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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비슈할 Schwäbisch Hall (슈베비슈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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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행정 구역|바덴뷔르템베르크의 현 |
슈베비슈할 Schwäbisch Hall | |||||
휘장 | |||||
슈베비슈할의 위치 | |||||
<colbgcolor=#000><colcolor=#fff> 행정 | |||||
국가 | 독일 | ||||
시간대 | (UTC+1/+2) | ||||
주 | 바덴뷔르템베르크 | ||||
현 | 슈투트가르트 현 | ||||
군 | 슈베비슈할 군 | ||||
인문환경 | |||||
면적 | 104.23km | ||||
인구 | 42,743명(2023년 12월) | ||||
인구밀도 | 410명/km² | ||||
홈페이지 | |||||
정치 | |||||
시장 | 다니엘 불링어 | [[자유민주당(독일)| 자유민주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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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슈베비슈할은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에 있는 도시로 슈베비슈할 군의 행정 중심지다. 이 도시는 바덴뷔르템베르크 북동부에 있는 코셔강 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슈베비슈할은 1802년 뷔르템베르크에 합병될 때까지 5세기 동안 독일제국의 자유도시였다. 명칭에서 슈베비슈는 슈바비아 동맹을 나타내고, 이름의 두 번째 부분인 할(Hall)의 기원은 불분명하다. 1925년 소금공장이 문을 닫을 때까지 사용된 '개방판 소금 제조법'이라는 게르만족 말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2. 역사
슈베비슈할에는 기원전 5세기 초 켈트족이 거주했다. 1063년 오링거가 작성한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소금을 생산하며 생계를 이어갔다고 전해진다. 콤부르크-로텐부르크 백작이 처음 이 도시를 소유하다가 1116년경, 12세기부터 13세기까지 신성 로마 제국을 지배하던 독일의 왕가인 호엔슈타우펜 황실에게 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1189년 프레데릭 1세 바르바로사 황제가 이른바 헬러라는 화폐를 처음 주조했다. 슈베비슈할은 소금과 화폐를 생산하며 날로 번창해 1204년에는 도시로 자리 잡았다.슈베비슈할은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주로 귀족 가문이나 콤부르크 수도원이 주변 지역의 넓은 영토를 소유했다. 이 시대상은 1427년부터 1526년 사이에 재건축한 마이클 교회 외관이나 계단(1507)과 같은 중세 고딕 양식의 건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슈베비슈할은 매우 일찍 개신교파에 가담했다. 마르틴 루터의 추종자인 요하네스 브렌즈는 1522년 미카엘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이후 그는 루터교 노선을 따라 교회와 학계를 빠르게 재편하기 시작했다.
슈베비슈할은 30년 전쟁 동안 스웨덴, 프랑스 등 여러 나라로부터 심한 약탈을 당했다. 1634년과 1638년 사이에 많은 슈베비슈할 거주자들은 굶주림과 질병, 특히 선혈성 전염병으로 죽었다. 하지만 지속적인 소금 생산과 증가하는 와인 무역에 힘입어 빠른 회복을 했다. 슈베비슈할은 1680년과 1728년, 두 차례에 걸친 큰 화재로 294채의 개인 주택을 비롯해 교회, 병원, 시청, 소금 공장 등 도시의 3분의 2가 불타버렸다. 이때 파괴된 건물은 후에 바로크 양식으로 다시 지어졌다.