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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6-05 19:53:41

신지드/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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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문 배경2. 장문 배경3. 악몽의 설계 #4. 숙주 #5. 구 설정
5.1. 구 단문 배경 15.2. 구 단문 배경 25.3. 구 배경

1. 단문 배경

신지드가 자운에서 가장 머리 좋은 화학자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는 지식의 한계를 돌파하는 데 자신의 삶을 몽땅 바쳤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았건만, 신지드에게 돌아온 대가는 너무 가혹했다. 바로 정신이 나가 버린 것이다. 광기를 얻는 방법이라도 알아낸 것일까? 신지드가 만들어 내는 혼합물은 실패하는 법이 거의 없지만, 사람들의 눈에 신지드는 이미 인간성을 모두 잃고 고통과 공포로 얼룩진 독극물의 자취를 남기는 사악한 과학자일 뿐이다.

2. 장문 배경

룬테라 전역에 속을 알 수 없는 광인으로 알려진 신지드는 처음에는 평범한 필트오버 태생의 인물이었다. 어린 시절 굉장한 지성과 끝없는 호기심을 보인 신지드는 자연계의 원칙과 상호 작용에 매료되어 이후 명문대로 유명한 필트오버 대학교에서 장학금까지 받게 된다.

신지드의 총명함이 인정받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신지드의 자연 과학 연구는 인상적이었고 심지어 획기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신지드는 마법공학이 발견된 이후 필트오버의 주목을 받지 못함을 깨달았고 마법과 기술의 융합이 가져온 기회마저 박탈당했음을 알게 되었다. 소외감을 느낀 신지드는 마법이란 세상이 흘러가는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혹은 어떻게 흘러가는지 신경조차 쓰지 않는 사람이 쓰는 목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학교에서 유행하는 이 새롭고 무지한 마법 열풍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신지드는 연금술의 무한한 잠재력에 파고들어 연구했지만 타고난 지성으로 얻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동료들의 조롱밖에 받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구 자금은 바닥이 났고 신지드는 대학뿐만 아니라 필트오버에서도 쫓겨나게 되었다. 신지드는 새 출발을 해야 했다. 그리고 새 출발지는 바로 자운이었다.

지하도시 자운은 생명의 값어치가 크지 않고 발명에 대한 수요는 높은 곳이었다. 신지드는 화학공학 관련 일을 빨리 구할 수 있었고 부도덕한 고객들을 위해 그의 기술과 끝없는 열정을 퍼부었다. 도덕적이라고 할 수 없는 신지드의 실험은 여러 목표물을 대상으로 삼았다. 인간과 동물을 증강하고 또 그 둘을 합쳐 증강하는 등 수많은 실험을 거듭했다. 신지드는 자신의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이 새로운 분야를 추진해 나갔다. 생체에 필요한 화학 물질이 무엇인지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신지드는 끝내 쓰러져 떨며 허약한 상태로 며칠 동안 잠만 자더라도 한 번에 몇 주 동안 각성 상태를 유지해 일할 수 있도록 하는 흥분제를 만들었다.

신지드가 연금술에 대한 집착과 노력을 지치지 않고 이어 갈 수 있었던 것은 후원자와 고객이 끊이지 않았던 덕분이었다. 후원자와 고객 중에는 녹서스의 워메이슨까지 있었다. 필트오버와 자운 전역에는 녹서스 제국과 제국의 대장군이 군사 작전을 위해 슈리마 북쪽으로 향하는 통로를 이용하는 대가로 필트오버에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고 있어 파산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리고 곧 그들이 돈이 덜 드는 새 점령지를 찾게 될 것이라는 소문까지도. 신지드는 보수를 받는 한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작고 잡다한 프로젝트를 거치며 몇 년이 흘렀다. 어느 날 녹서스군의 사령관 에미스탄이 신지드를 찾아왔다. 아이오니아 전쟁의 지독한 교착 상태를 끝내기 위해 신지드와 계약한 에미스탄은 새로운 무기를 얻고 싶어 했다. 누구도 본 적 없는 그런 새로운 종류의 무기 말이다. 에미스탄은 신지드에게 엄청난 사례를 약속했다.

신지드는 모든 일을 내려놓고 그의 지성과 지식, 경험을 모두 쏟아부어 새로운 무기 제조에 힘썼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불안정하고 끔찍한 연금술의 불이 탄생했다. 아이오니아에서 녹서스의 적군을 상대로 처음 선보인 이 불은 바위를 쪼갤 수 있을 만큼 뜨거웠고 강한 쇳독으로 땅을 뒤덮었다. 땅은 아무것도 자랄 수 없을 만큼 오염됐다. 에미스탄의 군대마저 충격을 받았지만 누구도 에미스탄과 신지드를 전범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신지드는 자본과 재료, 심지어 실험 대상까지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시간의 무게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더욱더 극단적인 생체 실험에 초점을 두었다. 그러나 동물, 인간, 기계를 합체하는 실험을 진행하던 중 실험실이 폐허가 되었고 신지드는 얼굴을 붕대로 감아야 했다. 실험체가 빠져나가 자운의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지만 신지드는 단념하지 않았다.

신지드는 이미 육체의 파멸에 대해 숙달한 상태이고 육체를 보존하여 변형하는 데까지 연구하고 있다. 어쩌면 필멸을 피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도 말이다.

3. 악몽의 설계 #

제1088번 실험체

평범한 시민으로 가장해 군중 속에 숨어 있던 살인자 하나를 입수. 그 마음속에 살아 숨 쉬며 자유를 갈구하는 야수는 오직 단련된 눈으로만 알아볼 수 있다. 그런 열망을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과학을 통해 삶 속에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인데? 실험체를 완전히 제압하는 데에 일반적인 투여량의 두 배가 소요되었다. 인상적인 저항력. 실험체가 대 촉매제가 주는 고통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실험체의 신체 변형을 유발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자질이다. 실험체는 변형 과정을 통해 자운 전역을 사냥터로 삼는 가공할 야수로 탈바꿈할 것이다.

증강체

이식을 위해 실험체 수술 준비. 양쪽 견갑골 부위를 수술하기 위해 아이오니아 작전 때 알게 된 수술 기법을 실험해 보았다. 변형 촉매제를 투여하기 위한 연금술적 기계실과 펌프를 연결하려고 뼈를 손보는 데 꽤 오랜 시간이 소요. 실험체는 자신은 더 이상 괴물이 아니며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애원했다. 방해하는 소리를 무시하고 몇 가닥의 정교한 관을 여러 동맥과 정맥에 연결했다. 실험체는 6시간 동안 의식이 있는 채로 비명을 질렀다. 앞서 실패했던 실험체들에 비해 훨씬 오래 버틴 것으로,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척추 신경 섬유에 기계 증강체를 결합시키는 것으로 수술을 마무리. 봉합할 때는 몇 바늘 꿰매지 않아도 되었다. 실험체는 안정적으로 회복 중. 나는 내일의 시술을 위해 휴식을 취해야겠다.

대 촉매제

실험체가 기가 죽어 있고 작은 움직임에도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임. 기계실에 변형 촉매제가 채워지고 기계가 활성화되는 것을 보더니 족쇄를 풀어보려고 몸부림쳤다. 기계는 연금술적 화합물을 주입할 준비를 마치고 다음 단계를 실행했다.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첫 몇 방울에 반응해 혈관이 수축하고, 실험체의 몸이 떨렸다. 기계의 피스톤이 혈관에 촉매제를 넣자 실험체가 격렬하게 요동쳐 수술대를 거의 넘어뜨릴 뻔했다.

미리 세웠던 가설대로 고통은 촉매의 작용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촉매는 실험체의 해부학적 구조를 변형시키기 위한 일련의 화학 작용을 촉발시켰다. 뼈와 힘줄이 부서지며 골격이 다시 형성되었다. 그러더니 뾰족한 조각이 실험체의 한쪽 손목을 뚫고 나왔다. 실험체는 족쇄에 묶인 채 온몸을 비틀고 팔을 당겨댔다. 결국 손이 분리되었고 실험체는 비명을 지르다 몸이 뻣뻣하게 굳으며 털썩 쓰러졌다. 변형은 실패했다. 나는 상처 부위를 지혈하고 실험체의 바이탈을 안정시켰다. 통증에 대한 이 실험체의 인내력을 너무 과대평가했던 것 같다. 수치를 재조정해서 내일 다시 시작해야겠다.

분리된 손

실험실에 돌아와 분리된 손이 아직 바닥에 있는 것을 발견. 놀랍게도 부패나 강직의 징후를 보이지 않았다. 실험체의 손목 부분도 관찰했다. 그는 욕설과 협박을 퍼부었다. 강화된 공격성은 연금술적 화합물의 영향을 보여주는 긍정적 신호이다. 그러나 가장 충격적인 변화는 실험체의 붕대 아래에 숨겨져 있었다. 원시 상태의 손. 원시 상태의 기형적인, 그러나 공격 기능의 관점에서는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 심지어 시술이 중단된 후 수 시간이 지난 지금도 기형적인 뼈의 재생 속도보다 빠르게 살이 계속 돋아나고 있다. 촉매제가 작용할 시간을 좀 더 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새로운 설계

원시 손의 이미지가 꿈에 나타났다. 공격이라는 유일한 목적을 위한 이 아름다운 손은 비극적 실패로 인해 성장을 멈추었다. 그렇지만 뭔가 할 수 있는 게 더 있다면? 번쩍이는 영감에 잠을 깼다. 금속공학. 금속공학은 화학공학만큼의 정교함은 없을지 모르지만, 어젯밤 내 목적을 이루는 데는 충분했다. 동이 틀 때까지 철을 벼리고 가장자리를 날카롭게 다듬고 망치질해서 뼈대를 만들었다. 이 뼈대는 새 손이 자라나는 데 필요한 구조물로서 일종의 지지대 역할을 해줄 것이다. 자연이 일단 설계도를 제공해주기만 하면, 그다음 진보를 이루어 내는 것은 쉬운 일이다.

강화

시술에 제약 사항이 많은 탓에 실험체를 마취시키고 신속하게 작업해야만 했다. 원시 손에서 새로 성장한 흔적을 발견했다. 변화의 속도는 느려졌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기형적인 손의 근육 조직과 혈관, 그리고 가느다란 신경의 끝부분을 뼈대에 연결했다. 새로 증강한 부분을 연금술적 기계실과 연결하는 것으로 시술을 끝냈다. 가장 작은 손가락이 살짝 경련을 일으키는 모습이 관찰되었다. 실험체를 옮기고 족쇄를 다시 채웠다. 강화할 것이 또 남았던가? 산책이나 하면서 잿빛 대기의 바람을 좀 쐐야겠다. 생각할 것이 많다.

변형

경계 구역 시장에서 돌아왔는데 익숙한 악취가 났다. 실험체의 등 전체에 말라붙은 정맥의 지류가 여기저기 퍼져 있다. 뼈와 금속 기계실의 접합부에서 감염이 발생한 것이다. 약을 만들어 이번 회차의 촉매제에 넣고 주입했다. 기절한 상태였던 실험체는 뼈가 모두 부서지고 골격이 재생되기 시작하자 비명과 함께 깨어났다. 짐승과 같은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야수의 특성이 드러나는가 싶었는데, 변형 과정이 천천히 사그라들더니 고요해졌다.

기계실의 출력을 높여 보았다. 기계실은 강하게 진동하며 심장 박동 수마다 두 배의 촉매제를 주입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실험체의 몸이 뒤틀렸고, 살은 속에서 일어나는 급격한 변화로 요동쳤다. 밀폐된 용기 안에서 촉매제가 소용돌이치자 기계실은 우르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압력은 계속 상승했고, 결국 모든 관과 밀폐 장치와 혈관이 부서지고 말았다. 쨍그랑거리는 금속성의 소리가 나며 실험체의 족쇄가 떨어져 나갔다.

다음 순간 실험체는 상처가 벌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분노하며 내 얼굴을 향해 돌진했다. 우리는 잠시 뒤엉켜 싸웠지만 그는 곧 축 늘어지더니 쓰러졌다. 그의 입에서 단어 하나가 흘러나왔다. 모든 삶의 징후가 사라지고 마침내 움직임이 멈추었다. 심장 박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부식성 용액을 실험체의 왼팔에 여러 번 떨어뜨렸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실험체 사망. 실험체를 밖으로 끌고 나가서 지하 동굴에 버렸다. 열등한 생물체가 과학의 진보를 또 이렇게 방해하는군. 실패조차 지식의 광대한 바다를 넓혀준다는 사실이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다.

침입자

지난 밤 소동이 일어났다. 실험실에 도착해서 뒷문이 경첩째 뜯겨 나간 것을 발견했다. 그 무거운 나무문이 온통 쪼개져 불쏘시개가 되어 있었다. 실험실 내부의 장비와 기구도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부서진 모든 물건에는 날카로운 금속으로 깊게 찌르고 길게 벤 자국이 남아 있었다. 수 시간 동안 그 흔적을 비교해보고 관찰한 결과 결론을 얻었다. 실험체가 돌아온 것이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모른다. 이미 내 마음속에는 무수히 많은 질문이 생겨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야수를 찾아내 새 단계로 진입하기 전 먼저 실험실을 새로 구해야 한다. 실험체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단어가 뭐였지? 이름인가? 거기서부터 연구를 시작해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봐야겠다.

4. 숙주 #

파일:singed-colorstory.jpg

난 죽을 것이다.

불규칙하게 끊기는 숨을 쉴 때마다 괴로웠다. 누군가 녹슨 톱으로 내 가슴을 열어 그 틈을 이빨로 채운 느낌이었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그자'의 짓이었다.

그자가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차마 볼 수 없었다. 눈물이 고인 눈으로 벽돌 천장에 자그맣게 난 채광창을 응시하며 변한 내 모습 외에 뭐든 보려고 애썼다. 저 너머에는 내가 살던 도시 자운이 있었다. 하지만 분주히 움직이는 수천 명의 사람 중 내가 사라졌다는 것을 아는 자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전의 나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딸깍

녹음 장치가 켜지고 밀랍 실린더가 서서히 돌아가자 다시 숨이 턱 막혔다.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가 말했다.

"실험체 '생각하는 자'의 기능은 손상되었다. 하지만 아직 청력과 인지력이 남아 있다."

딸깍

눈에 고인 눈물과 관찰용 창의 두툼한 녹색 유리 너머로 이름을 알 수 없는 남자의 모습이 기괴하게 뒤틀려 꼭 반쯤 녹은 밀랍처럼 보였다. 푹 꺼진 짝짝이 눈이 창백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뚝뚝 떨어졌다. 남자가 내 상태를 자세히 보기 위해 창 뒤에서 쉬지 않고 서성이자 그 움직임에 맞춰 남자의 입을 가린 붕대가 커졌다가 작아졌다.

내게 머물던 남자의 예리한 시선이 감방 구석에서 낮게 끙끙거리고 있는 존재에게로 돌아갔다. 그곳을 돌아보자 거대한 형체가 슬슬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빛나는 파이프와 관이 그것의 팔뚝을 이리저리 휘감아 관통하고 있어서 안 그래도 커다란 팔뚝이 두 배는 더 커 보였다.

나처럼 위축되고... 변한 저 짐승 같은 자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날 반으로 뚝 부러뜨릴 수 있었다.

딸깍

"실험체 '부수는 자'가 4시 6분에 의식을 되찾았다. 예상보다 빠르다. 조짐이 좋다! 실험은... 4시 7분에 시작한다."

딸깍

안 돼. 안 돼, 안 돼! 또 실험이라니.

딸깍

"기준선 정립 중. 생각하는 자, 지금부터 내가 하는 질문에 가능한 한 빠르고 정확하게 답해라."

"무슨—"

"첫 번째 질문이다. 네 본명이 뭐지?"

"안 해! 내 말 들려? 당장 날 풀어 줘. 난 협조할 생각 없어. 이런 역겹고 뒤틀린..." 내 말이 점점 작아졌다.

딸깍

남자가 녹음 장치의 송화구를 내려놓더니 밸브가 모여 있는 창문 가장자리로 향했다. 나나 구석에 있는 존재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한 밸브를 돌리자 얼음장 같은 지하동굴 물이 거세게 쏟아져 들어와 날 벽으로 내동댕이쳤다.

입에서 비명이 나오는 것 같다.
영원 같은 시간이 지난 후 위축된 손과 무릎을 덜덜 떨며 숨을 쉬려고 헐떡였다. 천천히 빠져나가는 물속에서 매달릴 곳을 찾으려고 바닥을 더듬거리던 그때 손목에 뭔가 걸려 반사적으로 팔꿈치가 구부러지자 얼굴부터 바닥에 처박혔다.

난 생경한 고통으로 타오르는 팔을 붙잡고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때 가슴과 바닥 사이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것은 날카롭게 꿈틀거렸다. 마치 내 밑에 깔린 울론 전갈이 날 할퀴고 달아나려고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몸을 굴렸지만 그 감각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나에게, 내 맨살에 붙어 있었다. 할퀴고 꿈틀거리며 이리저리 움직이는 소리에 구역질이 났다. 난 발길질과 함께 손톱을 휘두르고 소리를 치면서 그것을 떼어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지겹군."

손이 피투성이가 됐다. 손목이 뭔가 이상했다. 몸에 붙어 있는 것도 떼어 낼 수 없었다. 가시와 갈고리가 잔뜩 달린 그것은 마치 내, 내 가슴에 파고든 것 같았다.

가슴에 이빨이 있었다.

이제야 기억났다. 몸에 전갈이 붙은 게 아니었다. 그 남자가 한 짓이었다. 남자는 내 몸을 갈라 날 다른 존재로 만들었다. 양쪽 손목에는 흡입 송곳니가 이식되었고, 목부터 허리까지는 무언가를 갈구하는 촉수 두 개가 달려 있었다. 남자는 내가 이것을 이용해 나와 함께 갇힌 존재를 물었으면 했다.

남자는 우리를 녹슨 철제 들것에 함께 묶어 놓은 적이 있었다. 빠른 속도로 바늘을 움직이며 무자비하게 우리를 하나로 이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수술과 화학공학으로 내게 주입한 본능이 모습을 드러내길 바라며 '과정'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자 모든 것이 깜깜해졌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내 '숙주'가 되어야 할 존재와 함께 갇혀 있었다.

딸깍

"실험체가 초기 자극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기초 질문을 재개한다. 생각하는 자가 본명을 말하지 않는다면—"

"제발 그만해. 이 정도면 됐잖아!" 나는 소리쳤다.

"시간과 강도는 두 배로 늘어날 것이다. 아니, 세 배가 좋겠군."

딸깍

남자가 날 똑바로 바라봤다. 눈만 보고는 붕대로 가린 입이 웃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남자가 다시 밸브를 잡았다. 난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깨달았다. 몸을 숨길 곳도 붙잡을 곳도 없었다. 배관이 우르릉거리자 가능한 한 몸을 작게 말고 숨을 깊이 들이쉴 수밖에 없었다.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온 찬물이 거세게 부딪치자 폐에서 공기가 터져 나왔다. 난 표면에 이리저리 부딪혔다. 위아래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발목에서 쿡쿡 쑤시는 통증이 느껴졌다. 마침내 물세례가 끝나자 난 몸을 비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요동이 멈추자 꼼짝 않고 널브러져 있었다. 남은 물이 방에서 빠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내가 그 어느 때보다 약하게 느껴졌다.

난 죽을 것이다.

쾅. 화학 물질에 절은 감방 동료가 관찰용 창을 강타하는 소리에 몸이 움찔했다. 분노의 화신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거대한 강화 주먹으로 유리를 치는 그것의 목구멍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원시적 고함이 터져 나왔다.

유리와 그 뒤에 있는 괴물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부수는 자'로 불리는 성난 야수를 피해 움직이지 않는 몸을 간신히 끌어 조용히 반대편으로 갔다. 계속해서 유리를 치는 야수의 주먹에서 피가 났지만 유리는 부서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완고한 건지 멍청한 건지, 그것은 포기하지 않고 주먹을 날렸다. 노호가 잦아들어 말 없는 흐느낌으로 변한 후에도 부어오른 주먹은 멈추지 않았다.

딸깍

"부수는 자의 근력은 화학흡입 근육 강화 시 예상한 범위 내에 있지만 문제 해결 능력은 그다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딸깍

우리의 고문자는 부수는 자의 상처에서 나온 피로 얼룩진 유리 반대편을 무감정하게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날 돌아보았다.

딸깍

"반면 생각하는 자는 빨리 이름을 말할 수도 있었지—"

"내 이름은 하드리야! 하드리 스필웨더. 난 사람이지 그놈의 '생각하는 자'인지 뭔지가 아니야." 난 남자의 마음에 남아 있는 일말의 연민이라도 이끌어 내기 위해 손을 뻗었다. 거짓말이라도 지어내야 했다. "난 아들이 있어! 그 앤... 두 살배기야. 날 애타게 찾고 있을 거라고."

"아들?" 붕대를 두른 남자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름이 뭐지?"

"로, 로크야. 로크 스필웨더. 정말 귀엽고 누구보다—"

"그만. 넌 가족이 없어. 전부 네가 앓고 있는 그 유전병 때문에 노화가 가속되고 온갖 비참한 병증에 시달리다가 명이 다했지. 지난 13년 동안 넌 자운 과학원에서 네 말을 들어 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붙잡고 귀찮게 굴면서 치료 방법을 찾아다녔어. 아니, 구걸하고 다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군."

물처럼 차갑게 밀려드는 그 말에 머리가 멍해졌다.

"그런데도 내가 준 특별한 선물을 반항과 쓸모없는 데이터로 보답하다니." 남자는 화가 나 보였다. "넌 앞으로 살날이 5년 남았다고 예상했지.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아니야. 기껏해야 3년만 있으면 침을 질질 흘리며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신세가 될 테니까. 네가 누나와 아버지에게 했듯 널 돌봐 줄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남자의 말이 맞았다. 치료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은 말 그대로 희망에 불과했다. 과학원은 날 도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지만 모두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있었다. 다들 자신이 매달리거나 욕심을 부리는 연구가 있었다. 난 그저 널리고 널린 가망 없는 불쌍한 외톨이일 뿐이었다.

난 죽을 것이다.

"하지만 죽을 필요는 없어."

난 남자의 눈을 휙 바라봤다. 이 감정은... 혐오? 증오? 분노? 희망이다. 어떤 근거로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나는 간신히 물었다. 결국 물어봤다는 사실이 역겨웠다.

그는 말로 답하지 않았다. 그저 몸을 둥글게 말고 나와 함께 갇혀 있는 형체, 부수는 자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까딱할 뿐이었다. 부수는 자는 피가 나는 손을 붙잡고 앞뒤로 몸을 흔들며 우리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말을 못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근육질로 이루어진 부수는 자의 몸은 나보다 무게가 세 배는 더 나가 보였다. 그것도 팔에 저 알 수 없는 증강체를 달기 전의 얘기였다.

부수는 자와 함께 들것에 묶였을 때가 떠올랐다. 우리는 똑같이 갇힌 신세였다. 괴물처럼 강화된 힘만 제외하면 둘 다 무력하긴 마찬가지였다. 붕대를 두른 남자는 내가 부수는 자에게 들러붙기를 바라는 것일까? 부수는 자를... 버팀대로 삼도록? 살아 있는 보철 장치로 삼도록?

스스로 한 생각에 속이 메스꺼워졌다. 나는 부수는 자로부터 허둥지둥 멀어지며 헛구역질했다.

"실망스럽군." 남자는 지루한 듯 말했다. "네게 3년은 너무 멀게 느껴지는 모양이야, 생각하는 자. 그럼 더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 주지. 지금처럼 약해진 상태에서는 아까와 같은 자극을 받을 때마다 여기저기에 골절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 네 번만 더 자극하면 거의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돼서 물에 얼굴을 박고 아주 천천히 익사하게 될 테지."

남자는 유리를 통해 음흉한 시선을 던졌다. "지금까지 관찰한 결과를 보건대 꽤 고통스러운 일이 될 거야."

딸깍

방이 너무 작았다. 숨을 쉬기 힘들었다. 부수는 자가 관찰용 창을 마구 치는 것처럼 심장이 갈비뼈를 미친 듯이 두드렸다.

부수는 자와 시선을 마주하자 부수는 자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상황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두 눈에는 나와 같은 공포뿐 아니라 연민과 흡사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사람과 이어져 있다는 것을 느낀 순간이었다. 날 가둔 남자보다도 훨씬 더 인간적이었다.

난 남자의 차갑고 계산적인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는데? 그렇게 한다면..."

딸깍

"외부 기생 결합이 진행되면 결합체의 특성, 숙주 등에 대한 기생체의 행동 변경 능력 범위, 결합한 초개체의 회복력에 관한 검사를 실시할 것이다. 실험은 종료되고 이것도..." 남자가 방, 관과 밸브, 관찰용 유리창을 가리키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전부 끝나겠지."

딸깍

난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일이라도 되는 양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문뜩 현실을 깨달았다. '개체의 회복력을 검사한다.' 그 말은 즉 메스로 죽을 때까지 고문하겠다는 뜻이었다.

이것은 치료가 아니라 사형 선고였다.

아주 조금씩 몸을 움직여 차가운 벽돌 벽을 끌어안고 간신히 일어선 나는 이미 부러진 발목 때문에 잠시 숨을 헐떡이며 비틀거리다가 몸을 돌려 창밖에 있는 적을 마주 봤다.

"싫어."

긴 침묵이 흐르자 자운의 소리가 들려왔다. 배관에서 떨어지는 물소리, 멀리 있는 펌프, 잠들지 않는 기계가 편안한 저음으로 울리는 소리였다. 어렴풋이 다섯 번째 종이 울리는 것도 같았다.

난 남자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남자의 행동에 초연할 수는 없었다.

딸깍

"실험체가... 비협조적이다."

딸깍

남자가 밸브를 끝까지 돌렸다.

고통스럽다. 산처럼 덮쳐 온 물이 나를 벽, 천장, 바닥으로 이리저리 내동댕이쳤다. 더는 어디가 위고 아래인지 알 수 없었다. 소음만이 있었다. 어둠만이 있었다. 고통만이 있었다.

그때 빛이 나타났다.

너무 밝아 눈꺼풀 뒤의 세상이 금빛으로 변할 정도의 빛이었다. 허파를 울리는 폭발음이 들렸다.

그리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바닥에 엎어진 채 정신을 차렸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쑤시고 미친 듯이 추웠다. 난 위를 올려다보았다.

뭔가 변했다. 기세가 약해졌지만 배관에서는 계속해서 물이 쏟아졌다. 천장 근처에 뚫린 구멍에서 빛이 흘러들어 왔다. '탈출구인가?' 노란빛이 몇 번 더 번쩍이더니 멀리서 폭발음이 뒤따랐다.

귀에서 맴도는 울림을 뚫고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포에 질린 나는 그것이 부수는 자가 내는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얼굴을 감싼 부수는 자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렀다. 부수는 자는 벽으로 돌진하더니 휙 돌아 물속으로 자빠졌다.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허둥지둥 구멍 쪽으로 다가가려고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목에 박힌 송곳니가 물 아래 돌에 긁히자 이를 악물었다. 쑤시는 손가락으로 바닥을 긁어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뭔가 걸린 게 있는지 확인하려고 몸을 뒤틀었다.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떨어진 잔해 덩어리가 허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위험하지만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는 저 구멍에서 떨어져 나온 듯했다. 잔해를 발로 찼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밀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난 최선을 다해 꿈틀거리고 미약하게나마 몸을 움직이며 소리를 질렀다. 서서히 잔해가 옆으로 굴러떨어지며 물속에 빠졌다. 주변에서 차오르는 물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실험은... 5시 2분, 아니, 3분에 끝났다."

고개를 돌리자 붕대를 두른 남자가 창문에서 멀어지며 시야에서 사라지는 게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이 나갔다. 갑작스러운 폭발, 내 마비 아니면 반항 중 어떤 변수 때문에 그렇게 신경 쓰던 실험을 내던지고 물을 쏟아 내는 것인지 궁금했다.

망할 자식.

난 잔해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내 피는 어둑한 자운의 불빛에 비쳐 검게 보였다. 속에서 열이 빨려 나가 안쪽부터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흐느낌. 부수는 자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부수는 자는 절망에 빠진 돌덩어리처럼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팔에 감긴 관이 희미한 초록빛을 발했다.

난 목소리를 낮췄다. "이, 이봐."

부수는 자가 휙 고개를 들었다. 유리 뒤의 남자가 팔에 설치한 관에서 희미한 빛이 나와 엉망이 된 눈 주위의 검은 줄기를 비추었다. 부수는 자는 고뇌와 상실감이 뒤섞인 표정으로 내 말을 듣기 위해 미친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부, 부수는 자?" 몸이 떨렸다. 말을 내뱉기가 힘들었다. "이봐, 미, 미, 미안한데 진짜 이름을 몰라서—"

부수는 자가 첨벙거리며 비틀비틀 일어났다. 화학 물질을 주입한 장비가 무시무시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부수는 자가 내 쪽으로 달려오자 나는 눈을 꽉 감고 충격에 대비했다.

그 순간 머리에서 뜨겁고 거대한 손길이 느껴졌다. 눈을 뜨자 부수는 자가 내 앞에 쭈그린 채 서툴게 내 얼굴과 어깨를 쓰다듬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진짜인지 확인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멀리서 번쩍이는 빛이 천장에 난 틈으로 들어오며 호박색 번개처럼 부수는 자를 비추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부어오른 그는 너무 순진해 보였다. 외로워 보였다.

난 죽을 것이다.

하지만 부수는 자는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부수는 자? 부, 부수는 자, 내 마, 말 잘... 들어." 내 손을 잡은 그가 고개를 돌려 한쪽 귀를 가까이 댔다. "나, 나가는 길이 있어. 천장에 난 구멍 말이야. 여, 여기서 나가고 싶지?"

여전히 내 손을 쥔 부수는 자가 어찌나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던지 내 몸까지 앞뒤로 흔들렸다. 얼음장 같은 몸에 화끈한 고통이 퍼졌다. 이런 열기조차 반가울 지경이었다.

"아! 그래. 좋아. 자, 잘 들어. 잘 들어! 일단 내 소, 손부터 놓고—"

부수는 자는 싫은지 내 손가락을 더 꽉 쥐었다.

물이 내 가슴에서 힘없이 흐느적거리는 가시 촉수에 철썩거리고 있었다. 촉수는 자신의 먹잇감이 되어야 했을 대상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듯 숙주에 들러붙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난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죽을 것이다.

차오른 물이 내 피로 붉게 물든 것을 보니 시간이 얼마 없었다. 서둘러야 했다.

난 다른 손으로 부수는 자의 손을 살며시 풀었다. "괘, 괜찮을 거야, 부, 부, 부수는 자. 약속할게. 일단... 안전한지 확인부터 해야 해." 호흡이 더 힘들어졌다. "해, 해 줄 수 있지? 그럼 우, 우리 둘 다 나, 나갈 수 있어."

거짓말이었지만 부수는 자가 손을 놓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부수는 자의 팔꿈치를 붙잡고 일으켜 세운 나는 통증을 참고 몸을 움직이며 떨어져 나간 틈 쪽으로 조금씩 부수는 자를 떠밀었다.

양팔을 다시 얼음처럼 차가운 물 속으로 늘어뜨렸다. 아마 부수는 자의 온기가 내가 느낀 마지막 온기였을 것이다.

"내, 내, 내 말만 들어. 나, 나가게 해 줄게!" 어느새 물은 목까지 차 있었다. 몸이 어찌나 떨리는지 뭘 똑바로 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앞으로 조금만 더 가. 자, 잔해가 있으니 조심—" 부수는 자가 떨어진 잔해에 정강이를 박아 비명을 질렀다. "괜찮아. 괘, 괘, 괘, 괜찮아. 바, 밟고 올라가. 좋아. 이제 벼, 벼, 벽으로 소, 손 뻗어. 닿지? 좋아. 잘했어. 벽돌 사이에 틈이 있어. 틈을 밟고 오, 올라가. 이제 위로 가. 위로 가, 부수는 자. 그렇지, 거기가 나, 나가는 곳이야."

난 숨을 쉬기 위해 고개를 뒤로 젖혔다. 물이 턱까지 차올랐다. 그나마 몸의 감각 대부분이 사라져 다행이었다.

"올라가, 부, 부수는 자." 난 숨을 헉 들이쉰 후 목을 쭉 빼고 캑캑거렸다. "자, 잘 있—"

물이 얼굴 위로 차올랐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마지막 숨을 참고 있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귓가에 시끄럽게 울렸다. 마음에 드는 소리였다. 이 소리가 그리울 것이다.

폐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때가 됐다. 심장이 아우성쳤다. 감각 없는 팔이 허우적거렸다. 눈이 움찔거리며 떠지고 가슴은 공기를 갈구하며 들썩였다. 마지막 숨을 토하자 씁쓸한 지하동굴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 순간 존재하는 것은 공포뿐이었다.

손에 뭔가 닿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밀어 움직이려고 했다. 위쪽이든 어디든 상관없었다. 그러나 꼼짝도 안 했다. 움직일 수 없었다. 공기가 없는데 움직일 수도 없었다. 난데없이 시야에 부수는 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안 돼! 둘 다 죽을 순 없어! 난 버둥거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몸이 단념하고 있었다. 나도 단념하고 있었다. 시야가 좁고 어두워지며 잿빛으로 변했다. 부수는 자가 몸을 돌리는 모습을 본 나는 그가 살아남길 바랐다.

뭔가 잘못됐다. 아니, 잘됐나?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온기와 움직임이 느껴졌다. 몸이 들리는 기분이었다. 경련이 일며 일순간 시야가 예리해졌다. 물속에서 부수는 자의 뒤통수가 보였다. 내 가슴, 아니, 가슴에 있는 것들이 자신을 누르는 척추를 감지하곤 뒤로 한껏 몸을 젖히며 거대한 아가리를 벌렸다. 반가운 통증이 느껴졌다.

안 돼. 돼. 안 돼!

...난 죽고 싶지 않아!

가슴에 있는 촉수가 표적을 옥죄자 나는 부수는 자의 목 양쪽에 송곳니를 박아 넣었다.

으드득.

나/우리는 살았다!

우리는 여전히 물속에 있었지만 우리의 폐는 공기로 가득했다. (그리고 비어 있었다.) 우리의 팔다리는 튼튼하고 강력했다. (그리고 약하며 부러져 있었다.) 우리는 다시 볼 수 있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나/우리는 희미한 빛을 향해 물속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앞을 가로막은 쇠막대를 밀어내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손은 놀랍도록 크고 생각보다 왼쪽에 있어 하마터면 헛손질을 할 뻔했다. 아니다. 이제 감을 잡았다. 가볍게 밀려난 쇠막대는 저 뒤로 날아갔다. 우리는 다리를 차며 천장에 뚫린 구멍을 향해 끝까지 헤엄쳤다. 마침내 밖으로 나온 우리는 지붕에 털썩 드러누웠다.

공기다.

우리는 우리의 폐에 찬 물을 토해 내는 한편 다른 폐로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아니 '우리'의 폐가 아니라 '나'의 폐였다. '나'의 심장이 강하고 빠르게 박동했다. '나'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난 강력한 팔로 건물 옆을 기어 내려왔다. 발에 닿은 땅이 멀면서도 조금 더 가까운 것처럼 느껴졌다. 들려오는 소리는 상상도 할 수 없이 깊이 있고 명확했다.

냄새를 맡아 보니 자운 깊숙한 곳인 듯했다. 주위에는 뭔가 새어 나오는 용기와 흠뻑 젖어 꿈틀거리는 쓰레기가 잔뜩 쌓여 있었다. 낡은 공장 뒤에 있는 뜰이었다. 저 멀리 위쪽에서는 쓰러진 탑의 일부가 갈라진 벽에 위태롭게 기대어져 있었다. 이차 폭발로 생긴 노란 섬광과 굉음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내 자유의 근원지이자 탄생의 근원지였다.

뒤쪽 감방 벽에서 잔해 조각이 떨어지는 소리에 흠칫한 나는 내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자' 때문이었다.

여기 있어선 안 됐다. (무섭다!)

난 나도 모르게 달리고 있었다.

기분이 짜릿했다. 세상이 이렇게 빨리 스쳐 지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내 다리가 이렇게 가벼이 움직인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난 순식간에 골목을 달려 내려갔다. 앞을 가로막은 관문이 보였지만 삐져나온 배관을 지지대 삼아 도약한 후 위에 늘어진 철책에 매달려 뛰어넘었다.

과거의 나는 둘 다 하지 못할 일이었지만, 나는 할 수 있었다. 너무도 쉬웠다.

나는 속도를 거의 늦추지 않고 가볍게 착지했다. 그 충격에 부러진 척추 쪽이 아파 왔지만 예전과 달리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다. 이제 내 강점은 서로를 강화하고, 약점은 인식 후 보완되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나는 전보다 낫고 완전한 존재가 되었다. 나 자신이 든든했다.

앞으로 성큼성큼 뛰어 골목을 벗어나자마자 영광된 진화단 교회를 나오는 신자 몇 명과 마주쳤다. 다들 기계 다리와 산소마스크, 이질적인 금속 팔 등 이상한 증강체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하지만 증강체에 집착하는 이 불안정한 광신도들은 하나같이 그 자리에서 딱 멈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등에 뭐가 있어." 기계 눈이 달린 남자가 말했다.

"저게 대체 뭐야?" 등에 인공 폐를 지고 있는 여자가 물었다.

"저 사람을 먹고 있어!" 무리 뒤쪽에서 누군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사람들의 표정이 충격에서 혐오로 바뀌었다. 나는 뒷걸음질을 쳤지만 둘러싸이고 말았다.

누군가 뒤에서 나를 밀쳤다. 난 그만하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제— —알 내— —어."
"—발 나— —버려 두—"

두 입에서 말이 순서대로 떠듬떠듬 이어져 나왔다. 처음으로 들은 새 목소리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신도들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머리 옆으로 돌이 날아왔다.

"그만해-해. 내가 무슨- 짓을 했다-했다고 이래-." 나는 빌었다. 말은 여전히 제대로 나오지 않아 마치 메아리를 통해 말하는 것 같았다. 입에서도 원하는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이들 역시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무리에서 노란 머리의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증강된 손목에는 무거운 망치처럼 보이는 증강체가 달려 있었다. 남자는 그것을 들어 올려 공격하려고 했다.

"내버려 두라고 했지!" 내 진정한 목소리였다. 소란 속에서도 또렷하고 조화로웠다. 하지만 지금 말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미친 듯이 주위를 둘러보자 위에서 골목을 연결하는 증기관이 보였다. 남자가 공격하기 직전 뛰어오른 나는 증기관을 끌고 내려와 공격을 막았다. 망치가 관을 꿰뚫자 남자의 얼굴로 고온의 증기가 터져 나왔다. 남자는 소리를 지르며 뒤로 자빠졌다.

바로 도망치자 신도들이 고함치며 협박하는 소리가 들렸다. 난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어두운 자갈길을 달려 내려갔다. 공동 주택 구역과 길모퉁이에 자리한 가게들을 지나 죽마를 탄 배관 청소부 둘과 용수철 상인을 지나쳤다. 빠른 속도로 계단을 오르내리고 모퉁이를 돌았다. 전력으로 질주하며 비교적 작은 다리를 건너자 발밑에서 쇠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때 한 노점상에서 반쯤 익숙한 냄새가 풍겼다. 난 빈 가판대 뒤에 몸을 숨기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마음 한구석에서 어렴풋이 떠오르는 냄새였다. 이곳은... 엄마와 함께 오곤 했던 곳이다. 난 엄마에게 쇠붙이 두 개를 받아 귀리죽을 파는 아줌마에게 주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릇을 집으로 들고 갔다.

집. 생각하는 것만으로 눈물이 났다. 숨을 만한 곳, 쉴 수 있는 곳, 안전한 곳이었다.

집은 여기서 멀지 않았다!

이번에는 애타는 마음으로 달려 나갔다. 협곡 쪽에 있는 돌계단을 세 층 올라가 망가진 옛 온실을 지난 후 팩토리우드 끝으로 두 거리를 내려갔다.

어느새 나는 내 집이었던 곳에 도착해 있었다. 방치된 지 오래된 집은 까맣게 탄 껍데기만 남은 상태였다. 나는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이곳은 나의 집이었다. (아니, 그렇지 않다.) 난 이곳에서 엄마, 형제와 함께 살았다. (아니, 그러지 않았다.) 엄마는 벽을 노랗게 칠하며 노란 페인트가 액체 형태의 햇빛이라고 말했다. (난 여기 와 본 적이 없다.)

수없이 많은 폭풍우에 젖어 뒤틀린 계단을 조심스레 올라갔다. 손에 닿는 난간이 익숙했다. (낯설었다.)

엉망이 된 문을 밀어젖히자 환영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밝게 웃던 시절의 행복한 기억이 불탄 잔해만이 널린 현실과 충돌했다. 얼굴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곳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게 분명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안방으로 이어지는 문은 경첩에서 떨어진 지 오래였고 지붕은 무너져 내렸지만 내 시선은 왼쪽 구석으로 이끌렸다. 내가 잠을 자곤 했던 작은 침대가 검게 그을려 있었다. 난 가까이 다가가 처음으로 옆쪽 벽에 새겨진 이름을 읽었다.

"팔로."

나였다. 내 이름은 하드리— 아니, 팔로였다. 둘 다 나였지만 이곳에 살던 나의 이름은 팔로였다. 하드리의 어머니가 출산 중 죽은 것과 달리 팔로는 엄마의 손에서 자랐다.

무슨 일이 있었지? 사고가 났나? 공격을 받았나? 엄마가 화공 남작을 잘못 건드렸나? 내가...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 무슨 짓을 한 것은 아닐까?

엄마의 책상은 흠뻑 젖어 엉망진창으로 부서져 있었다. 그런데 쌓여 있는 나무 파편 속에서 뭔가 반짝였다. 엄마의 손거울이었다. 열 때문에 금이 간 것처럼 보였다. 나는 손거울을 집었다. 하드리였을 때는 붕대를 두른 남자가 날 어떻게 바꿨는지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예전 일이었다. 난 여러모로 달라졌다. 이제는 알아야 했다.

나는 거울을 봤다.

악몽이 나를 마주 보았다. 두들겨 맞아 피투성이가 된 눈먼 남자가 서 있었다. 팔뚝에는 빛나는 초록색 관과 선이 둘둘 감겨 꽂혀 있었다. 남자의 등에는 허약해 보이는 기생체가 매달린 상태였다. 남자의 목에 오그라든 팔을 감은 기생체는 주사기 같은 송곳니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여윈 다리는 쓸모없이 덜렁거렸다. 남자의 어깨 뒤에서 거울에 비친 모습을 바라보던 번들거리는 혈안이 공포로 휘둥그레졌다.

혐오감이 엄습했다. 나는 거울을 떨어뜨리고 제일 큰 손으로 허겁지겁 숙주에 붙은 기생체를 떼어 내려고 했다. 나는 흉측했다. (나는 똑똑해졌다!) 나는 실패한 실험체일 뿐이다. (나는 더 나아졌다!) 이제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새로운 내가 좋다!) 나는 언제까지나 혼자일 것이다. (혼자 있고 싶진 않다!)

혼자.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두 생명의 격렬한 외로움이 밀려들자 난 머리를 뒤로 젖히고 울부짖었다. 누구도 느껴서는 안 되는 감정이었다. 누구도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었다. 나는 두 배가 된 상실감, 공유된 상실감에 울부짖었다. 나 자신과 깊은 상실감에 빠진 두 생명을 연민하며 울부짖었다. 자운 전역에서 동물과 인간, 동물도 인간도 아닌 존재가 그 외침에 답하며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외로움으로 하나가 되는 모순적인 순간이었다.

나는 무릎을 털썩 꿇었다. 뒤쪽 바닥에 쓸모없는 발이 스쳤다.

나는 살아갈 것이다. 팔로도 하드리도 아닌 삶을. 부수는 자도 생각하는 자도 아닌 삶을. 나는 둘 모두이자 전부였다. 차라리 이 편이 나았다.

나는 벽에서 불타다 만 커튼을 뜯어 어깨 위에 걸치며 시야를 가리지 않게 조심했다.

내 기억은 너무 이상했고, 복잡했고, 혼란스러웠다. 나는 이곳에 머물 수 없었다. 문밖으로 걸어 나가 계단을 내려가며 어딘가 나 같은 괴물이 갈 만한 곳이 있을지 생각했다.

딸깍

"예상치 못한 문제가 터진 것이 영향을 주었는지 모르겠지만 마침내 숙주 실험의 첫 번째 단계가 완료되었다."

딸깍

몸이 얼어붙었다. 집 앞으로 난 좁은 길에서 날 감금했던 남자가 공압식 화살 총을 겨눈 채 서 있었다. 남자의 허리띠에서 알 수 없는 액체(뜨거운 것이다!)로 가득 찬 유리병이 쨍강거리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등에 멘 가방을 보니 그보다 끔찍한 것도 잔뜩 가져온 듯했다.

'저 남자'가 날 이렇게 만들었다.

두 가슴에 차오르는 분노가 느껴졌다. 두 심장이 갈비뼈만을 사이에 둔 채 서로를 향해 쿵쾅거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남자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어딜!" 남자가 경고했다. 남자는 태연히 화살 총을 옆으로 휙 돌리더니 방아쇠를 당겨 커다란 청록색 딱정벌레에게 화살을 명중시켰다. 나는 화살에 든 액체가 딱정벌레의 몸에 주입되는 것을 두렵게 지켜보았다. 액체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딱정벌레의 비명이 네 개의 귀로 지나치게 생생히 들려왔다.

어느새 다시 장전된 화살 총이 나에게 겨눠졌다. 나는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딸깍

"지금부터 하는 질문의 대상은 생각하는 자다. 빨리 대답하지 않으면 의욕이 나도록 압박을 가하겠다."

"뭐?"

"입 다물어. 첫 번째 질문이다. 네 본명이 뭐지?"

남자의 길고 얼룩진 손가락이 녹음 장치의 스위치 위를 맴돌았지만 화살 총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하드리 스필웨더." 나는 탈출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어디로든 도망쳐야 했다.

"좋아. 다음 질문이다. 네 아버지 이름이 뭐지?"

아버지? 난 아버지가— 잠깐, 아니, 나에게는 아버지가 있었다. 난 병이 악화한 아버지를 간호했다. 아버지 이름... 아버지 이름은...

"어서 질문에 답해!" 붕대를 두른 남자가 재촉했다.

"아번! 아번 스필웨더!" 예상보다 안심한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필사적인 목소리였다.

"흠. 더 빨리! 사는 곳은 어디였지? 네 직업은 뭐였지? 과학원에서 날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자기소개를 하면서 말한 이름은?"

"여기야! 난 여기 살— 아니, 잠깐. 여... 여기가 아니라... 451호! 스멜블룸 하숙집 451호였어! 직업? 그... 점원이었나? 기억이... 기억이 안 나. 너무 오래전 일이라고!" 나는 땀을 줄줄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딸깍

"형편없군. 참 안타까워. 일종의 게슈탈트 상태로 넘어가 주요 정신의 순도가 오염되었다. 더 이상 연구 대상으로 적합하지 않다."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홱 돌아서 가 버리기 시작했다.

얼굴이 치미는 분노로 일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저자'가 날 이렇게 만들었다. '저자'가 화학 물질로 우리 집에 불을 질렀다. 이제야 집이 어쩌다 불탔는지 떠올랐다. '저자'는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내 희망까지 이용했다.

이제 '저자'가 죗값을 받아야 했다.

남자는 네 걸음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제 두 걸음이었다. 그때 자리에서 휙 돈 남자가 내 발밑에 뭔가 든 유리병을 깨뜨렸다. 걸음을 내디디려던 나는 신발이 땅에 단단히 달라붙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는 아슬아슬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나는 헛되이 허공을 할퀴었다.

"생각하는 자라는 이름이 아깝군. 내가 너무 낙관적이었어. 두 번 다시 해서는 안 될 실수야."

남자는 한 걸음 길게 물러서더니 몸을 돌려 좁은 골목길로 향했다. 레븐 골목길. 똑똑히 기억났다. 나는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쭈그리고 앉아 재빨리 신발 끈을 풀고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힘차게 뛰어올라 골목길을 내려가는 남자를 맨발로 살그머니 뒤쫓았다.

골목은 어두웠지만 내 청각은 예리했다. 첫 번째 모퉁이 끝에서 남자가 실험체이니 출처이니 하며 계속 중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골목은 악취가 심했다. 나는 좁은 틈과 판자로 막은 문간을 지나며 발에 밟히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첫 번째 모퉁이에 다다랐을 즈음 남자는 쭉 뻗은 다음 구간을 절반 정도 내려간 상태였다. 어두운 데다가 스모그가 끼어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몸을 굽혀 땅에 떨어져 있는 부러진 배관을 들었다. 무기로 쓸 만해 보였다. 그러나 몸을 일으킨 나는 다급해졌다.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럴 리가! 나는 앞으로 성큼성큼 뛰어가며 문간을 전부 확인했다. 역겨운 공기에 터져 나오는 기침을 커튼으로 막아 보려고 했지만 두 입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점점 어지러워졌다. 내가 온 길을 돌아보았다. 안개가 짙었다. 너무 짙었다.

남자가 가스를 쓴 것이 분명했다! 나는 한 입을 커튼으로 감싸고 다른 입은 내 어깨에 묻은 채 최대한 숨을 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함정이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왔을 때보다 모퉁이가 멀어 보였다. 반드시 돌아가야 했다. 달리기 시작한 나는 징 박힌 붉은 금속 문이 벌컥 열리는 바람에 얼굴을 처박고 쓰러졌다.

팔다리가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너무 무거웠다. 내 무게가 등에 매달린 나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미 숨을 쉬기도 벅찬 상태였다.

난 죽을 것이다.

붕대를 두른 남자가 내 옆에 서 있었다.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렀다. 내 살인자를 올려다본 나는 마침내 기억해 냈다.

남자의 얼굴 위로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얼굴이 겹쳤다. 색안경을 끼고 턱을 말끔히 면도한 남자였다. 수년 전 처음 만난 남자는 실험실에서 강의실로 이어지는 복도를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나는 높은 자리에 오른 남자를 존경과 선망, 알 수 없는 감정(두려움!)을 담아 올려다보았다. 남자가 지나간 자리에서는 희미한 향수 냄새가 났다.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날 바라보았다. 익숙한 동정의 시선이 아니라 흥미와 기대가 어린 시선이었다. 남자는 자신을 소개했다.

"신지드. 당신은 자신이 신-신지드 교수라고 했어."

두 목소리가 떨어져 나왔다. 마지막 순간에 난 다시 혼자가 되었다.

참담할 정도로 철저히 혼자였다.

신지드는 필사적으로 뭔가를 찾으며 가지고 온 물건을 미친 듯이 뒤졌다. 치료제? 자비를 베풀려는 것일까?

신지드가 찾은 것은 녹음 장치였다. 신지드는 녹음 장치를 켠 후 쭈그리고 앉아 관찰했다.

"잘했다, 생각하는 자 4호. 이걸로... 그래... 생각하는 자 2호보다도 답을 더 많이 맞혔군! 아주 큰 도움이 됐어."

신지드의 녹음 장치에서 딸깍 소리가 났다.

그것이 내가 들은 마지막 소리였다.

5. 구 설정

5.1. 구 단문 배경 1

신지드는 제정신이 아닌 자운의 화학자로 도덕관념은 없지만 능력은 누구보다 뛰어나다. 어린 시절부터 영재였던 그는 화학공학과 생물학 실험을 통해 끊임없이 전통 과학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했다. 신지드는 자신만의 기술을 끊임없이 연마했고 치명적인 화합물로 자신의 몸에 광범위한 수술을 자행한 결과 무려 한 세기가 넘도록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도덕이나 다른 사람들의 의견 따위는 그가 하고자 하는 실험을 결코 막을 수 없다.

5.2. 구 단문 배경 2

신지드는 자운에서 견줄 데 없이 뛰어난 지성을 가진 화학자로, 지식의 한계를 돌파하는 데에 자신의 삶을 바쳤지만, 그 대가는 엄청났다. 바로 정신이 나가 버린 것이다. 신지드는 광기를 얻는 방법이라도 알아낸 것일까? 신지드의 혼합물은 실패하는 법이 거의 없지만, 많은 이들이 보기에 신지드는 이미 인간성을 모두 잃고, 그저 나타나기만 하면 고통과 공포의 독극물 자취를 남기는 인물일 뿐이다.

5.3. 구 배경

자운의 존경받는 화학자 중에서도 신지드만큼 뛰어난 실력을 보유한 이는 여태껏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물약을 만드는데 천부적인 소질을 보였던 그는 이내 평범한 동료를 제치고 자운의 전통을 잇는 최고의 화학자로 성장했다. 신지드가 명성을 쌓아가고 있을 무렵 아이오니아녹서스 사이에서는 끊임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녹서스 군과 거래해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던 악명 높은 약제사 워윅은 신지드를 눈여겨보고 있었고 마침내 그를 조수로 발탁하기에 이른다. 신지드는 워윅의 실험실에 틀어박혀 끊임없이 실험에 매달렸고 스승의 치명적인 화학 지식을 무언가에 홀린 듯 순식간에 흡수해 나갔다. 그는 성공적인 실험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손끝에서 죽음과 파괴가 탄생하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늑대인간의 저주가 그의 스승을 앗아가 버렸다. 그 사건으로 신지드는 소중한 후원자를 잃게 되었지만 동시에 단순히 우직한 일꾼에서 혁신적인 발명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얻었다. 신지드는 자신의 천재성을 뽐내기 위해 녹서스 군에게 특제 발명품을 아낌없이 쏟아냈고 이는 아이오니아에게 새로운 재앙과 절망으로 들이닥쳤다. 시간이 흘러 쓸만한 실험 대상은 씨가 말라버렸지만, 신코너의 열정은 여전히 식을 줄 몰랐다. 그래서였을까? 일각에서는 이 열성적인 화학자가 자신의 몸에까지 치명적인 화합물을 쏟아 부으며 실험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다.

리그 오브 레전드가 가져온 불안정한 평화가 세상에 자리 잡을 무렵, 신지드는 화학 실험을 계속할 수 있는 곳이 이제는 전쟁학회밖에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이윽고 신지드가 전쟁학회에 당도했을 때 그는 거의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그의 몸뚱이는 자신이 개발한 화학 약품에 의해 여기저기 벗겨지고 녹아내렸으며 아물지 않은 생채기에서는 진물이 흐르고 있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 위로 어둠과 불꽃으로 말미암은 수천 개의 상흔이 새겨져 있었고, 유독 물질에 장시간 노출된 그의 몸은 더는 아무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천재 화학자를 동정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신지드의 상태를 조금만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그는 이제 강력한 갑옷을 입고 그 어떤 유독 물질에도 끄떡없는 강철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었다. 강력한 육체와 치명적인 화학 약품으로 무장한 신지드는 정의의 전장에서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오늘도 자신의 획기적인 화학 약품을 만천하에 공개할 전시장을 찾고 있다.

"내 가장 치명적인 물약에는 후원자의 이름을 붙여 주리라!" - 신지드, 광기의 물약에 막 이름을 붙인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