에서 헝겊 공을 차던 갈색 피부 청소년들의 무례한 축구 스타일을 백인들의 경건한 스타디움 안으로 옮겨 왔다. 그렇게 해서, 결과보다는 즐거움을 선호하는, 환상을 향해 열린 브라질식 축구 스타일이 생겨난 것이다. 프리덴라이히 이후에 정립된 진정 브라질다운 축구 스타일은, 리우데자네이루의 산과 오스카르 니에메예르가 설계한 빌딩들처럼 전혀 각지지 않고 부드럽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축구, 그 빛과 그림자' 중

스트라이커로서 갖춰야할 모든 것을 갖췄다고 한다. 몸이 마르고 빨라서 몸싸움을 하기보다는 몸싸움을 피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용감했고 빠른 스피드와 양발로 처리하는 정확하고도 강력한 슈팅으로 수많은 골을 넣었다고 한다. 또한 페널티 킥도 잘 차서 실축한 적이 없다고 전해진다.

5. 뒷이야기

6. 수상

6.1. 클럽

6.2. 국가대표

6.3. 개인



[1] 몸무게에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는데 52kg의 설도 존재한다. 마른 체형이긴 하지만 52kg이면 대략 한민관 수준이다.[2] 소속팀은 포르투갈어 위키를 참조했다. 초기의 축구팀들 중 상당수는 현재 프로축구팀으로서의 명맥이 끊겼다.[3] 현재 에스포르치 클루비 피녜이루스라는 이름의 종합 스포츠 클럽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위키피디아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 축구는 취급하지 않는다고[4]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5] 아버지의 밑에서 일하던 하녀라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세탁일을 하고 있었다는 카더라가 있다.[6]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브라질 대표팀의 첫 A매치는 2달 후에 펼쳐진 아르헨티나전이다.[7] 풀리그의 성적이 브라질과 우루과이가 2승 1패로 동일했던 관계로 최종 플레이오프를 치렀다. 최종 플레이오프에서는 재경기의 개념이 없이 승부가 날 때까지 연장전을 치르는 방식을 채택했다[8] 이 별명도 우루과이 사람들이 붙여준 것이다.[9] 상파울루 주 리그는 당시 2개의 리그로 쪼개져 있었다. 수상 기록에서 연도 옆의 명칭은 리그의 약어를 의미한다.[10] 펠레는 그로부터 2달 뒤 1000번째 골을 기록한다.[11] 60년대에 주로 뛴 펠레도 기록을 의심받는 형편이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1329란 숫자가 골의 숫자가 아니고 경기의 숫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다른 기록으로는 355경기 1395골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신빙성은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