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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03 23:21:29

스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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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라 항에서 바라본 항구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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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만 일대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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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중심 광장

아랍어 سكيكدة
베르베르어 ⵙⴽⵉⴽⴷⴰ
영어, 프랑스어 Skikda

1. 개요2. 역사
2.1. 고대 : 루시카데2.2. 근대 : 필리프빌
3. 갤러리

1. 개요

알제리 북부의 도시. 콩스탕틴에서 동북쪽으로 50km, 안나바에서 서쪽으로 60km, 지젤에서 동쪽으로 70km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다. 알제리 최대의 석유 산업 도시로, 인구는 25만명이다. 고대 도시 루시카데가 있었으나 반달 왕국에 의해 파괴되었고, 1838년 프랑스 당국에 의해 당시 국왕 루이 필리프의 이름을 딴 필리프빌이란 이름으로 재건되었다. 알제리 동부의 중심 항구로 크게 개발되었고, 현대에 들어서는 삼성 엔지니어링이 공사에 참가한 정유 공단이 세워져 알제리의 주요 석유 및 천연가스 산업 도시로 거듭났다. 석유 제품 외에도 철광석, 올리브유를 수출한다.

시가지를 관통하는 와디 제라므나를 경계로 서쪽은 주거지, 동쪽은 공단 지대이다. 대체적으로 서쪽 해안은 절벽이고, 동쪽 해안에는 모래 사장이 펼쳐져 있다. 전자의 제노바 시기 성채와 후자의 리조트 모두 관광객을 끌어 모은다. 시내의 독특한 교통 수단인 동서 언덕을 잇는 1km 거리의 케이블카 역시 볼거리 중 하나로, 2009년에 개통하였다. 시가지 남부에는 1955년 8월 20일 대학교가 있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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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시대 극장과 조각상 유구

2만년 전부터 인류가 정착하여 동굴이나 고인돌 등의 유적이 일대에 흩어져 있다. 스킥다 만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강을 끼고 있는 이곳에 페니키아 인들이 인근 곶에 무역 거점 루스카드를 세웠다. 이는 곶을 뜻하는 루스 (아랍어의 라스)와 불을 뜻하는 우카드가 합쳐진 말로, '불의 곶'이라는 의미이다. 지명대로 페니키아 인들은 강 하구 쪽의 절벽에서 불을 피워 일종의 초기 등대로 활용하였고, 현 지명인 스킥다 역시 베르베르어로 '전망대'를 뜻하는 아스카드에서 유래하였다. 누미디아를 거쳐 로마 제국기에 정식으로 항구가 세워졌고, 인근 키르타 (콩스탕틴)과 히포 레기우스 (안나바) 등과의 가도가 놓였다. 라틴식인 루시카데로 명명된 도시는 동쪽의 시카 베네리아 (엘케프)와 마찬가지로 베누스 여신을 주신으로 모셨다.

2.1. 고대 : 루시카데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기에 누미디아 최대의 극장이 세워지는 등 인구 1만의 도시가 되어 번영하던 '콜로니아 베네리아 루시카데'는 5세기 반달 왕국의 지배 하에 교역이 줄어들며 쇠퇴하였다. 533년 동로마 제국군이 루시카데를 함락하자 반달 왕국의 마지막 왕 겔리메르는 카빌리 산지로 피신했다가 결국 항복한다. 700년경 일대는 이슬람 제국에게 정복되었고, 내륙 밀라의 무슬림 총독들에 의해 이슬람화되었다. 그후 현 지명인 스킥다로 불리게 되었고, 이따금씩 배들이 풍랑을 피해 정박한 것을 제외하면 버려져 있었다. 15세기 무렵 제노바 공화국이 잠깐 일대에 왕래하며 서쪽 스토라 항의 원숭이 섬에 성채를 세우기도 하였으나 기존 시가지 자체는 유적으로 남아있었다.

2.2. 근대 : 필리프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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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령 알제리 시기 성벽과 건물군

1837년 두 차례의 시도 끝에 프랑스군은 스토라 항을 통해 알제리 동부에 상륙하였고, 공방전 끝에 그해 10월 콩스탕틴을 점령하며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이듬해인 1838년 1월, 프랑스군은 옛 루시카데의 도시 구조를 재활용한 항구 도시를 세우고 '프랑스의 항구'란 의미인 포흐 프랑스라 명명하였다. 다만 얼마 후 당시 국왕의 이름을 따서 필리프빌이라 개칭되었다. 베니 메헨나와 베시르 등 인근 산지의 부족들은 프랑스 지배에 저항했으나, 1840년 베자이아의 성인의 이름을 딴 시디 알리 엘 아빕 모스크를 세우는 등의 조건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콩스탕틴의 외항으로써 필리프빌은 크게 개발되었고, 1865년 3월 알제리 순행에 나선 나폴레옹 3세가 방문하였다. 1883년 10월 지진을 겪었지만 철도가 개설되는 등 번영은 이어졌다.

2.2.1. 알제리 독립 전쟁과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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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스킥다 전경

1911년 파업에 나선 부두 노동자들은 터키 깃발 혹은 (알제리 국기의 시조인) 초록 월성기를 흔들며 민족 의식을 고취하였다. 1차 대전 중인 1914년에는 터키 깃발을 한 독일 해군이 도시를 포격하였고, 관련 참언이 퍼지는 등 독립에 대한 열망이 구체화되었다. 2차 대전 중인 1942년에는 연합군이 상륙하였고, 이에 추축국의 공습이 이어졌다. 전쟁 말엽에는 UNRRA 난민 캠프가 인근에 세워졌다. 1943년 7월, 프랑스군 소속 세네갈 부대가 영국군의 개입 전까지 아랍인 구역에서 30여 알제리인을 학살하는 비극이 있었다. 알제리 독립 전쟁 시에 국가해방군 (ALN)은 스킥다를 공격해 유럽인 백여명을 학살하였고, 분노한 프랑스 측은 민병대와 낙하산 부대를 동원해 알제리인 2천여 명을 경기장에서 집단 학살하였다. (1955년 8월) 피의 보복은 7년 후 알제리가 독립하고 피에 누아르들이 유럽으로 대거 이주하며 마침내 종식되었고, 70년대 들어 석유 산업 도시로 개발되어 현재에 이른다.

3.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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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의 명물인 케이블카 (곤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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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라 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