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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9 02:18:50

쑹아이링

쑹아이링
정체자: 宋藹齡|간체자: 宋蔼龄
파일:宋藹齡.jpg
<colbgcolor=#362a2e><colcolor=#fff> 이름 간체: 宋蔼龄 / 정체: 宋藹齡
한국 한자음: 송애령
출생 1889년 6월 14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청나라 상하이
(現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시)
사망 1973년 10월 18일 (향년 84세)
파일:미국 국기.svg미국 뉴욕
국적 파일:청나라 국기.svg 청나라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학력 웨슬리언 칼리지 영문학
가족 아버지 쑹자수
여동생 쑹칭링, 쑹메이링
남동생 쑹쯔원
남편 쿵샹시

1. 개요2. 생애3.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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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의 정치인으로 쑹가문의 세 자매 중 맏이였다. 은행가였던 쿵샹시와 결혼을 했기에 별명은
돈을 사랑한 여인
이었다. 국부천대 이전 중국의 정치와 경제 전반을 장악하고 있었던 네 가문인 4대가족의 일원이었다.

2. 생애

감리교 목사이자 무역업자였던 아버지 쑹자수(영어이름 찰리 쑹)의 3남 3녀 중 장녀로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쑹자수는 신식교육을 받아 상당히 앞선 감각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여자도 조국을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다."
1904년, 장녀인 쑹아이링을 15세의 나이에 미국 조지아 주웨슬리언 여자대학으로 유학을 보냈다. 그녀는 그곳에서 영어영문학과 학사 학위를 따고 졸업한 후 중국으로 귀국했다. [1]

1912년 중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아버지의 친구였던 혁명가 쑨원의 개인비서가 되었는데, 쑨원은 그녀의 지성과 미모에 반해 아이링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지만 당연하게도 쑹씨 가족들의 반대로 인해 실패했다. 그녀는 쑨원으로부터 돌아서서 산서성의 부호 출신이었던 쿵샹시와 결혼을 했다.[2][3]

그후 쑹아이링은 자신의 미국 유학 시절 쌓아 놓은 인맥을 이용하여 남편인 쿵샹시의 사업을 번창하게 했고, 그 사업에서 모은 재산을 바탕으로 북양군벌에 로비를 해서 쿵샹시가 북양군벌 정권하에서 산동성 청도의 전신국장 등 다양한 직책을 역임하도록 했다.

장제스쑹메이링의 결혼에도 관여했는데 당시 쑹메이링은 장제스의 청혼을 받았을 때, 장제스를 대단한 인물로 생각하지 않고 거절했지만 쑹아이링은 장제스가 크게 될 것을 예상하고 쑹메이링을 설득해 장제스와 쑹메이링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그 후 모두가 알다시피 장제스는 중화민국의 총통이 되어 중국 대륙의 패권을 거머쥐게 되었고 그의 손윗동서였던 쿵샹시도 중화민국의 상무장관(1928년~1931년), 재무장관 (1933년~1944년) 및 중앙은행 총재(1933년~1945년)등 민국 정부의 요직을 맡았다. 당연히 아내인 쑹아이링 역시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화무십일홍'이란 말처럼 그녀의 권세도 끝이 났는데, 기나긴 중일전쟁이 끝나고, 쿵샹시가 부정축재 혐의로 실각한 후 그녀 역시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1947년 신병 치료를 위해 상하이를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떠났으며 뉴욕에서 수술을 받았다. 중국 대륙에 잔류한 남편 쿵샹시에게 미국으로 올 것을 권유했고 쿵샹시가 이를 따르면서 미국에서 재결합했다. 1954년 제2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에 쿵샹시가 부총통으로 출마하려다가 장징궈의 공격으로 낙마하면서 정치적으로 완전히 끝났다. 그 후 미국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1973년 10월 18일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만에 있었던 쑹메이링이 전용기를 타고 급히 달려와 임종을 지켰다.

3. 매체에서

파일:송가황조.png

1997년작 중국 영화 <송가황조>에서 양자경이 맡아 열연했다. 위의 사진 중 분홍색 옷을 입은 인물인데, 영화 속 쑹아이링의 결혼식 장면이다.


[1] 나중에 동생인 쑹칭링과 쑹메이링도 그녀를 따라 웨슬리언 여자대학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2] 쑹아이링이 쿵샹시와 결혼한 후 쑨원은 “아이링이 고리대금업자 놈에게 시집갔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이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곤혹스러워 했다고 한다... 쿵샹시는 전당포업에 종사하는 부모 밑에서 태어나 본인 역시 금융업에 종사했는데, 그래서 쑨원이 그를 고리대금업자라고 비난했던 것이다. 다만 쿵샹시는 우리가 흔히 고리대금업자하면 생각하는 악덕 사채업자라기보단 그냥 성공한 은행가에 가까운 인물이었다.[3] 물론 쑹아이링은 결혼과 동시에 쑨원의 개인비서일도 그만뒀으며, 그 자리를 동생인 쑹칭링이 이어받게 되었다 그리고 결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